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현대시> 2012년 하반기 등단작 /이미화
쇄빙선
세상의 추운 4시들이 몰려드는 해역들마다엔 아직 연어의 눈알들이 우두커니 말라간다.
마시다만 잔처럼 해가 떠 있고
월기月期 마지막 날
죽은 잎사귀들을 묶어 정원을 쓸었다
쇄빙선 한 척이 느릿하게 빠져나가는 오후, 봄은 파열음으로 물결 운雲이다.
날렵한 꼬리에 쌍떡잎 머리를 하고 있는 봄
녹다 만 달의 조각이 돌 틈에 끼어 있다
후륜의 힘들이 프로펠러에 묻어 있고
씨앗들은 회전하는 방향을 가늠하고 있겠지.
범고래 떼 같은 햇살이 몰려오는 방향으로 봄꽃들은 서로 겹쳐서 선수각船首各을 만들지
수로들은 소리만 남겨놓고 물관부들을 찾아간다.
북극의 계절은 지금
다리우스 달력을 빠져나가는 중이다
햇살은 아직 뿌리가 부실하다.
가끔, 쌀쌀한 선단船團이 지나가는 4시
봄의 속지에는 아직 솎아내지 못한 두유과豆油科같은 기미들이 무성하다.
밤, 달이 쇄빙선처럼 하늘을 깨트리며 지나간다.
인쇄소마다 뒤늦은 농법일지를 찍어내는 야근이 한창일 것 같다.
소금의 맛은 차가운 맛이고
달력은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벽을 지나간다.
우리들의 공중 사용법
처음 공중을 뜯었을 때 그 속에는 새들의 울음을 받아 적거나 우기를 밴 구름 빛깔의 속지가 있었지.
계절풍은 곧 빠져나갈 간기間期를 쓸고 있었다.
공기 돌은 흩어지기를 좋아해서
자꾸 다른 손등을 탐냈었고
굴러 떨어지는 건 늘 오후여서 캄캄한 소리를 냈었다.
비어있는 상자에서 빗소리들이 굴러다녔다
서랍에 살며시 밀어 넣은 손등에 닿은 건 난서亂書였다
새들이 지그재그 몸을 그어대면
공중은 어둑하게 구겨지고
초록의 계절을 집으로 삼는 새들의 몸엔 지붕이 없어 음역을 덮고 잠들었었다.
날개는 예의여서 공중의 혈관이라고들 했다.
들판을 싫증내는 공중
간극에 집을 짓는 것들이 구름을 몰아가면 새의 집들이 일제히 부화기를 끝내고 날아오른다.
이미 짝 지어진 곡선과 곡선은 양쪽의 눈이다
우리의 시야는 리본모양의 안부에 묶여있고
뜯다 만 공중에는 갸웃거리는 고개가 여럿 들어 있다
우리의 수줍음은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손 모양 음표가 검은 구름을 불러 세운다.
우리는 독주獨走하는 방향,
마주치는 손바닥 사이에 살던 새, 그것은 우리들의 공중사용법이었다.
아슬아슬 공기 돌 하나가 톡 꺼지고
위아래가 없는 여름에 공중이 잠시 서 있다.
푸른 사과를 먹는 시간
푸른 사과는 연약한 잇몸을 좋아하지.
발뒤꿈치를 들면 사과의 꼭지부분이 약해진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눈이 내릴 때였고 눈물이 과육처럼 뭉쳐질 때였다.
낙과의 지점에서 한 남자가 바람에 편지를 쓸 때였다. 별의 시상식은 곧 시작되었다고 그 남자는 썼다. 눈 너머로 아홉별은 몰랐고 별 셋은 안다고 남자의 편지를 훔쳐 읽고는 흡족하게 내 비명을 닫았다. 그 때 막 벼랑을 닫기 위해 손을 뻗쳤는데, 빈손이 수신하는 곳에서 새떼가 출몰하고 불 냄새가 났다. 동물병원 유리창 너머에서는 고양이의 눈동자가 사과처럼 쩍 갈라졌다.
