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푸른 식욕외 4편
신 종승
시커먼 구름 몰려오더니
소낙비 호수에 쏟아 붓는다
쫘악쫙, 호수에는 수 만개의 부리들
일제히 입 벌려
아우성으로 일어선다
호수는 금세 새 둥지가 된다
뿃쪽뿃쪽 벌린 입들이 재재재재 떠는
어미는 연방 먹이를 물어오고
냉큼냉큼 받아먹는 부리, 부리, 뿌리들…
저 날름거리는 혀들의 싯푸른 식욕
어쩌나, 어미의 골수까지
쪽쪽쪽 빨아대는 저 입술 파란 조동아리들
봄날
신종승
둥둥둥, 하고
은근히 가슴 뒤흔들어 놓는 북소리가
배경 음악인 봄날의 화면은
차마 말똥히 바라볼 수가 없다
윤기 낸 머리채를 둔부까지 휘늘어뜨린 실버들
아기똥거리는 엉덩이로 집을 나서면
노랗게 머리 물들인 개나리꽃
조잘조잘 조잘대며 떼로 몰려간다
속살 훤히 내비치는 란제리만 걸친 벚꽃
봉긋한 앞가슴 발그레한 유두까지 슬쩍슬쩍 엿보이는
타는 시선, 시선을
와르르 몰아붙이며 아찔하게 다가서고
키 큰 소나무 숲에 꾸욱 눌려 지내던 진달래
빨간 루즈 짙게 바르고
산비탈로 난 음지의 길을 치달아
아예 알몸의 붉은 바람이 된다
모두가 그러려니
정숙한 누이, 목련마저
허벅지까지 길게 찢은 야회복 차려입고
넌짓넌짓 하얀 속살 드러내는 저 백치 웃음
빨간 ⑲마크를 또렷이 박아 놓아야 하겠는데
저 훔쳐보려고 빼죽이 일어서는 눈들은 어찌할꼬?!
저 꼬막 눈, 눈, 눈눈눈……
허어!
으흠, 음-!
타성
신 종승
뒷길 옆 외진 곳 돌하루방처럼 서 있는 통 하나
가슴에 '헌신가담커 옷발방요텐'이라 써 붙이고는
네모진 입 한껏 벌려 외치고 섰다
일인시위?
갸우뚱하며 자세히 보니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라 쓴 작은 글씨 머리띠로 두르고 있다
그럼 쓰레기통?
가벼이 지나치려는데 통 반대쪽, 왼편에 붙어있는 명찰
'의류함' 이라 쓴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다시 돌이켜 귀 모아 보니
헌옷 신발 가방 담요 커텐 하는 소리 또렷하다
헌신가담커
옷발방요텐
한때는 세로쓰기로 읽고 쓰던 시절 있었는데
관성이란 집요한 데가 있다
내 오랜 가로쓰기의 관성이 착시를 불러 온 것
옆으로도 읽고, 아래로도 읽고
좌도 보고, 우도 보고
이쪽저쪽 모두 헤아려도 보고
그렇게 순간순간 고, 고, 고 하며
시끄러운 세상 균형 있게 읽고 쓰고 가야 할 터인데
단풍진 감잎 하나
신 종승
감나무 그늘 아래 놓인
의자에 무심코 앉으려다, 순간
나 보다 먼저 자리한 이 있어
그만 깜짝 놀랐습니다
어쩜 그리도 단아한 옛 소녀 같은지
더욱 깜짝 놀랐습니다
그녀는 나를 빤히 올려다보며
얼굴을 발그스레 붉힙니다
까만 속눈썹에 숨어 날 바라보던 두 눈
나는 더욱 깜짝 놀랐습니다, 순간
새끼 가젤처럼 뛰어가는 나
오늘 또 만났습니다
당신, 툭- 떨어지듯 내게로 오는
내가 앉으려는 자리마다에
환한 모습으로 먼저와 있는
당신은 언제나 내겐 그러합니다
그때마다, 난 얼른
붉은 모자 벗어 빈 옆구리에 끼고는
오른손 옆으로 빗겨 내리며
뻣뻣한 허리 다소곳이 숙인답니다
뚝 떨어져 내 의자에 와 앉은
단풍진 감나무 잎 하나
그 붉은 눈시울을 보며
오늘 난, 또 그리합니다
하회탈
신 종승
'순이 아버지 담배꽁지에 불이 붙어서
응아차차 응아차차 아들 낳더래'
어린 시절 가시내들 고무줄놀이 하며
잘도 부르던 노래,
폴삭폴삭 원숭이 재주 넘어가면서
뜻도 모르면서
그땐 왜 고무줄놀이를
가시내들 콩콩 미소 튕기며
그리들 좋아했는지
모여 몇이 되기만 하면
학교 운동장은 주무대이고
집으로 가다 가방 내려놓고 길바닥에서
갓 결혼한 새댁의 단칸 셋방 앞에서
장가 못간 형칠이 오빠 창문 밑에서
근엄한 읍장님 댁 담벼락 곁에서
심지어는 교회 마당 한 가운데서…
그리도 떠들썩 소리 질러댔으니
아기는 배꼽에서 절로 나오는 줄 알았으니
불이 붙은 순이 아버지의 담배꽁지가
무슨 동영상인지 알 턱이 없었으니
그러나 넌지시 궁금해지는 건
응아차차 응아차차, 그 통통 튀던 노래 주변에
모른 척 살던 사람들이 출력해 냈을 마음의 영상 한 폭,
못내 누르며 누르며 지었을 그 미소의 속내
하회탈, 그 빙그레는 절대 아니것재
무슨 사이트는 물론 비디오 아니 T.V도 몇 없던 그 시절
나 좀 봐, 아들놈 태우러 갈 시간이네
----애지, 2012년 가을호에서
애지신인문학상 시부문 심사평
