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1994년 서울신문 당선작

문근영 2015. 3. 20. 08:07

심사평 : 박성룡 , 김우창


우리는 망설임이 없지 않은 채로 김혁 씨를 당선 시인으로, 그의 '숲속의 섬'을 당선작으로 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가 가지고 있지 못한 여러 점들을 아쉽게는 생각하면서도 그의 서정의 힘을 높이 사는 것 이외에, 그의 고른 언어 능력을 중요하게 평가하여 마땅하다고 생각하였다.
시인은 가끔 좋은 시를 쓰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삶의 여러 기회를 늘 적절한 언어로 잡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당선 시인에게 축하의 말씀을 드린다.
 

당선시 : 숲속의 섬

 
 
 
김혁
1966년 서울출생, 서울예전 문창과 졸업

 
숲속의 섬

 
바람도 풀꽃들도 다 철길을 따라 달리곤 했지
날벌레 같은 마음들 따뜻한 등불 찾듯 모여들어 함부로
내일을 얘기하지 않았지만, 꽈리처럼 늘 쉽게
터져버리는 희망, 후욱 남몰래 씨앗들을 뱉아내기도
했지 빈 쌀통에서 왜 자꾸 쌀벌레가 생기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가락으로 눌러 죽이는 아침
비좁은 방에 둘러 앉아 배추 속 같은 얼굴들 바라보며
김치도 없는 라면을 먹곤 했지 부시시한 앞날들
손가락으로 쓰으윽 쓸어 넘기면 기적소리처럼
기다란 저녁이 오고 더러 한 대 밖에 없었던
컬러 TV 앞에서 다투기도 했던 흑백의 마음들아
지금은 어디?
 
절망의 집, 모델하우스가 들어서고 분주한 트럭들
쉽게 앙상한 집들과 풀벌레 소리마저 실어나가고
포클레인, 거대한, 세상을 뿌리째 흔들어 설익은 열매들
앞다투어 흙바람 속으로 고개를 처박았지 예수처럼
마을 여기저기 굵은 대못이 박혀들고 새들도 더 이상
날기를 멈추었지 피난 보따리 같은 희망의 뿌리들을
툭, 툭 걷어차며 꿈속에서도 떠나들 가는지 날이 새면
싸늘히 식은 빈집만 늘어가고 누군가 쌍소릴를 지르고
순식간에 사그라들던 초라한 추억이여 지금 모두들
싸그리 지워버린 아스팔트를 뚫고 부활처럼 솟아오른
저 잡초, 의 얼굴들아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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