지붕 처마 밑 초록 종지기에 맑은 물이 고이자 모래 세알이 들어있었다. 엽서 같은 저녁에 붉은 색칠한 버스를 탔고 소염제 같은 바람이 버스를 밀었다 지도에 없는 역에는 달다랗한 햇살이 비췄다 할머니들은 왼쪽 유방이 아프지 않아 쇠 맛 나는 사과가 먹고 싶다며 겨울의 빈 휴지 속을 들락거렸다
트럭은 맥박을 넣고 달을 도시로 날랐다 겨울은 가방을 든 채 귀가 떨어졌다 소녀들은 손수건이 된 손바닥으로 나뭇잎 같은 귀를 문질렀다 .
겨울은 모두 사과밭으로 몰려갔다.
하마다*
낙타사전을 보면 사막의 열쇠 혹은 모래의 낙관落款이라고 적혀 있다
흰 것은 모래, 검은 것은 밤
사막은 터번을 두르고 걷는다.
알파벳순으로 서 있는 제 그림자를 타고 내려오는 낙타의 짧은 쪽 다리에
몇 개의 내리막 무게가 내려진다.
죽은 것들의 털들만 모아 사막은 여우의 귀를 짠다.
소금과 함께 자라나는 사막 별들은 가장 오래된 허공표지판 문자들이고
한 번도 모래공장의 위치를 가리킨 적 없다
죽은 자의 혀를 잔등에 태우고 오는 낙타
모래의 반말이 풍선껌처럼 부푼다.
자오선의 윤곽을 바꾸며 옮겨 다니는 사막
바람의 눈엔 눈썹이 길다
우물과 낙타의 눈은 허공에서 건조되고 세상의 벽들은 그림을 덮고 잔다.
우리 기도는 양탄자 발음,
풍경만 남겨둔 바람의 단백질
이슬 덫에 그늘의 온도가 걸려든다.
간헐천에는 바람의 마스카라가 일교차로 먹고 산다
새의 둥지를 두르고 걷는 낙타 북회귀선에는 잠두콩이 두 개의 생식기를 만드는 중
물구름에 사막과 모래자갈은 서로의 눈과 귀를 목에 건다.
사막건축법에는 바람의 권리가 분명하다.
화각
바람의 눈동자를 빌려와 조리개 안에 넣는 것은
오래된 전통의 거푸집 같은 것이지요.
화각이 흉내 내는 조리개의 값,
초점막이 그어가는 저녁이 빛의 실틈을 통과 한다.
참으로 눈부시군요.
반지 구름을 낀 신랑 신부는 중앙에 서서 사진기를 본다.
딸꾹질의 프레임에는 서약서들만 모아놓은
책장을 넘기는 속독의 습관이 있군요.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이 서로 팽팽하게 시선을 모아오고
바람의 각은 혼자 굴러가는 풍선처럼
예식禮式을 기록하고 있군요.
바람은 늘 둥근 모양에서 터질 곳을 찾지요
간혹, 집이 터지는 일이 일어나곤 하지만 실은 반지가 굴러가는
일이 더 잦지요.
팔짱 낀 저 무음의 리듬을 손끝에 묻히면
뷰 파인더 안으로 노을 몇 컷 흘러들어가 달그락 거린다
꼬깃꼬깃한 침묵들이 벼랑을 만드는 오늘은 양각의 날
달의 묵음처럼 뷰 파인더 안의 파장을 더듬어
햇살을 설정해 놓고 시간을 묻는다.
부유와 침몰 같은 상상의 간격을 조율한다.
어둠은 벌써 떨어지려하는데 빛 샘에 목이 부푼 햇살들을 가위질
해 놓고
백년을 비워놓고 달려온 후생이
사진기의 셔터를 찰칵 찰칵 누른다.
잘려진 하객들이 우르르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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