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애지문학상 후보작
함기석 [저녁의 비행운飛行雲}, {애지} 2012년 가을호
신용목 [우리는 이렇게 살았지], {애지} 2012년 가을호
백무산 [빈집], {창작과 비평} 2012년 여름호
유종인 {눈길을 쓸다], {애지} 2012년 여름호
최서림 [자화상], {현대시학} 6월호
안도현 [그 집 뒤뜰의 사과나무], {창작과비평} 2012년 봄호
안상학 [앙숙], {실천문학} 2012년 봄호
김백겸 [여미지 식물원], {애지} 2012년 여름호
양애경 [여자], {애지}, 2012년 여름호
박이화 [청보리밭], {애지} 2012년 여름호
이경림 [꿈], {애지} 2012년 여름호
송종규 [녹색부전나비의 문제], {애지} 2012년 봄호
김이듬 [너라는 미신], 『창작과 비평』2011년 겨울호
이근화 [한밤에 우리가], {문학과사회} 2011년 겨울호
강성은 [환상의 빛], {문예중앙}, 2012 봄호
저녁의 비행운飛行雲
함기석
아픈 아이를 안고 창밖을 본다
내일이 어린이날인데 하늘엔 어두운 핏줄만 뻗어가고
내가 가꿔온 꿈이 사마귀처럼 사각사각
내 내장을 파먹고 아이의 웃음을 파먹고 있다
옆집 무화과나무 아래 싹튼 상추들이 모두
만 원짜리 지폐로 보인다 저 싱싱한 지폐에 구름과 삼겹살을 싸
배터지게 먹고 돼지가 되고 싶은 날이다
대문가 목발을 짚고 올라온 어린 나팔꽃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쳐다본다
저녁의 눈동자는 점점 커져 서녘하늘 전체가 붉은 갯벌로 변해가고
벼랑이 보이는 해안으로 새들이 날아간다
햇살 하나가 가만히 다가와 아이의 상처 난 뺨을 혀로 핥아준다
흰 이가 막 돋아난 햇살의 빨간 잇몸
공기들이 만드는 투명한 파도가 쉼 없이 일렁이고
아이는 약에 취해 잠든다
나는 아이의 등을 다독거리며 놀이터 모래밭을 바라본다
아침부터 온종일 허공을 날다 저녁에
모래밭에 떨어져 죽은 새
새가 남긴 마지막 무늬와 추상의 발자국들이
사람의 문장보다 아픈 저녁이다
나는 잠든 아이를 꼭 안고 속으로 울음을 삼킨다
점점 붉게 지쳐가는 하늘과 대지
저 두 장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는 검붉은 침묵들
거미의 입으로 들어간 벌레와 빗방울과 어둠이
환한 허공의 집이 되기까지
삶의 습한 저지대를 비행하는 아픈 비행운들
멀리서 석양에 젖은 새들이 하늘을 돌고
나무의 혼들이 죽은 나뭇가지 끝에서 빠져나와 찬 물결처럼 고요히
허공 저편으로 퍼져가는 것이 보인다
---함기석 [저녁의 비행운飛行雲}, {애지} 2012년 가을호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신용목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공원 벤치에
누워서 바라보면 구름의 수염 같은 나뭇잎들 누워서 바라보면
하얗게 떨어지는 별의 비듬들
누워서 바라보며
칼자루처럼
지붕에 꽂혀 있는 붉은 십자가와
한켠에 가시넝쿨로 모여앉아 장미 같은 담뱃불 뒤에서 맥주를 홀짝이는 어린 연인들의
눈치를 살피며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버려진 매트릭스에 붙은 수거용 스티커를 바라보며 한때의 푹신한 섹스를 추억하며
일 주일에 한 번씩 종량제 봉투를 꾹꾹 눌렀던 손을 씻으며 거울을 바라보는 얼굴로
어느 저녁엔 시를 써볼까
어둠 속에서 자라는 환한 그림자를 밤의 기둥에 쿵쿵 머리로 박으며
방 없는 문을 달고 싶다고
