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1995년 경향신문 당선작

문근영 2015. 3. 31. 02:53

심사평 : 신경림 , 정현종


이은옥의 작품들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신선하고 작품의 수준도 고르다. 그의 상상력이 변용적이라는 점이 그의 시적 장래를 믿음직스럽게 하고, 대상을 향해 움직이는 시선이 집요하다는 점도 튼튼한 바탕을 느끼게 하는 요소이다. 예컨대 당선작으로 뽑은 '어성전의 봄'에도 그러한 특징이 보이는데, 여기서 우리가 또 보는 것은 그가 사물의 겉만이 아니라 그 속까지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가령 사물의 소리 뿐만 아니라 그 고요도 들을 줄 안다.
어느 한쪽만 들어 가지고는 그것을 잘 듣는다고 할 수 없다면 그의 안팎을 동시에 느끼는 더듬이는 역시 시적 재능을 기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의 어투나 음색에 과장이 없고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일치하는 안정을 보여주고 있는 점이다.
 

당선시 : 어성전의 봄

 
 
이은옥
1959년 강원 삼척 출생, 서울예전 문창과 졸업

 
 
어성전의 봄

 
적송과 잡목이 어울려, 몇 겹의 산봉우리가 되고
마루 끝에 서서
잘 보이는 앞산부터 산의 허리를 센다
겨울 내내 쌓여 있던 눈이 아래 마을부터 녹기 시작하여
산 밑에 있는 기와집 근처 응달까지, 길어진 해 그림자가
봄을,
마당까지 실어 나른다
서서 말라버린 국화밭에도 햇살이 옮겨 다니면서
겨울의 냄새를 말린다
겨울 내내 눈 속에 파묻혀 있던 국화밭이 밭고랑을 드러내고
 
강이 얼 때부터 녹기 시작할 때까지 마을은 고요하다
나는 고요하다
고요가 고혹적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봄,
강이 뚜껑을 열고
고기들이 알을 까고 돌 밑에 집을 만들 것이다
산을 끼고 도는 어성전의 강, 강물의 흐름이 좋고 조용하여
고기들이 많이 사는 강, 사람들은 이 마을을 어성전이라 한다
바다는 바다 사람들의 밭이라면 강은 고기들의 밭이다
아침 안개가 지나갈 때는
이곳 마을 사람들의 옷에서 강 냄새가 난다
가끔씩 마을은 안개에 푹 잠겨 있고
새벽, 닭이 한집 한집에서 울기 시작해
온 동네는 조그만 소리들로 하루가 시작된다
방문을 열면 안개가 먼저 들어온다
햇살이 온 마을에 퍼지면 나는 마음을 서두른다
봄, 햇살이 동반하는 이 나른한 계절은 앉아 있기도 불안하다
겨울 내내 쉬고 있던 농기구들이 하품을 하고
아버지는 먼 산에서 해온 물푸레나무 자루를 다듬어
건너마을에 쟁기를 벼르러 간다
아버지는 조율사처럼
호미 자루며 도끼 자루 괭이 자루를 다시 갈아 끼운다
농기구들은 아버지의 건반이 되어 사계가 시작된다
나는, 슬그머니 강으로 나가본다
강은 아직 고요하다
강은 누가 먼저 알을 낳았다고 소리치지 않는다
 
*어성전 :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어성전리 마을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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