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문학동네>신인상 시 당선작
넝쿨장미 / 남지은
뾰족한 악몽을 밀어내고
담장에 오르는 새벽
나는 내가 비좁다
창을 열면
내 안으로 눈이 내리고
붉은 새가 걷는다 붉은 새가
떼로 날아오르면
검게 찢어지는 하늘이
칼들이 쏟아져내리고
아버지가 보인다
취한 손으로 가족들 발톱을
뽑아내는
모두가 찌르고 모두가 찔리고
모두가 떠나지 않고 이곳에 서 있다
내 안으로만 쌓이는 눈
창이 열리면
나는 나를 뚫는다
새가 새를 뚫는다
도마뱀 / 남지은
네가 울었을 때 말없이
서로를 안으며 오는 파도처럼
도마뱀을 상상했다 네가 누군지 모르면서
허공에 몸을 떼어두고
흔들리는 꼬리 외로운 꼬리
*
붉어지는 얼굴들끼리 탁자를 때리며 한참을 웃다가 나는 귓속말을 했다 왜 웃는 거야 왜 웃는지 모르면서 왜 웃었어 너하고 키스할 때 녹슨 혀
비가 오고 있었는데 우리만 멈춰서 각자의 수수께끼를 떠올렸어 작은 빗방울 속에 갇혀서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기분이 들었어 우리는 멈춰 서서 밖을 보는데 시간이 아래로 아래로 떨어졌어 모두가 깨질 것 같았어
네가 먼저 잠들면
남은 밤을 재봉질하고
도마뱀이 탁자 모양으로 굳어간다
잼잼* / 남지은
쥐었다 폈다 아가의 손에서
쳐다보지 마
우는 아가야
너는 나를 이런 식으로 닮아선 안 된다
창밖으로 던져진 아가들
너무 익어버린 자두처럼
문드러지는
무릎을 모아
우산으로 숨는다
목에 맺힌 물방울이 끓고
나는 펼쳐질 것 같다
밖으로
노을의 머리채를 끌고 다니는 아가들이
* 죔죔.
밤에 가까운 밤에 / 남지은
창문을 닫아
날아가는 새의 머리를 베어낸다
정차한 별들을 훔쳐보는
나는 싸구려였다
이불 아래 주춤주춤 모여드는 구름
나를 떠나는 게 많으면 좋겠다
가슴 위로 코끼리가 발 하나를 얹었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기차, 기차, 기차, 그리고 기차들이
눈썹의 끝에 모인다
새들의 머리를 언 땅에 묻자
심장 소리를 들으면 동그래지는 마음
지붕이 없어서
나무들의 키가 자꾸만 자란다
하수구의 쥐들이 튀어오르고
오르간 / 남지은
멍든 무릎이 숲으로 번진다 발 잘린 새들이 버려져 있대 아이들이 뛰기 시작했어 넘어지면서 아이들은 시작되지 나를 엎지르고 그림자가 태어나네 밤이 낳고 간 알의 악몽 세어보지 마 세어보는 손가락부터 지워질 거야 새장은 풍선처럼 비어 있어 요람을 밤새 흔들던 손은 어디에 있지 내 심장 속에는 딱따구리가 살지 어둠을 쪼는 새들 그림자를 오리자 수치심을 나누어줄게 번쩍 손을 든 아이 한 손만 있으면 어떻게 기도를 하지 이불을 뒤집어쓰는 아이들 하얗게 드러나는 발들 나무의 밑동처럼 잘려나가네 찢어지는 그림자 누구도 울지 않는다 층계마다 묵상의 죽은 발이 놓이고
남지은 시인
1988년 전남 여수 출생. 강남대 국문과 졸업.
[심사평]
* 응모작들을 뒤적이면서 말이 많은 시는 싫다, 라는 생각을 했다. 별다른 필연성도 없이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말들이 나를 지치게 했다. 이미지의 조형성을 포기한 채 너무 쉽게 말을 낭비하고 있거나 책임질 수 없는 해석을 함부로 남발한다는 인상을 주는 응모작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추리고 추려 고른 작품 역시 말이 많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는 아마도 하고 싶은 말이 진정 많아서라기보다는 많은 듯이 보이고 싶어서 나타난 현상 아닐까. 그 많은 말들 가운데 정작 기억에 남는 표현, 진정성을 담고 있는 문장, 세계에 대한 그럴듯한 통찰을 제시해주는 구절은 얼마나 될까.
