가던 길 멈추고

[스크랩] 경주 흥덕왕릉(興德王陵)

문근영 2015. 10. 30. 03:08

경주 흥덕왕릉(興德王陵)



전경


전경


근경


지정 번호; 사적 30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42

지정일; 1963121

시대; 통일신라 흥덕왕

분류;

내용; 경주 흥덕왕릉은 신라 42대 임금 흥덕왕(재위 826~836)의 무덤이다.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에 있는 어래산(魚來山)의 남동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의 말단 완만한 경사면에 자리 잡고 있으며, 육통리 마을에 바로 접해 있는 뒷산에 있다. 전형적인 풍수지리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는 능은 지금까지 신라의 왕릉으로 알려진 것들이 대부분 경주 분지와 접한 남쪽의 산간에 위치하는 것에 비하여 북쪽으로 멀리 안강읍에 위치하여 다른 것들과 비교된다. 신라 역대 왕릉 중에서 규모가 크고 괘릉(사적 26)과 함께 능묘 제도가 잘 갖추어진 신라 왕릉이다. 흥덕왕은 본명이 김수종(金秀宗 또는 景徽)이고, 41대 임금인 헌덕왕(憲德王)의 동생으로 왕비는 장화 부인(章和夫人)이다. 재위 기간에는 전라도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장보고(張保皐; ?787~846)를 대사로 삼아 서해를 방어하게 하였으며, 당나라로부터 가져온 차() 종자를 지리산(智異山)에 심게 하고 재배시켰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장지가 안강북 비화양(安康北 碑火壤)’이라고 하여 현재의 위치와 대체로 부합되며, 특히 왕릉의 주위에서 興德(흥덕)’이란 명문의 비편이 발견되어 이 능이 흥덕왕릉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에 따르면 왕비와 합장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흥덕왕은 임금이 된 첫 해에 왕비인 장화 부인이 죽어 11년 동안 죽은 부인만 생각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왕이 장화 부인의 무덤에 합장하기를 유언하여 흥덕왕릉에 합장하였다고 한다. 지정 면적은 61,983[18,783]에 달한다.

  흥덕왕릉은 원형 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20.8m, 높이 6m이며, 봉토 밑에는 호석(護石; 둘레돌)을 둘렀다. 호석은 바닥에 지대석(地臺石; 바닥돌)을 놓고 그 위에 판석으로 면석(面石)을 세우고 면석 사이에는 탱석(撑石)을 끼워 면석을 고정시켰다. 아울러 탱석에는 각각 방향에 따라 12지신상을 조각하였고, 그 위에는 갑석(甲石)을 올려 호석을 마무리하였다. 호석이나 12지신상의 조각은 괘릉의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그 조각 수법은 괘릉에 뒤진다. 호석의 주위로는 판석을 깔아 회랑(廻廊)을 설치하고 호석에서 1m 거리를 두고 능 둘레에는 1.9m 높이의 석난간(石欄干)을 돌렸는데 석난간의 석주(石柱)2주를 제외하고는 거의 유실 내지 훼손된 것을 복원하였다. 능의 바로 앞에는 상석(床石)과 후대에 설치한 향로대(香爐臺)가 있다. 왕릉의 외부에는 네 모서리에 석사자가 배치되었는데 이는 성덕왕릉(사적 28)의 석사자 배치와 같다. 능 앞으로는 문인석 한 쌍과 무인석 한 쌍, 석화표(石華表) 한 쌍이 배치되었다. 무인석은 서역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왕릉의 전방 좌측에는 능비(陵碑)를 세웠는데 능비는 현재 귀부(龜趺;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만 남아 있고 비신(碑身)과 이수(螭首; 머릿돌)는 없어졌다. 귀부의 조각 수법은 성덕왕릉의 귀부와 유사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왕릉은 성덕왕릉괘릉의 형식을 모방하여 건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기 사항; 삼국유사에 전하는 무덤의 위치가 이 무덤과 대체로 일치하며, 왕릉 주위에서 興德(흥덕)’이라는 글자가 쓰여 진 비석 조각이 발견되어 흥덕왕의 무덤이라는 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전체적인 배치와 장식물의 양식으로 볼 때 성덕왕릉괘릉의 형식을 많이 본 따고 있다.


이야기 1; 흥덕왕은 신라 42대 임금으로 826년에 즉위했다. 바로 그 즈음이다.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신하가 귀국 길에 새 임금에게 드릴 선물로 앵무새 한 쌍을 가져왔다. 흥덕왕은 처음 보는 새가 이상한 재주까지 부리는 데 매우 신기해하고 즐거워했다. 그런데 정성껏 보살폈건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암컷이 죽고 말았다. 홀로 남은 수컷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애처로이 울기만 했다. 왕이 이 꼴을 보고 가여워서 한 가지 꾀를 냈다. 수컷 앞에 거울을 걸어 제 모습이 비치게 한 것이다. 숫앵무새가 울다가 쳐다보니 저와 비슷하게 생긴 앵무새 한 마리가 슬픈 얼굴로 마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숫앵무새는 반가운 나머지 마주 보이는 앵무새를 향해 부리를 쪼았다. 그러나 부리에 닿는 것은 딱딱하고 차가운 거울뿐이었다. 그제야 그것이 제 그림자인 줄을 안 수컷은 몇 날 며칠을 구슬피 울다가 끝내 죽고 말았다. 흥덕왕은 이 불쌍한 앵무새를 위해 노래를 지었다. 허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으니 노래의 내용을 알 수는 없다.