벽 없는 창을 내고 싶다고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오래 눕지도 못하는 공원 벤치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으로 칠한 조립식 무지개처럼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별이 진다 깨진 어둠으로 그어 밤은 상처로 벌어지고 여태 오지 않은 것들은 결국 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언제나 그대로인 기다림으로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너는 환하게 벌어진 밤의 상처를 열고 멀리 떠났으니까
나는 별들의 방울소리를 따 가슴 주머니에 넣었으니까
바람 불 때마다 방울소리 그러나
나는
비겁하니까
----신용목 [우리는 이렇게 살았지], {애지} 2012년 가을호
빈집
백무산
빈집을 보면 사람들이 쑤군거리지
사람 떠난 집은 금방 허물어지거든
멀쩡하다가도 비워두면 곧 기울어지지
그건 말이야 사람이 독해서야
벽과 기둥을 파먹는 것들
돌을 갉아먹는 이빨 날카로운 시간들
사람 사는 걸 보면 질려 달아나지
삶이 독해서야 그건
그랬지 내가 허물어지던 때마다
내게서 사람들이 빠져나간 뒤였지 그땐
나를 구원하러 온 것마저 나를 허물었지
타인의 욕망이 나를 버티게 하는 나의 욕망에 대해 무지했었지
사람이 빠져나가고 이념만 남은 마을을 본 적이 있지
사람이 빠져나가고 풍요만 남은 마을을 본 적이 있지
사람이 빠져나가고 이상만 남은 마을을 본 적이 있지\
삶의 하찮은 몸짓들 하찮은 욕망들 하찮은 구원들
그 비루하고 모진 기득권들이 빠져나가면 곧 허물어지지
나는 집을 떠나려고만 했지
수십년째 집을 떠나려고만 했지
굼벵이처럼 비루한 것이 싫어서 그랬고
슬퍼서 그렇게 하지 못했지
사람의 모진 것들이 자꾸 슬퍼서
― 백무산, 「빈집],『창작과 비평』2012년 여름호
눈길을 쓸다
유종인
공원 관리사管理舍의 대빗자루를 몰래 가져다
정자 낀 연못에서 산길 초입까지
눈길을 쓴다
몇 바닥 쓸지도 않고 허리가 당겨
절로 하늘을 본다
저 하늘은 누가 쓸까
괘난 걱정도 웃음이 되는데,
입김이 장천長天이다
개발자국 하나 없는 눈길은 쓸기도 아깝다
아까워서 못 쓸겠다 중얼대며
눈길을 또 쓸어나가니,
눈발은 묵묵부답으로 집자集字해 놓은 공책일까
하늘이 펑펑 세로로 내려 쓴 것을
나 홀로 땀 뻘뻘 가로로 쓰는 길,
세상엔 글을 써 어지럽히는 붓 말고
이렇게 글을 쓸어 비워내는 붓도
그래야 한 길 겨우 열리는 마당 붓도 있나
백비白碑도 아마 촘촘히 새겨놓았다
누군가 몰래 쓸었을 것이다
누군가 몰래 말을 치웠을 것이다
할 말을 다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눈길을 쓸어보라, 눈길을 치워보라
말이란 처음부터 덮는다
말이란 처음부터 가린다
말이란 처음부터 옮는다
말이란 처음부터 묻는다
말이란 죽는다 처음부터
순백의 침묵이란 말마저 다 치워보라
흙 속에 코를 박고 우는 돌멩이들
흙 속에 귀를 빼고 웃는 돌멩이들
쉬었다 다시 눈길을 젖히니
못 보던 개가 옆에서 꼬리를 흔든다
뒤돌아 보니,
달빛에
큰 붓에 매달린
내 그림자 아닌가
---―유종인, [눈길을 쓸다],『애지』2012년 여름호
自畵像
최서림
피자빵처럼 얼룩덜룩한 얼굴로
오십견이 있는 어깨를 빙빙 돌리고 있다
수전증이 있는 그의 오른팔에는
홀로 사는 누나처럼 목이 긴
재두루미가 둥우리를 치고 산다
가늘게 떨리는 긴 부리 모양의 손이 가 닿으면
모든 사물들은 껍질을 벗고 푸른빛을 드러낸다
삶의 피멍들이 스르르 풀려나온다
재두루미 목줄기같이 휘어지는 그의 손 끝에
딱딱하게 마른 北國의 모델이
둥글둥글한 南洋 여자로 변신하고 있다
화실로 곧장 쳐들어온 햇빛이
깊고 깊은 푸른빛에 녹아
재즈처럼 흐물, 흐물, 흐무러지는 시간이다
화실을 병풍처럼 둘러싼 南天들이
매운바람에 붉게, 붉게 익어가는 시간이다
--- ―최서림, [자화상],『현대시학』2012년 6월호
그 집 뒤뜰의 사과나무
안도현
적게 먹고 적게 싸는 딱정벌레의 사생활에 대하여
불꽃 향기 나는 오래된 무덤의 입구인 별들에 대하여
