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2008 현대시 작품상 수상작

문근영 2014. 11. 7. 15:35

2008 현대시 작품상 수상작

강진만 (외 7편)

위선환




물비늘 하얗게 깔린 바다를 배경으로 23번 해안도로를 달리는 자전거의 바큇살이 반짝거리며 지나가고 있는

가로수와 가로수 사이 行과 行 사이 다음 行 사이로 줄지어 늘어선 行間들이 한 칸씩 저물다가

문득 시야 밖으로 꺾인다 하늘 아래에 저 갯바닥에 갯물이 꽉 찼다

하늘그늘이 느릿느릿 내리는 것, 어슬어슬 어스름 깔리는 것, 물낯바닥에 거뭇거뭇 기미 돋는 것 본다

걷는 길이 날마다 몇 리가 남아 있곤 했다 발뒤꿈치가 헤져서 뼈가 드러나곤

발톱이 또 빠졌다 집어내고, 참 멀리까지 왔구나, 강진만이 어두워지는 때

등 뒤쪽, 돌아다보면 한참이나 먼 백련사 어림에서

삐이꺽, 무릎을 펴고 일어선 사람이 삐걱거리며 마룻장 위를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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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임자도 이흑암리 앞 백사장의 한 끝, 80m 폭 해벽(海壁)을 바닷물 높이로 관통한 해식동굴 언저리에는 늘 모래가 날고 있다. 굴로 빨려 들거나 굴에서 불려 나오는 바람 때문이다. 그렇게 모래들은 빨려 들거나 불려 나오고 그러다가 떨어져 쌓여서 더미를 이루었는데 헤쳤더니, 푸석하게 마른 머리털과 자잘하게 금간 눈꺼풀과 날카롭게 모가 선 눈초리와 단단하게 굳은 숨결이 집혀 나오고 마모되어 까칠해진 광대뼈며 앙다문 이빨들도 만져진다. 모래더미 속에 풍화하는 내 얼굴이 묻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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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못




땡볕에다 나를 내걸어둔 적 있다. 꿰어 걸려서, 진땀이 걷히면서, 가죽에 소금꽃이 피면서, 서늘해지기도 하면서
나는 잘 말랐다. 바스락거리다가, 흔들거리다가, 잠깐씩은 잘게 떨기도 하다가,
낙엽 지듯, 떨어져 내렸다.
발끝 세워서 키 돋우고 안간힘 써서 팔 뻗쳐도 손끝이 닿기에는 아직 멀 듯, 겨우 닿는 그 자리에 못박혀서
(내 몸뚱이 대신 꿰어 걸린 허공의, 그 하염없는 무게를 못 견뎠겠지)
쇠못이 'ㄱ'자로 구부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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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碑銘)





발바닥에 묻은 먼지를 턴다. 발등에는 마른 털이 누웠고 무릎에다 받쳐둔 긴 뼈는 휘었다.

아직 걷고 있는 사람은 오래 걸을 것이다. 며칠이 저물도록 느리게 걸어서 어둑한 들녘을 지나간 다음에는 어느덧 종적이 깜깜할 것이다.

올해에 죽은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소식이 끊겼다. 없는 이의 안부를 묻고 간 사람이 있다.

나는 남아서 어금니와 손톱을 씻는다. 돌이킬 수 없는 한 때였다. 종잇장인 듯 바삭대는 손바닥과 부러질 듯 야윈 손가락 몇 개를 여러 해째 움켜쥐고 있다.

찬 비 내리고

흙 덮어서 재워둔 여자의 얼굴이 젖는다.