이야기 2; 경주를 사랑했던 토박이 석당(石堂) 최남주 선생

  1963년 석당 선생이 남산 불곡 골짜기에서 찾아낸 신라시대 석관의 길이를 재고 있다. 이 석관은 경주 박물관으로 옮겨져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다. 경주가 신라의 도읍이 된 후 경주를 사랑한 사람은 많다. 그러나 경주 사람으로 이 땅이 어두웠던 일제시대는 물론이고 해방 후에도 경주를 사랑한 사람 중 석당 최남주 선생처럼 일생을 경주 사랑에 바쳤던 인물도 드물다.

  1905년 경주에서 출생했던 석당 선생은 1926년 우리나라 민간 문화재 보호 단체의 효시로 볼 수 있는 경주 고적 보존회에 첫 발을 디딘 후 이 해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경주 박물관 창설에 참여함으로써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 고고학계와 신라 문화 보존에 크게 기여했다.

  선생의 업적 중 가장 빛나는 것은 192610월 10일에 있었던 서봉총 발견이다. 서봉총 발굴이 시작될 즈음 스웨덴 구스타프 아돌프와 황태자비 루이스가 일본을 방문 중이었는데, 일본은 구스타프 황태자가 고고학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경주로 데리고 와 서봉총 발굴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시 발굴에서 금빛 찬란한 금관이 나오자 구스타프 황태자는 손수 금관을 들어내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서봉총 발굴에는 구스타프 황제가 참여함을 기념하기 위해 서전(瑞典)()’자와 금관의 수지형 입회식 끝에 ()’을 조각한 특징을 감안해 이 고분을 서봉총(瑞鳳塚)’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후 왕위에 오른 황제는 한국의 맑은 가을 하늘 아래서 찬란한 황금관을 들어낼 때의 황홀한 감격을 평생 잊지 못했으며 금관의 발굴로 우리나라와 스웨덴이 친교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서봉총에서 발견된 금관은 현재 국립박물관 고고관에 전시 중이다.

  남산 신성비 발견도 석당 선생의 업적이다. 19341031헌강왕릉의 능지기가 자신의 집 앞 돌다리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선생에게 알려왔다. 선생이 조사해 보니 이 돌에는 209행의 육조 서체의 이두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두문을 풀이해 본 결과 이 비석이 진평왕 13(591)에 만들어진 남산 신성 축성비였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비는 신해년 216일에 남산 신성을 절차에 따라 축조함에 3년 이내에 허물어지는 일이 있으면 죄를 달게 받을 것임을 서약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런 내용 다음에는 공사를 맡은 사람들의 이름을 출신부와 관명 직을 붙여서 차례로 기록하고 있다. 이 비는 진흥왕 순수비 다음으로 오래된 것이고 이두문으로는 가장 오래 되었다.

  석당 선생은 또 흥덕왕릉의 위치를 정확히 고증했다. 1957년 봄 석당 선생은 당시 연희학교의 민영규 교수와 아들 정채군과 함께 경주시 안강에 있는 흥덕왕릉을 찾았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정채군이 흥덕(興德)’이라는 글이 새겨진 돌 조각을 발견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흥덕왕릉 앞에 있는 이 비는 머릿돌과 빗돌이 없어지고 받침대만 남아 있어 이 능의 피장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날 이들 일행이 비 조각을 발견함으로써 이 능이 흥덕왕릉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경주에는 현재 25~26기의 능이 있지만 이 중 무열왕릉흥덕왕릉을 제외하고는 피장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밝혀진 것이 없다. 안타깝게도 이 날 발견된 비 조각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행방을 알 수 없다. 석당 선생은 돌아갈 때까지 이 비조각의 행방을 몰라 애태웠다.

  석당 선생은 이외에도 석굴암 감실 안 유마 거사상과 11면 관음보살 앞에 있었던 5층 석탑이 없어지자 이를 당시 총독 데라우치가 가져간 것을 추적해 밝히기도 했다. 석당 선생은 또 1926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총독부가 남산에 대한 불적 조사를 벌일 때 한국인 최초로 참여해 불교 문화재를 많이 찾아내어 경주박물관에 전시했고 1933년에는 외동에 있는 원원사지 석탑 복원에 참가했다. 1938년에는 보성고 동창인 우현 고유섭 선생과 함께 동해구 유적 답사에 나서기도 했다.

출처 : 불개 댕견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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