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 김주연 , 최동호
어느 한 편을 고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차례 정독한 다음 우리들은 대체로 다음 두가지 기준을 세웠다. 신인으로서 도전적 패기와 작품으로서의 완결성이었다. 최종심에 오른 다섯 분들의 작품은 그 완결성에 있어서 커다란 차별성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목소리를 고대하는 우리 시단 저간의 사정을 고려할 때 선자들은 김민희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는데, 이는 그의 작품이 실험적 의식을 보다 매끄럽게 시로 다듬어 놓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앞으로 시인으로서 성장하자면, 그의 현학적 재기가 부담이 될 수도 있을 터이지만 그 나름이 독자적 개성을 지닌 시인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당선시 : 폴리그래프 27
김민희
1964년생, 서울예전 문창과 졸업
폴리그래프 27
--얼음물고기
눈부신 팔월 아침 눈이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물고기떼가 뚫는가 공중의 저 연한 구멍들 말할 수 없는 것들 가령 물고기에 대해 생각해서는 안된다 K는 침묵을 촬영하기 시작한다 하늘에는 새가 없다 네 눈 속에는 물고기가 없고 성큼성큼 다가온 팔월의 아침 추운 K가, 그리운 K는 얼굴을 눈 속에 파묻지도 못한다 느릿느릿한 창문 속으로 수많은 여름이 흘러간다 공포는 물고기처럼 조용하다 사진 찍은 현실은 아름답다 피로하기 때문이다 곧 삼십세가 닥쳐오리라 이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 그런 행복한 아침 떨리는 첫눈이 와 준다면 K가 그 뒤를 달려간다 설경속으로 들어가는 K를 깨끗한 지평선을 K는 뒤에서 오래도록 바라본다 이 無는 현실적이다 공포는 더 아름답다 함박눈 내린다 가짜 물고기로 유리창이 두꺼워진다 이제 K는, 아침에 더 이상 일어날 수가 없다 더 이상 그림자처럼 마른 물고기라고 말하지 않겠다 눈 덮인 숲에서 숲으로 새들은 점점 텅 비는 것을, K는 본다, 그처럼 수많은 여름이 지난 후 물고기떼가 떠내려갔으리 창문들은 빨리 늙는다 밤새도록 네가 들려준 이야기마다 고요한 지느러미를 달아주는 아침
*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적 논고>에서의 기본 명제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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