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1996년 조선일보 당선작

문근영 2015. 3. 31. 03:10

심사평 : 황동규 , 김주연


신춘문예 응모를 포함, 최근 시들의 동향이 사뭇 달라지고 있는 것 같다. 뭐랄까, 꽤 부지런한 관찰을 하고 있으나 근본적으로 쇄말주의로 흐르는 느낌이 그것이다. 시가 중심을 향해 긴장된 응집력을 보이는 대신, 어디론가 풀풀 날아가 버리는 듯한 인상이 이즈음 쓰여지고, 발표되는 시들의 지배적인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는 지적이 될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최영규씨의 '부의'를 만나고 이를 당선작으로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의 행운이다. 문상 가기 위해 꺼낸 부의 봉투지에서 쏟아져 나온 꽃씨를 보면서 삶과 죽음을 대비시킨 솜씨는 얼핏 보아 평범하되, 마치 씨앗 속에 숨어 있는 꽃처럼 깊은 지혜와 섬세한 분석을 숨기고 있는 대단한 경지라고 평가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작자의 역량은 다른 작품 '메기 낚시'로도 입증된다고 할 수 있겠는데, 사색과 퇴고를 거듭한다면 꽤 좋은 시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당선시 : 부의

 
 
최영규
강원도 강릉출생, 경기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부의
 
 
봉투를 꺼내어
부의라고 그리듯 겨우 쓰고는
입김으로 후--불어 봉투의 주둥이를 열었다
봉투에선 느닷없이 한웅큼의 꽃씨가 쏟아져
책상 위에 흩어졌다 채송화 씨앗
씨앗들은 저마다 심호흡을 해대더니
금세 당당하고 반짝이는 모습들이 되었다
책상은 이른 아침 뜨락처럼
분홍 노랑 보랏빛으로 싱싱해졌다
씨앗들은 자신보다 백배나 큰 꽃들을
여름내 계속 피워낸다 그리고 그 많은 꽃들은 다시
반짝이는 껍질의 씨앗 속으로 숨어들고
또다시 꽃피우고 씨앗으로 돌아오고
나는 씨앗 속의 꽃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알도 빠짐없이 주워 봉투에 넣었다
봉투는 숨쉬는 듯 건강해 보였다
 
할머님 마실 다니시라고 다듬어 드린 뒷길로
문상을 갔다
영정 앞엔 늘 갖고 계시던 호두알이 반짝이며
입다문 꽃씨마냥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옆에 봉투를 가만히 올려 놓았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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