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 박성룡 , 장윤우
신춘문예에 응모하는 작품들의 대부분은 현시단의 젊은 시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스타일의 영향을 뚜렷이 보이는 것이 상례인데 금년도 예외는 아니었다. 습작기의 사람들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나 경계해야 할 일일 것 같다. 우선 시는 유행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당선의 영예를 안게 된 염창권의 '운천리 길'은 단연 무게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좀 어눌한 데는 없지 않지만 詩昨에 임하는 자세가 정성스럽고 정직한 것이 우선 눈길을 끈다. 민통선 안인 듯한 운천리라는 마을에 모여 사는 가난한 실향민 노인들은 박수근의 그림 속의 사람들처럼 무광택의 실루엣으로 떠올리는 이 작품은 슬프면서도 아름답다.
면밀한 사실적 묘사의 전개 가운데 되풀이되는 안개와 강물의 이미지가 적지 않은 행수의 작품을 지탱하면서 사실을 상징화하는 솜씨는 신인으로서는 만만찮은 역량이다. 당선자는 이 작품에서 거둔 성과를 딛고 정진을 계속하기 바란다.
당선시 : 운천리 길
염창권
1960년 전남 보성 출생, 광주교대, 교원대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운천리 길
1
고향이 그리운 노인들 운천리에 모여 산다
삶은 늘 깃이 짧아 겹겹으로 껴입은 속옷들
고스란히 드러내보이지만
가슴 속을 흐르는 고향 생각만은
꼭꼭 여미며 산다.
함석지붕에 나무들이
자꾸 손가락을 다치는 입동 무렵
군장을 꾸린 아침 행렬을 보며 노인들은
담벽에 붙어 모락모락 하얀 안개꽃을
피워 올리거나 떠나온 마을 이야기로
잠시 마음이 산란해지기도 한다
민통선을 건너온 바람의 기별에
길 이쪽과 저쪽에 늘어선 하얀 억새꽃이
무시로 흔들리며 휘어지는데
대체 마음 어느 깊은 곳을 강물이 흐르기에
사람들은 저마다 조그만 안개를
피워올리는 것일까
강물 끝을 따라가 보는 것일까
싸늘한 아침 빛이 나무들의 어깨를 돌아
행렬의 입입마다 하얗게 부서질 때
길은 강을 이루며 흘러가고 있으니
운천리를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들
문해리 자일리 옹기종기 마을을 이루며
길을 트고 있으니
보육원을 빠져나온 아이가 망연히
사병들의 행렬을 바라볼 때 소매깃을
빠져나온 내복이 시린 손등을 덮어줄 때
쇠붙이처럼 희고 단단한 운천의 하늘에
조그만 입김의 안개를 보탠다.
2
삼팔교 난간 밑으로
어둑히 풀리는 한탄강을 건너
여전히 사병 혼자 집총 차렷 자세인
검문소를 지나면
그곳에 운천리로 가는 길이 있다.
한떼의 눈발이 퍼붓다가 문득 고요해지면
그만큼 길은 더 쓸쓸히 깊어가고
들판은 희고 검게 덮인 잔설로 딱딱하게 굳어
오래도록 녹지 않는다
대공포 사격 소리에 놀라 흩뿌리듯 날아가는 텃새들
나무는 자꾸 손을 다치고
캐터필러 발자국이 움켜쥐고 있는 불임의 세월들
나무는 자꾸 발이 아프고
길을 따라 걷는 노인들 걷다가 잠깐 서 있다가
지치면 길 밖으로 나와 그들의 길을 벗어들고
살아온 나날만큼 막막히 나무에 기대어
쓰디쓴 한 모금의 안개를 피워 물 때
누군들 가슴 속 뜨거운 강물이 넘쳐 흐르지 않으랴
누군들 함께 섞여 어디론가 가야 할 곳으로
흘러가지 않으랴
노인들 운천리에 모여 살고 운천리 가슴속에
깊고 그윽한 강물 하나 가꾸며 산다
서로의 뿌리를 잇대고 산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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