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 김광규 , 김훈 , 황지우
무엇이 어떤 것을 시이게 하는가? 그것을 우리는 말로 하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된' 시들과 '덜 되었거나 안 된' 시들의 차이에 대해서 느낄 수는 있다. '된' 시들은 어떤 것을 시이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그 안에 내장되어 있어서, 그것이 마치 자석 부근에 쇠붙이들을 일정하게 몰려있게 하는 자성처럼, 우리의 눈을 자기쪽으로 이끌리게 하기 때문이다.
한번 올라가면 좀체 내려오기 힘든 시의 제단에 이병률이라는 낯선 이름이 나타난 것을 우리는 축하한다. 그가 제시한 시들이 어느 수위 위에서 고르다는 것, 이미 자기 스타일을 갖고 있다는 것, 뭔가 자꾸 드러내려 하는 데서 오는 邪됨이 없다는 것. 흔한 말로 상상력이 새롭다는 것을 우리는 이야기했다. 적어도 '우리가 머문 곳은 사물이 박혀 지내던 자리가 아니라 한때 그들과 마주잡았던 손자국 같은 것'임을 본 그의 시선은 남다르고, 또한 따뜻하다. 그 따뜻함에 녹아나는 세계를 그가 앞으로 어떻게 보여줄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좋은 사람들 , 그날엔
이병률
1967년 충북 제원 출생, 서울예전 문창과 졸업, 파리 영화학교 ESEC 수료
좋은 사람들
우리가 살아가는 땅은 비좁다 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적다 하지만 햇빛은 좁은 곳 위에서 가루가 될 줄 안다 궂은 날이 걷히면 은종이 위에다 빨래를 펴 널고 햇빛이 뒤척이는 마당에 나가 반듯하게 누워도 좋으리라 담장 밖으론 밤낮 없는 시선들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게 바쁘고 개미들의 행렬에 내 몇 평의 땅에 골짜기가 생기도록 상상한다 남의 이사에 관심을 가진 건 폐허를 돌보는 일처럼 고마운 희망일까 사람의 집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일이 목메이게 아름답다 적과 내가 엉기어 층계가 되고 창문을 마주 낼 수 없듯이 기운 찬 사람을 만나는 일이란 따뜻한 숲에 갇혀 황홀하게 밤을 지새는 일 (지금은 적잖이 열망을 끼얹거나 식히면서 살 줄도 알지만 예전의 나는 사람들 안에 갇혀 지내기를 희망했다) 먼 훗날, 기억한다 우리가 머문 곳은 사물이 박혀 지내던 자리가 아니라 한때 그들과 마주잡았던 손자국 같은 것이라고 내가 물이고 싶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노을이 향기로운 기척을 데려오고 있다 땅이 세상 위로 내려앉듯 녹말기 짙은 바람이 불 것이다
그날엔
갖고 싶은 것 다 가지고 사는 사람 있는가 내 어머니의 연탄구멍 같은 교훈이 석유난로 위에서 김을 낸다 오랜만에 숭늉이 끓는다 어머니의 어머니는 딸을 두고 일찍 재가하셨고 세상에서 유명한 구멍 속으로 발을 들여놓으셨다 구멍만을 디디고 이길까지 오신 어머니는 온통 세상이 혼자뿐인 것 같아 자식 스물을 꿈꾸셨지만 결국은 구멍에다 나를 빠뜨리셨다 한 길 가는 생명이 바람이 내어준 길을 따라 코를 열고 바빠할 때 난 듣는다 또 숭늉 끓이는 소리와 탄식은 탄식을 낳는다는 소리를
어머니는 살아계시지만 그 말을 어머니의 살아계시는 유언이라 믿는다 세상의 문이 고쳐져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기까지 갖고 싶은 것 다 갖고 살지 못한다 나는 영영 태어나지 않을 부자가 되어 무섭게 떠돈다 땅이 사람 가슴 안에서 얼마나 여러 번 쪼개어지는가를 본다 어머니가 내 자식을 연인처럼 사랑하다 들킨 듯 웃으시는 걸 본다 그날엔
무엇이 어떤 것을 시이게 하는가? 그것을 우리는 말로 하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된' 시들과 '덜 되었거나 안 된' 시들의 차이에 대해서 느낄 수는 있다. '된' 시들은 어떤 것을 시이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그 안에 내장되어 있어서, 그것이 마치 자석 부근에 쇠붙이들을 일정하게 몰려있게 하는 자성처럼, 우리의 눈을 자기쪽으로 이끌리게 하기 때문이다.
