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 김윤식 , 오규원
윤지영씨의 '배고픔은 그리움이거나 슬픔이다'는 얼핏 보면 시가 매우 단조로워 보인다. 언어에 대한 감각도 사고력의 깊이도 문맥에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가 보여주는 단조로움은 방법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은 감각의 깊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이 작품을 뽑은 데는 두 가지의 미덕을 보여 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 중 하나는 일상적 삶을 그 이상의 것으로 단순화시켜 한 시대의 풍속화로 그려낸 점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의 목소리, 자기가 책임을 질 수 있는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세계를 단순화시켜 의미화할 수 있음은 그렇게 쉽지 않다. 그러나 다른 응모작에 잠깐 보이는, 시가 요구하지 않는 형태 파괴는 삼가야 한다.
당선시 : 배고픔은 그리움이거나 슬픔이다.
윤지영
1974년 충남 공주 출생, 서강대 국문과
배고픔은 그리움이거나 슬픔이다
식구들이 잠들어
오히려 부산한 여름밤
방충망 사이 모기가 부산스럽다.
모기 날개 위에 달빛이 부산스럽다.
배가 고파 식탁에 앉아 노트북 파워를 넣는다. 냉장고를 열고 우유식빵을 꺼낸다. 우유와 땅콩 버터를 꺼낸다. 키보드를 두드려 본다. 영균영호영수영식영철영민영석영광지수민수현수정수진수영종...... 깜빡이는 커서, 깜빡이는 그리움...... 우유식빵에 땅콩 버터를 바른다.
버터는 냉장고 속에서도 녹아 있었다.
우유는 냉장고 속에서도 상해 있었다.
노트북도 배가 고픈지 하얗게 화면이 지워진다. 영균영호영수영식영철영민영석영광지수민수현수정수진수영종...... 깜빡이는 커서가 사라지고, 깜빡이는 그리움이 사라진다.
녹아버린 땅콩 버터 때문에 배가 고프다.
내가 배고픈지 땅콩 버터가 배가 고픈지 분간할 수 없는데,
식구들이 잠든 여름밤, 녹아버린 땅콩 버터를 바라보며 느끼는 허기는 슬픔이거나 그리움이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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