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 신경림, 오세영
[만월]은 생명의 신비를 달의 상상력을 통해 탐구한 작품이다. 대단한 시적 기교를 지니면서도 이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소박한 표현, 진솔한 이법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놀랍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고 싶었던 것은 그의 풍부한 상상력과 날카로운 관찰력이다. 보름달이 막 떠오르는 밤의 한 순간을 포착하여 생명과 교감하는 사물들을 물활론으로 전개시킨 여러 형태의 묘사들이 그 예이다. 역시 시는 상상력의 산물인 것이다.
투고작 전체적으로는 예년에 비해 처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표현이 사변적이고 장황한 것, 사적인 이야기나 느낌을 무책임하게 늘어놓는것, 소재적 센세이셔널리즘에 의존하는 것, 아무 관련 없는 단편적 문장들을 정신병적으로 나열하는 것 등은 여전히 우리 시단의 한 시류가 문학을 지망하는 분들에게 여과 없이 반영된 것 같아 씁쓸했다.
모두 기성 시단에서 비평의 규준이 혼란되어 있는 탓이다. 문학이란 상상력의 산물이며 좋은 작품이란 시류의 추수에서가 아니라 시류의 거부로부터 쓰여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잔치는 끝났다. 당선된 분에겐 축하를, 낙선된 분에겐 격려의 말씀을 드린다. 어차피 문학이란 좌절이라는 토양에서 피는 꽃이 아닌가.
당선시 : 만월
정지완
1973년 전남 해남 출생, 광주대 문예창작과 졸업예정
만월
그날 밤 송암동 버스종점 마을은 가로등 불빛 대신 달빛이 수상했네 달빛은 마을을 감싸던 안개를 가르며 조심조심 지붕 위를 걸어다녔네 달빛이 삭은 스레트를 밟느라 하수도 물 위에는 몇 줌 떨어뜨린 금종이 부스러기들로 번들거렸네 감나무집 담장 밑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담장 밑 하수물에는 꽃이 자란다고 생각했을 것이네 호박꽃은 감나무집 지붕위에 내려온 별 몇 개와 쑥덕거리고 있었는데
보름달이다 보름달이다, 버스기사들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고 밖을 내다보던 가게 주인도 보름달이다, 주뼛하여 불을 끄고, 누렁이는 버스 밑에 숨어서 킁킁거릴 뿐 도둑고양이들도 폐차 속으로 달려가 시퍼렇게 뜬 눈을 감아버렸네
감나무집 지붕 밑, 깻잎들 소소소 잠을 깨고 바람에 밀리는 꼬소한 냄새 호박꽃 잎을 흔들었네 배짱 좋은 호박꽃 몇이 별과 헤어져 지붕을 내려갔네 호박꽃은 발개한 입술 사이로 단물을 흘리며 흠뻑 창문을 더듬었네 핼쑥한 형광등 불빛! 꿀꺽, 침을 삼켰네
거구의 사내가 종이새를 접고 있다 아
방충망을 헤집는 더듬이들,
호박꽃잎은 그만 터질 것 같네
툭!
부실한 푸른 감 하나
지붕 위에 떨어지고
보름밤 감나무집 지붕 위, 새까만 호박 몇이 사생아 같았네 무슨 날짐승 소리 들리는 듯도 했는데, 달빛이 안개에 젖은 빨래를 말리고 있었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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