한번 올라가면 좀체 내려오기 힘든 시의 제단에 이병률이라는 낯선 이름이 나타난 것을 우리는 축하한다. 그가 제시한 시들이 어느 수위 위에서 고르다는 것, 이미 자기 스타일을 갖고 있다는 것, 뭔가 자꾸 드러내려 하는 데서 오는 邪됨이 없다는 것. 흔한 말로 상상력이 새롭다는 것을 우리는 이야기했다. 적어도 '우리가 머문 곳은 사물이 박혀 지내던 자리가 아니라 한때 그들과 마주잡았던 손자국 같은 것'임을 본 그의 시선은 남다르고, 또한 따뜻하다. 그 따뜻함에 녹아나는 세계를 그가 앞으로 어떻게 보여줄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좋은 사람들 , 그날엔
이병률
1967년 충북 제원 출생, 서울예전 문창과 졸업, 파리 영화학교 ESEC 수료
좋은 사람들
우리가 살아가는 땅은 비좁다 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적다 하지만 햇빛은 좁은 곳 위에서 가루가 될 줄 안다 궂은 날이 걷히면 은종이 위에다 빨래를 펴 널고 햇빛이 뒤척이는 마당에 나가 반듯하게 누워도 좋으리라 담장 밖으론 밤낮 없는 시선들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게 바쁘고 개미들의 행렬에 내 몇 평의 땅에 골짜기가 생기도록 상상한다 남의 이사에 관심을 가진 건 폐허를 돌보는 일처럼 고마운 희망일까 사람의 집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일이 목메이게 아름답다 적과 내가 엉기어 층계가 되고 창문을 마주 낼 수 없듯이 기운 찬 사람을 만나는 일이란 따뜻한 숲에 갇혀 황홀하게 밤을 지새는 일 (지금은 적잖이 열망을 끼얹거나 식히면서 살 줄도 알지만 예전의 나는 사람들 안에 갇혀 지내기를 희망했다) 먼 훗날, 기억한다 우리가 머문 곳은 사물이 박혀 지내던 자리가 아니라 한때 그들과 마주잡았던 손자국 같은 것이라고 내가 물이고 싶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노을이 향기로운 기척을 데려오고 있다 땅이 세상 위로 내려앉듯 녹말기 짙은 바람이 불 것이다
그날엔
갖고 싶은 것 다 가지고 사는 사람 있는가 내 어머니의 연탄구멍 같은 교훈이 석유난로 위에서 김을 낸다 오랜만에 숭늉이 끓는다 어머니의 어머니는 딸을 두고 일찍 재가하셨고 세상에서 유명한 구멍 속으로 발을 들여놓으셨다 구멍만을 디디고 이길까지 오신 어머니는 온통 세상이 혼자뿐인 것 같아 자식 스물을 꿈꾸셨지만 결국은 구멍에다 나를 빠뜨리셨다 한 길 가는 생명이 바람이 내어준 길을 따라 코를 열고 바빠할 때 난 듣는다 또 숭늉 끓이는 소리와 탄식은 탄식을 낳는다는 소리를
어머니는 살아계시지만 그 말을 어머니의 살아계시는 유언이라 믿는다 세상의 문이 고쳐져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기까지 갖고 싶은 것 다 갖고 살지 못한다 나는 영영 태어나지 않을 부자가 되어 무섭게 떠돈다 땅이 사람 가슴 안에서 얼마나 여러 번 쪼개어지는가를 본다 어머니가 내 자식을 연인처럼 사랑하다 들킨 듯 웃으시는 걸 본다 그날엔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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