시를 쓴다는 것은 마음의 거울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보는 일일 것이다. 明心寶鑑, 一日三省, 자기 자신을 더욱더 맑고 깨끗하게 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사람도 진정한 시인이 될 수가 없을 것이다. 은유와 상징은 그 마음의 거울에서 탄생한다. 왜냐하면 은유와 상징은 그 반성과 성찰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싯푸른 식욕] 외 9편을 응모해온 신종승 씨를 애지신인문학상 당선자로 내보낸다.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듯이, 식욕은 모든 유기체들의 근본적인 욕망이다. 식욕은 자기보존욕망이면서도 한걸음 더 나아가, 그가 속한 종種을 이어나가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 식욕을 통해서 살아가게 된다. 식욕은 형체가 없지만 이 형체가 없는 식욕이 그 주체자를 압도하게 된다. 식욕에 구체적인 육체와 생명력을 부여한 신종승 씨의 [싯푸른 식욕]은 참으로 그만큼 충격적이고 신선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시커먼 구름, 즉 하늘은 어미가 되고, 소낙비는 먹이가 되고, 호수는 그 어미(하늘)의 새끼가 된다. 그러니까 호수에 빗방울이 떨어지며 튀어오르는 파문은 “저 날름거리는 혀들의 싯푸른 식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신종승 씨는 은유와 상징을 자유 자재롭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은유는 한 사물을 다른 사물로 빗대어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고, 상징은 인간의 의식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하나의 변사처럼, ‘실버들, 개나리, 벚꽃, 진달래, 목련’ 등으로 새로운 부활의 축포를 쏘아올리고 있는 듯한 [봄날], 자기 자신의 오랜 관성을 희화화하여 비판하고 있는 [타성], 그 옛날의 그 소녀를 극적으로 표현해낸 [단풍진 감잎 하나] 등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준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해내고, 형체가 없는 것에 형체를 부여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고도 힘든 일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제 우리는 신종승 씨가 창조해낼 새로운 신세계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
----애지신인문학상 심사위원(반경환, 이형권, 황정산) 일동
신인상 당선 소감
신종승
함박눈이 펄펄 내린다. 이 계절에 웬 눈이!?
눈은 하늘로서 내리는 은총이라던가…
그 눈이 이 한 여름에, 그것도 함박눈으로 내 머리 위에 펑펑 내린다.
눈 내리는 저 끝, 아스라하게 보이는 시원에는 내 동심의 글짓기 교실의 꿈이 있었다.
아련한 거기에서부터 생의 벌판을 훠이훠이 돌아오며 형상을 이루려고 애를 쓰던 내 작은 꿈, 그 꿈이 지금 함박눈을 맞아 찐빵처럼 둥그렇게 부풀어 오른 것이다.
신인문학상이라니, 그것도 애지라는 이름의.
이건 은총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백 만 두뇌와 고급 문화인을 양성하려는 애지의 창간 정신과는 너무 먼 거리에 있는
능력이기에 더욱 그런 소감이다. 아스라한 저 높이와 깊이 그리고 그 공간을 나폴거리는 춤사위가 아직은 부족한데, 크나 큰 광영이 아닐 수 없다.
흐르는 물이 여울목을 만나면 부르는 여울소리 같은 노래를 구성지게 불러보고 싶다는 마음이 물씬 일어난다.
노마드(Nomade)라 말하는 자유정신으로 물처럼 흐르다가 만나게 되는 삶의 여울목에 앉아 그 삶의 굴곡을 노래로 승화시켜 보고 싶다는 갈망이 인다.
또한 홀씨 하나가 하늘을 떠돌다 이제사 안착을 하고 뿌리를 내릴 땅을 얻은 기분이다.
그러기에 더욱 기쁘다. 지혜를 사랑한다는 이 땅을 사랑하려 한다.
이 땅은 깊이 뿌리를 내리며 자라가야 할 땅이리라. 이 땅을 귀하게 여기며 사랑하련다.
그렇게 해서 이 은총에 보답하리라.
정말 부족한 나에게 이 영광을 안겨준 애지와 심사위원님들께 심심한 감사를 올린다.
잔소리꾼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과 감사의 마음을 엮어 다발로 올린다.
문근이와 지원이-사랑하는 아들, 딸-에게도….
그리고 나의 시 스승들과 나를 아껴주었던 문우들 및 사랑하는 교우들에게도 마음을 담은 감사를 올린다.
우리 모두에게 평안이 있으소서!
'다시 보고 싶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조용한 가족 / 이동호 (0) | 2014.11.11 |
---|---|
[스크랩] 제3회 <시와세계작품상> 수상자 김미정 시인 (0) | 2014.11.10 |
[스크랩] 2012년 《현대문학》신인추천 당선작 _ 김영미, 이상협 (0) | 2014.11.08 |
[스크랩] 2008 현대시 작품상 수상작 (0) | 2014.11.07 |
[스크랩] 2012년<문학동네>신인상 시 당선작 (0) | 2014.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