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동주와의 만남은 고등학교 국어수업이었다. 그의 대표작인 「서시/序詩」가 주는 잔잔하면서도 강렬한 말의 힘과 통한(痛恨)의 죽음에 받은 충격이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 그가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한 것을 북규슈시(福岡 北九州市)에 와서 처음 알았다. 재일동포의 인권회복 운동에 열심이었고 강제연행 진상을 알기 위한「강제연행의 발자국을 젊은이들과 순례하는 모임」의 대표인 가토게이지(加藤慶二/1941年-1991年)가 윤동주의 유골이 뿌려진 현해탄에서 잠자고 싶다는 유언서를 통해서였다.
가토 씨가 윤동주를 마음에 품은 경위는 잘 모르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생활터전을 빼앗겨 고향을 등지고 현해탄을 건너갈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조선인, 강제연행 때에는 배 밑창에 2-3명 묵인 채로 바다를 건너간 젊은이들…. 일본패전과 조선의 해방으로 재일조선인이 앞을 다투어 현해탄을 건너갈 때에 태풍이나 어뢰 등 조난사고로 많은 사람의 무덤이 된 원한의 바다가 현해탄이다.
일본 당국은 해외에 산재한 자국민의 귀국을 위하여 선박을 보내 수송하는 노력을 했지만 재일조선인의 귀국을 도와주는 정책은커녕 재산유출을 방지하려고 지참금 제한 조치까지 취했다. 가토 씨는 현해탄에서 잠자는 조선인 한 분 한 분을 윤동주의 분신으로 생각했었다. 50세에 대장암 말기 선고를 받은 날에 쓴 유언을 통하여서 자신은 「현해탄에 잠자는 분들에게 찾아가 일본인으로서 사죄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지난 2월16일 윤동주 기일(忌日)에 후쿠오카 형무소 유적지에서 행해진 추도행사에 참여했다. 윤동주를 추모하는 사람이 많음에 놀랐고 그의 시를 작곡하여 노래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조국 독립을 눈앞에 두고 28세에 목숨을 빼앗긴 그를 생각하며 마음 아파하고 그 시대를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많이 있음을 알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 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 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
그는 조선어 탄압 당시 자신의 언어로 시를 쓴 것이 치안유지법위반 혐의라고 특별고등경찰에 연행되었다. 그것이 이승의 마지막이 될 줄이야!
생전에 시집 한 권 없었고 요즘처럼 문단에 등단한 것도 아닌 무명의 청년 윤동주! 그러나 그는 한일 양국에서 사랑받는 불멸의 생명으로 부활했고 북한과 중국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올해도 2월 1일 동오사카시(東大阪市)에서 열린 윤동주기념회를 비롯하여 12일 후쿠오카형무소유적지, 15일 동지사(同志社)대학, 16일 교토예술단기대학(시인이 하숙하던 곳에 시비가 세워져 있음), 19일 릿쿄대학에서 추도식이 열렸다. 모국에서도 모교인 연세대학교등에서 추도식이 있었으리라.
윤동주는 일본고교생용 현대문 교과서(筑摩書房出版)에서도 20년 전부터 소개가 되어 읽히고 있다. 당시 출판사의 교과서 편집국장이었던 우에노(野上龍彦) 씨는 이바라기노리코(茨木のり子) 시인이 윤동주의 생애에 관하여 쓴 수필「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선택한 이유를 "어떠한 한 말(모국어)을 몸에 배게 하는가 하는 문제는 청소년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윤동주의 시는 모국어를 갖는 것, 모국어를 끝까지 관철하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일본의 고교생에게 잘 보여줄 것 같아서"라고 말했다. 이바라기 시인은 윤동주의 시를 대하면 "수선화와 같은 향기가 난다."라고 하면서 "지나간 부끄러운 역사를 애통해 하는 마음 없이는 이 시인을 만날 수 없다."고 글을 맺고 있다.
독자 주문홍 / 목사, 일본 후쿠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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