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서출지(書出池)
•지정 번호; 사적 138호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1길 17(남산동 973)
•지정일; 1964년 7월 11일
•시대; 신라 소지왕 10년(488)
•분류; 원지
•내용; 경주 서출지는 경주시 남산동의 남산 마을 한가운데에 3층 석탑 두 기가 있고 동쪽에 아담한 연못이 있다. 신라 21대 임금인 소지왕 시대에 《삼국유사(三國遺事)》 ‘권일 사금갑(射琴匣)’의 전설과 관계있는 못이다. 488년(신라 소지왕 10)에 왕이 남산(사적 311호) 기슭에 있던 천천정(天泉亭)이라는 정자로 가고 있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쫓아 가보라” 하니 괴이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따라 가보게 하였다. 그러나 신하는 이 못에 와서 두 마리의 돼지가 싸우는 것에 정신이 팔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헤매던 중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건네줘 왕에게 그것을 올렸다. 왕은 봉투 속에 있는 내용에 따라 궁에 돌아와 화살로 거문고 집을 쏘게 하니, 왕실에서 향을 올리던 중과 공주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와 계략을 막았다 하여 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 하고,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준비해 까마귀에게 제사지내는 풍속이 생겨났다. 지정 면적은 7,021㎡[약 2,127평]이다.
서출지는 장축 86m, 단축이 50m에 이르는 타원형이다. 이 연못 속에는 연꽃이 심어져 있고 섬이 없으며 연못 둑에 수백 년 된 배롱나무가 30여 주, 소나무 20여 주, 향나무, 은행나무 등이 함께 숲을 이루고 있다. 1664년(조선 현종 5) 임적(任勣)이 서출지 연못가에 석축을 쌓고 이요당(二樂堂)을 건립하였다. 이요당은 20평 규모로 정면 4칸, 측면 2칸인 팔작집의 ‘ㄱ’자형 정자 건물로서 주위는 높이 2m의 막돌 담을 쌓아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특기 사항; 현재 이요당은 연못 서북쪽에 소박하면서 우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이요당에 앉아 서출지를 바라보면 신라의 설화가 피어나는 듯하다.
•이야기; 경주시 남산동 일대는 옛 서울의 교외 지역으로 서울 소풍객들이 즐겨 노닐던 곳이다. 동남산(東南山)의 험준한 봉우리들을 배경으로 펼쳐진 벌판의 여러 곳에 푸른 호수가 있는 것이 특색이다. 그 중 철와골 앞마을에 있는 큰 연못은 서출지라 불리는 유서 깊은 못이다. 연못가에는 이요당이라는 정자가 물속에서 솟아 나온 듯한 돌기둥 위에 서 있다. 반은 땅 위에 있고, 반은 물 위에 있는 ‘丁(정)’자형으로 된 정자이다. 둥글둥글 떠 있는 연잎 새로 날개를 편 듯한 기와지붕 추녀가 물속에 어른어른 거꾸로 비춰 있는 것도 운치가 있지만 여름이 되어 못 둑에 해묵은 배롱나무가 꽃을 피울 때면 진분홍 꽃구름이 이는 듯한 정경도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이 연못은 경치도 좋지만은 전해오는 전설도 더욱 유명하다. 488년 신라 소지왕(479~500)이 신하들과 더불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하셨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사람처럼 말했다. “이 까마귀 가는 곳을 살피시오.” 임금은 이상히 여겨 장사 한 사람을 시켜서 까마귀의 뒤를 따라가게 했다. 장사는 까마귀를 따라서 옛날 양피촌(讓避村) 못이라 불리던 못 가까이 왔는데 못 가에서는 두 마리의 산돼지가 무섭게 싸우고 있었다. 장사는 그만 돼지 싸움을 구경하다가 까마귀가 간 곳을 놓쳐 버렸다. 임금의 명령을 거역한 장사는 당황하여 이 못 가를 돌고 돌며 ‘까마귀가 간 곳을 어떻게 찾을까?’ 궁리하고 있었다. 이 때 못에 크게 파문이 일더니 못 속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장사를 불러 봉투에 든 글을 주면서 “이 글을 임금님께 전하라.” 하고는 다시 물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장사가 돌아와서 임금님께 그것을 바치니 봉투에는 ‘開見二人死 不開一人死[열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 보지 아니하면 한 사람이 죽는다.]’라고 적혀 있었다. 소지왕은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나은 일이니 열어 보지 않기로 하였다. 이때 나라 일을 예언하는 일관이 아뢰었다. “한 사람이라 함은 임금님이옵고, 두 사람이라 함은 평민을 가리키오니 열어 보시는 것이 옳을 줄 압니다.” 여러 신하들도 일관의 말이 옳다 하고, 열어 보기를 간했으므로 왕도 그럴듯하여 봉투를 열어 보았다. 봉투 속에는 ‘射琴匣(사금갑)’이라 씌어 있었다. 거문고가 들어 있는 상자를 활로 쏘라는 뜻이다. 왕은 급히 대궐로 돌아와서 왕비의 침실에 세워 놓은 금갑[거문고 상자]을 겨누어 화살을 날렸다. ‘쿵!’ 화살이 금갑에 박히자 급갑 속에서 끔찍스럽게 붉은 피가 흘러 나왔다. 왕실 내전에서 불공을 보살피던 중이 왕비와 통하고, 임금이 나간 뒤에 금갑 속에 숨어 있다가 왕을 해치려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왕비가 사형 당하니 두 사람은 죽고, 왕은 위기를 면하게 되었다. 이날이 바로 정월 대보름날이었다. 임금은 이 날을 기념하여 오기일로 정하고, 집집마다 오곡밥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리고 오곡밥을 조금씩 떠서 담 위에 얹어 까막까치를 위하게 했다. 그 후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달마다 첫 돼지날[上亥日], 첫 쥐날[上子日]에 모든 일을 조심하고, 어디로 나가는 것을 삼가는 풍속이 생겼다 한다. 이 못은 그 후부터 서출지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원래 서출지는 이곳에서 약 400m 남쪽에 있는 탑 마을의 양피못[讓避堤]이라 한다. 양기못의 본 발음이 양피못인데 ‘양피’라 함은 이 마을 이름이 원래 피리촌(避里村)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장사가 돼지싸움을 구경하였다는 곳이 피리(避里) 즉 피촌(避村)이었다’라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양피못이 서출지일 가능성이 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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