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황동규 , 김주연
신춘문예에서 중시되어야 할 원소가 있다면, 새사람다운 새로움과 패기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심보선 씨의 '풍경'을 당선작으로 뽑는 우리의 마음은 즐겁다.이 작품은 기성시단의 어떤 흐름과도 무관하며, 시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곧잘 사용하는 상투어들이나 빈말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있다.
현실을 면밀히 관찰하는 투시력, 그 현실 가운데를 스스로 지나가는 푹 젖은 체험, 그러면서도 거기에 이른바 시적 거리를 만들어 놓는 객관화의 힘, 번뜩이지 않으면서도 눅눅히 녹아 있는 달관의 표현력, 때로는 미소를 흐르게 하는 유머, 이 모든 것들이 별 것일 수 없는 일상의 한 모습을 훈훈한 시적 공간으로 이끌어낸다. 상당한 실력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이 시인의 다른 작품들 일부에 남아있는 장난스러운 치기는 당연히 진지한 극복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당선시 : 풍경
심보선
1970년생,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풍경
1
비가 갠 거리, XX 공업사의 간판 귀퉁이로 빗방울들이 모였다가 떨어져 고이고 있다. 오후의 정적은 작업복 주머니 모양 깊고 허름하다. 이윽고 고인 물은 세상의 끝자락들을 용케 잡아당겨서 담가 놓는다. 그러다가 지나는 양복신사의 가죽구두 위로 옮겨간다. 머쉰유만 남기고 재빠르게 빌붙는다. 아이들은 땅바닥에 엉긴 기름을 보고 무지개라며 손가락으로 휘젓는다. 일주일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지독한 무지개다...... 것도 일종의 특허인지 모른다.
2
길 건너 약국에서 습진과 무좀이 통성명을 한다. 그들은 다쓴 연고를 쥐어짜내듯이 겨우 팔을 뻗어 악수를 만든다. 전 얼마전 요 앞으로 이사왔습죠. 예, 전 이 동네 20년 토박이입죠. 약국 밖으로 둘은 동시에 털처럼 삐져 나온다. 이렇게 가까운 데 사는구만요. 가끔 엉켜보자구요, 흐흐흐. 인사를 받으면 반드시 웃음을 거슬러 주는 것이 이웃간의 정리이다. 밤이 오면, 거리는 번지르하게 윤나는 절지동물의 다리가 된다. 처방전만하게 불켜지는 창문들.
3
마주보고 있는 불빛들은 어떤 악의도 서로 품지 않는다. 오히려 여인네들은 간혹 전화로 자기네들의 천진한 권태기를 확인한다. 가장들은 여태 귀가하지 않았다. 초점없는 눈동자마냥 그녀들은 불안하다. 기다림의 부피란 언제나 일정하다. 이쪽이 체념으로 눌리면 저쪽에선 그만큼 꿈으로 부푼다. 거리는 한쪽 발을 들어 자정으로 무겁게 옮아간다. 가장들이 서류철처럼 접혀 귀가하고 있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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