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 신경림 , 정현종
당선작으로 뽑은 '중세의 가을 4', '중세의 가을 2' 등 노만수의 작품이 갖고 있는 젊음과 설득력의 원천은 대학시절의 체험 및 그때와 달라진 지금의 모습들에 대한 성찰이다.
특히 우리의 정치적 불행 때문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젊은 시절이 훼손 당해왔음을 우리는 알고 있고, 그 훼손은 그들이 불행 뿐만 아니라 일견 칭찬받을 일에도 들어 있음을 생각하면, 나이를 몇 살 더먹은 사람의 심정도 늘 착잡하고 미안했던 것이니, 그런 문맥속에 있는 작품의 스산함에 정서적으로 합류하게 된다.
간혹 어떤 매너리즘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떤 좌절이나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나의 생태계, 손금은 알리라/ 다시는 나의 손으로 포장할 수 없는 사람앞에/ 나타나고 싶지 않았던 날의 / 나를"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시쓰기를 위한 노력을 엿보게 하는 대목들이다.
당선시 : 중세의 가을 4
노만수
1969년 전남 무안 출생,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중세의 가을 4
신장이식수술을 끝낸 친구는 간호사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다
죽으러 가는 잎새들로 바람은 살아 있음을 깨닫는다
며칠전에 만난 까치에게 눈인사를 했다
개미처럼 달
려가고 싶다 어머니의 젖을 물러,
수양버들 이파리가 흙먼지처럼
흩날리는 것은 그리움이 미쳤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게 결국 믿음이 없어 떠나왔던 것이다.
수레바퀴국화를 선물했던 누이의 탓이 아니다.
나의 생태계, 손금은 알리라
다시는 나의 손으로 포장할 수 없는 사람 앞에
나타나고 싶지 않았던 날의
나를.
사실은 우리 모두 귀족이고 싶었다.
토익TOIEC 점수로만 나를 계산할 수 있었던,
대학시절, 인간임을 기억하고 싶었으나 말을 할 수 없었고
편지쓰기를 좋아했다. 겨울철이 와도 거리엔 영정을 든
여인들이 추엽처럼 아스팔트를 떠돌았다.
사진을 보면 천년을 썩지 않을 눈망울들,
누이가 사 준 볼펜을 잃어버려 더더욱 어쩔 줄 모르겠던 한 해가
초상집 잉걸불 연기처럼 사라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있기에 살고 싶었다
형광등이 떨어질까봐 두려워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자취방 벽에
이름 석자를 적었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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