누구의 죄도 아니다. 가을이 며칠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어디나, 땅 아래에도 비는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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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





느릿느릿 길게 긴 허리 굽는, 다 굽어서 땅에 닿는 당신이다

불 들어간 뒤로 여러 해째다. 손가락 끝이 서릿발보다 추운 해인사 다비 터,

불타며 오그라든 뼈의 자국들, 튀는 뼈에 움찔 찔리던 속살의 낌새들도 함께 헤쳐서

새 이파리 갓 핀 가지 움켜쥐고 떨며 기다리는 착한 느티나무의

느티나무 아래 차가운 그늘에 맺힌 시리고 단단한 이슬 한 방울을 집어 드는,

느릿느릿 길게 긴 허리 펴는 당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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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필(肉筆)




부서질 듯, 둥글게, 허옇게, 몇 군데는 거뭇하게, 두개골이 비쳤다. 눈썹 아래로는 바스락거리며 그늘이 내려오고, 가늘게 풀벌레 울고, 구석지고 어둔 그늘에서는 거미가 줄을 늘여 집을 지었는데 구석지지 않은 몸이란 없어서 온몸이 거미집에 덮였다.

오래된 뼈들이 내려앉아 바닥에 닿곤,

이마에서 흘러내린 주름살이 뱃가죽을 밀며 내려와서…, 어제는 발등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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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생포




작살잡이 박씨 집 기둥에 작살 한 자루 묶여 있다

작살에 찔린 바다 한 채가, 뿌옇게 먼지 덮인 고래뼈 한 벌이 함께 묶여 있다

바다는 입이 컸다 듬성 돋은 이빨들이 굵다 한 입에 고래를 삼켰다 물방울들은 반짝이며 물바닥 위를 굴러다니고 수직으로 세운 꼬리를 털썩 눕히곤 하는

여기서는 고래이자 바다인

바다와 고래가 등을 겹친, 길게 휘인 등 너머가 넘겨다보이는

저 바다야말로 먼 불빛이다 먼 물빛보다 먼 데서 부르는 먼 목소리다

고래가 일어서서 수평선 너머를 두리번거릴 때

가파르게, 고래의 비탈에서 쓸려 쏟아지는 하늬바람의, 바람의 끝자락에서 불린 가랑잎들 바다 위로 날릴 때

내 안에 잠긴 바다의, 차가운, 그 바다를 삼킨 고래의, 차가운, 고래 안에 잠긴 바다에는 내가 잠겨 있는

추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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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天葬)






죽은 사람은 늘 그렇듯 식고 굳었다. 깊숙이 칼을 묻어가며 전신에 칼집을 냈다. 큰새들이 모여들었다. 발톱에는 먼지가 묻었고 몇 마리는 날개깃이 부러졌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뱃가죽을 열고 아랫배로, 가슴과 안으로도 손을 질러 넣어서 안에 든 것들을 꺼내 놓았다. 큰새들이 덮쳤다. 물어뜯고 당기고 찢고 쪼아 삼켰다. 뒤뚱거리며 날개를 퍼덕이며 서로 부딪쳤다.

눈발이 얼굴을 덮었다.

칼의 법대로 각(脚)을 떴다. 뼈마디가 맞물린 틈바귀에다 칼날을 질러 넣거나 비틀어서 젖히는 일은 서툴다. 도끼를 들어 긴뼈를 토막내고 휘어진 것은 베었다. 단번에, 두개골을 내리쳤을 때는 골수가 튀었다.

손등에 눈꽃들이 얼어붙었다.

떨리고 눈물이 흐르고 기침이 났다. 갈비뼈가 옆구리를 찔렀다. 큰새들이 뜯어먹고 남긴 뼈 토막들을 두 번 주워 모아 잘게 부순 후 흩었다.

눈이 그쳤다.

큰새들이 무겁게 날아오르더니 머리 위 공중에서 날개를 털었다. 굳은 피와 검은 살점과 잔 뼈 부스러기들이 떨어져 내렸다.

내가 죽을 것이다!

큰새들이 큰 원을 그리며 선회하고 있는 공중에다 대고 길게 느리게 칼을 세워 그었다. 깊숙이 칼날이 묻혔다. 베이는 하늘의 살집이 섬뜩하고 완강하다. 문득, 칼을 놓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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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환 / 1941년 전남 장흥 출생. 2001년 <현대시> 9월호에 '교외에서' 외 2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다시 시작. 시집 『나무들이 강을 건너갔다』『눈 덮인 하늘에서 넘어지다』『새떼를 베끼다』. 2008년 현대시 작품상 수상.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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