푸르게 얼어 있는 강물의 짱짱한 하초(下焦)에 대하여
가창오리들이 떨어뜨린 그림자에 잠시 숨어들었던 기억에 대하여
나는 어두워서 노래하지 못했네
어두운 것들은 반성도 없이 어두운 것이어서
열몇살 때 그 집 뒤뜰에
내가 당신을 심어놓고 떠났다는 걸 모르고 살았네
당신한테서 해마다 주렁주렁 물방울 아가들이 열렸다 했네
누군가 물방울에 동그랗게 새겼을 잇자국을 떠올리며
미어지는 것들을 내려놓느라 한동안 아팠네
간절한 것은 통증이 있어서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 하고 나면
이 쟁반 위 사과 한 알에 세들어 사는 곪은 자국이
당신하고 눈 맞추려는 내 눈동자인 것 같아서
혀 자르고 입술 봉하고 멀리 돌아왔네
나 여기 있고, 당신 거기 있으므로
기차소리처럼 밀려오는 저녁 어스름 견뎌야 하네
― 안도현,『창작과비평』2012년 봄호
앙숙
안상학
어느 신부님은
마당가에 꽃 키우는 것 못마땅해했다
손바닥만한 땅이라도 있으면 콩이나 채소를 가꾸었다
어느 작가는
마당에 풀이 우북해도 절대 뽑지 않았다
쇠무릎 이질풀 삼백초 질경이까지 다 약으로 썼다
한 사람은 어려서 배가 고팠고
한 사람은 어려서 몸이 아팠다
한 평생 친구였다
그들과 친했던 어느 농민 운동가는
집을 자주 비우다 가끔 집에 돌아가면
아내가 마당가에 가꾼 꽃밭을 갈아엎어 텃밭을 만들곤 했다
아내는 남편이 집을 비우면
기다렸다는 듯이 텃밭 갈아엎어 꽃밭 가꾸곤 했다
텃밭과 꽃밭의 숨바꼭질
아내가 남편을 잃고서야 끝이 났다
아내는 꽃밭에서 아주 살았다
한 사람은 농사를 사랑해서 채소를 길렀던 것이었고
한 사람은 남편이 그리워서 꽃을 가꾸었던 것이었다
—『실천문학』2012년 봄호
여미지 식물원
김백겸
당신은 ‘꽃의 정원’에 핀 수천가지 꽃을 가리키며 ‘이 꽃의 빛깔을 보세요 저 꽃의 향기를 맡아 보세요’ 말씀합니다
당신은 여미지 식물원에 펼쳐진 기화요초의 세계를 저와 나누고자 하지만 모두 하나의 꽃으로부터 드러난 꽃의 무늬일 뿐입니다
잃어버린 소를 찾아 먼 여행을 떠난 ‘선화동자’처럼 저는 당신과 함께 하나의 꽃을 찾아 돌아오는 몽상을 합니다
얼마나 많은 세상의 꽃이 밤하늘의 은하수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퍼져나갔을까요
세세연년 피고 지지만 닳거나 낡지 않는 이 꽃은 당신의 눈과 귀와 심장에 피어있으며 바다의 흰 파도와 하늘의 푸른 허공에도 피어있습니다
‘물의 정원’과 ‘열대정원’을 품고 있는 여미지 식물원 자체가 하나의 꽃이라는 생각이 안드십니까
꽃의 침묵은 바하의 음악 속에 숨겨진 수의 비례와 조화처럼 시공간의 잠재태潛在態 속에 숨겨져 있지만
당신이 눈을 뜨자 깨어나는 아침처럼 튤립의 이파리와 꽃잎으로 드러납니다
하나의 꽃은 수령 천년의 은행나무가 수만 개의 이파리를 피우지만 대지의 검은 뿌리에서 한 몸인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강가에서 청둥오리라고 부르고, 당신이 숲에서 부전나비라고 부르고, 당신이 기쁠 때 태양의 노래라고 말하고 당신이 슬플 때 달의 눈물이라고 말하는 황금 꽃의 얼굴이 있습니다
열대수련의 꽃과 같은 당신이여, 저는 당신의 심장에서 핀 참모습의 꽃을 봅니다
이 하나의 꽃이 세상의 모든 꽃에 발자국을 남겼으므로 저는 당신을 통해 여미지 식물원의 모든 꽃이 생명으로 빛나는 극락을 봅니다
----김백겸 [여미지 식물원], {애지} 2012년 여름호
여자
양애경
양잿물로 삶아
햇볕에 잘 말린 란닝구처럼
하얗고 보송한 여자
가슴팍에 코를 묻으면
햇빛 냄새가 나는 여자
머리칼에 뺨을 대면
바람 냄새가 나는 여자
잘 웃는 여자
낡은 메리야스처럼
주변 습기를 금방 흡수해
쥐어짜기만 하면 물이 흐르는 여자
잘 우는 여자
편서풍에 날아간 여자
빠른 시냇물에 둥둥 떠 급히 흘러간 여자
오래 입고 여러 번 빨아 얇아진
그 여자
지금 어디?