당선작으로 결정된 남지은씨의 작품은 예각적이고 도발적인 이미지로 세계의 단면을 절개해 내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넝쿨장미」를 비롯한 그의 응모작 역시 말이 충분히 적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불필요한 잉여를 걷어낸 간결함과 힘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시가 함축한 냉각된 폭발성을 믿어보기로 했다.
- 남진우(시인, 문학평론가)
* 당부컨대(이건 전적으로 내 생각이다), 예비신인들이여, 젊은 시인들의 시, 특히 미래파가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자. 물론 미래파와 같은 시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습작기에 있는 문학도에게 미래파 시는 ‘독’이 될 수도 있다. 미래파 시가 시의 거대한 나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살아 있는 시인의 시는 뒤로 미루자(나중에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 대신 ‘죽은 시인의 살아 있는 시’를 모델로 삼아 필사하고 암송하자. 베껴쓰고 소리내며 외워보자. 그러다보면 어느 날 눈이 확- 떠진다. 자기가 쓴 시의 잘잘못이 훤히 보이기 시작한다. 자기 시에 스스로 점수를 매길 수 있게 된다. 나는 이 순간이 습작기의 끝, 진정한 등단이라고 본다. 자기 시를 냉정하게 읽어낼 수 있을 때, 그래서 내가 왜 쓰는지, 무엇을, 누구를 위해 시인으로 사는지 깨달을 수 있다면, 그는 지구 안에서, 지구 위에 겸손하면서도 담대하게 설 수 있다. 그때부터 그는 시인이다. 그가 시인이다. ……
남지은씨의 「넝쿨장미」는 첫눈에 들어왔다. 문장이 간결하고 단단해서 오랜만에 ‘언어 경제’라는 말을 떠오르게 한 시였다. 넝쿨장미라는 특별하지 않은 대상을 가족사와 연결시킨 발상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참신했다. “나는 내가 비좁다”에서 “나는 나를 뚫는다”에 이르는 성장통이 서로를 원수로 여기면서도 결별하지 않는 가족사의 비극을 배경으로 잘 드러나 있다. 언어를 절제한 만큼 의미-이야기가 증폭된다는 시의 ‘황금률’이 모범적으로 적용된 시다. 언어를 절제한 만큼 드라마가 커지는 시다. 하지만 「밤에 가까운 밤에」「도마뱀」같은 시에서는 대부분의 신인들이 안고 있는 결함이 그대로 담겨 있다. 남지은씨를 신인상 당선자로 결정하는 데 선뜻 동의하면서도 한 가지 옵션을 걸고 싶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 현대시 백 년을 빛낸 시와 시인을 하나하나, 깊숙하게 만나보라는 것이다. 법고창신, 온고지신은 결코 투박하거나 낡은 사자성어가 아니다. 우리는 시가 있어서 시를 쓰는 것이고, 시인이 있어서 시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거기서 겨우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다. 한 걸음 앞서 나아가기,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 첫 시집 출간이 진짜 데뷔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
- 이문재(시인)
* …이 모든 작품들은 각자가 갖고 있는 장점의 힘으로 본심에 올랐다. 다른 심사위원들이 본심에 올린 작품들도 마찬가지 이유로 거기까지 왔을 것이다. 이분들의 작품이 당선작이 못 된 이유는 단점 때문이 아니다. 그 장점이 다른 응모자의 장점을 초라하게 만들 정도로 막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분들은, 심사평에서 지적받은 단점들을 보완하겠다며 어느 하나 모난 데가 없는 두루뭉술한 시를 만들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장점을 더 강력하게 키워나가서 어느 한 군데 날카로운 모가 있는 시를 만드는 게 나을 것이다.
- 신형철(문학평론가)
* 심사평에서 언급된 응모작들
백인기, '편지' 외 4편
김용각, '지문'외 7편
남지은, '넝쿨장미' 외 4편
장은주, '나는 온기를 앓고 있어' 외 4편
한연희, '코끼리 볼링센터' 외 6편
김희정, '현실의 아이' 외 6편
안희연, '멋진 악몽' 외 6편
총 671명의 3,932 편이며,
최종적으로 김용각, 남지은, 백인기 세 명의 작품으로 압축되었음.
—《문학동네》201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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