----양애경 [여자], {애지}, 2012년 여름호
청보리밭
박이화
도루코 면도날이 지나간 자리처럼
잘 다듬어진 잔디밭은
내 발길을 머뭇거리게 하거나 돌려세우고 만다
거울 속 면도하는 남자처럼
그만의 얼굴에 빠져 있는 듯한 잔디밭은
어쩐지 다가서기도 건드리기도 불안하다
그러나 몇날며칠 깎지 않은 수염처럼
거칠고 꺼끌꺼끌한 보리밭을 지날 때면
옛 남자를 본 듯 반갑고 가슴 뛴다
쓰다듬을 때마다
손바닥 따끔따끔 찌르는 수염은
그가 키운 억센 야성의 그리움 같아
와이셔츠 단추를 풀듯
개망초꽃 하나 둘 풀어헤치고
등에 풀물 베이도록 와락, 그를 안고 싶어진다
그럴 때 바람은 거품 같은 구름을 풀어
비탈 전체를 밀어 버릴 듯 지나가겠지만
그럴수록 보리는 거웃처럼 무성하게 다시 일어설 테지
고랑마다 더 비리고 축축한 청보리 냄새 풍길 테지
예나지금이나 짐승의 피를 나눈 것들은
이토록 후안무치해서
멀리 둥근 눈을 가진 새들마저
몰카처럼 찰칵찰칵 날아간다
무인모텔, 그 청보리밭 비탈에선
----박이화 [청보리밭], {애지} 2012년 여름호
꿈
이경림
임제를 읽다
임제로 얼굴을 덮고 잠에 들다
깨어보니 임제가 없다
누가 임제를 가져간 것일까
안방으로 건너 방으로 소파 뒤로 책상 밑으로
임제를 찾아 반나절을 다니다
책꽂이 둘째 칸에 꽂힌 조주를 만나다
조주를 읽다
조주를 소파에 던져두고 외출하다
돌아오니 조주가 없다
조주를 찾느라 한 저녁이 다 가는데
문득 침대 모서리에 끼인 임제의 모서리가 보이다
다시 임제를 읽다
조주는 어디 간 것일까
임제로 가슴을 덮고 잠에 들다
임제도 조주도 없는 꿈속을 밤새 울며
헤매다 거기가 어딘지
울음으로 얼굴을 가리고 아침에 들다
임제가 없다
----이경림 [꿈], {애지} 2012년 여름호
녹색부전나비의 문제
송종규
이를테면, 껍질은
수많은 버선을 화폭에 걸어놓고 떠나간 화가의 뒷모습 같기도 하지만
나는 내 몸을 싸고 있던 껍질을 벗자마자 그것을, 말끔히 먹어치웠다
내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아 날 것을 짐작하지는 못했으나
나는 내게, 우월한 족속이라는 최면을 건 적 있다
높은 데로 비상하는 것은 내가 꿈꾸던 삶의 방식이다
그러므로 제 몸을 먹어치운 대가로 날개를 얻었다고 수군거린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만
솔직히 볼품없고 징그러운 껍질을 세상에 남기지 않은 것은
내 우월감과, 공중과, 우유부단한 구름 때문이다
문제는 공중, 공중에는 또 수많은 공중이 있다
----송종규 [녹색부전나비의 문제], {애지} 2012년 봄호
너라는 미신
김이듬
숲으로 엠티 왔네 이름도 거시기한 반성수목원으로 같은 길을 가는 동료들과 함께
변을 비비는 아버지를 두고
퍼지는 햇살 아래 가족처럼 둘러앉아 먹고 마시네 먹을 게 넘쳐나네 신비한 숲속의 향연이 따로 없네 저만치서 걸어오는 그가 어디선가 본 듯한 그가 히죽히죽 어슬렁거리던 그가 내게 다가오네 먹다 남은 음식 좀 달라고 하네 연신 손바닥을 비비네
흠뻑 변을 비비는 아버지를 두고 왔네 혼자서 칠갑하고 있겠지
먹던 도시락을 건네네 방울토마토 굴러가네 마시려던 맥주병도 던져주었지 내 곁에 쭈그려앉은 그가 추잡한 옷차림의 그가 여기저기 버려둔 떡이며 찌꺼기 같은 걸 갈퀴 같은 손으로 끌어와 입으로 주머니로 쑤셔넣는 그가 게걸스럽고 무례하고 추례한 또 뭐라고 할까 그래 인간도 아니다 수치심을 이긴 죽음을 극복하는 허기 불멸하는 궁기 그리하여 인간을 넘어서는
신이다 신이 오셨다
걸신도 되지 못한 아버지를 두고 왔다 자꾸 미끄러지는 턱받이를 하고 음식을 토하는 어린애를 혼자 두고 왔다 반성수목원으로 동료들과 섞이려고 반성은커녕 식물이 되어가는 아버지를 어이, 알거지병신새끼라고 부르고 싶은 하루아침에 나타난 아버지가 고이 기저귀에 똥 싸면 될 것을 엉덩이로 비비고 뭉개 온몸에 처바르면 내가 곁에서 오래 닦고 치워야 하니까 어디 도망 못 가라고 날 미치게 하려고 바꾸려고 수련시키려고 그러는 건 아닐 텐데
동료들이 또 웃네 내게 손가락질하네 넌 왜 만날 따로 있어? 그렇게 잘났어? 거기가 좋아? 둘이 제법 잘 어울려
동료든 아버지든 내 가슴 속에서 도려내고 싶은 구역질나는 미신 엉덩이 털고 일어나 나는 풀밭으로 뛰어간다 푸닥거리하듯 떡과 밥 사이로 쓰레기 오물과 웃으며 뒤집어지는 사람들과 배불러 죽겠는 사람들과 걸신과 환자 사이로 펄쩍펄쩍 넘어다닌다 얼추 미친년처럼
― 김이듬, 『창작과 비평』2011년 겨울호
한밤에 우리가
이근화
한밤에 치킨버스를 타고 우리가 간다면
보이지 않는 산
흐르지 않는 강
다가올 여름을 위해 아껴둔 풍경들
불편한 식사를 거절하고
약속을 만들지 않고
형광등 불빛 아래 빛나는 초콜릿 바를 깨문다
끈적한 입속에 가지런한 이들이
다가올 여름을 위해 제대로 썩어간다
퇴근길에 아이들을 번쩍 들어 올리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우리의 유전자가 냇물같이 흘러서 어디에 이를지 고민하다가
발이 세 개인 수레가 남기는 긴 흔적을 따라가본다
뜨거운 심장을 갖게 해줄 신비의 명약과 어려운 주문이
아이들의 입속에서 예고 없이 흐르겠지
아이들의 턱밑에 조그맣게 집을 짓고 산다면
다가올 여름을 위해 나의 사람과 너의 사람을 준비하고
한밤에 치킨버스를 타고 우리가 간다면
보이지 않는 산
흐르지 않는 강
다가올 여름을 위해 아껴둔 풍경들
----이근화 [한밤에 우리가], {문학과사회} 2011년 겨울호
환상의 빛
강성은
긴 잠에서 깨어난 외할머니가
조용히 매실을 담그고 있다
긴 잠을 자고 있는 내가 깨어날 때까지
나는 차를 너무 많이 마셨나
눈물에 휩쓸려 바다까지 떠내려갔나
하루는 거대해지고
하루는 입자처럼 작아져 보이지 않는다
아픈 내 배를 천천히 문질러주듯
외할머니가 햇볕에 나를 가지런히 말린다
슬퍼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본 적 없는 신을 사랑해본 적도 있다
본 적 없는 신을 그리워해본 적도 있다
그저 외할머니의 치마 속으로 들어가
긴 겨울을 여행하고 싶었을 뿐인데
긴 잠에서 깨어난 내가 눈물을 참는 사이
밤하늘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이 내려오고 있다
저 눈이 녹으면 흰 빛은 어디로 가는가
----강성은 [환상의 빛], {문예중앙}, 2012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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