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애지l 신인문학상 당선작 발표/ 이제야

문근영 2014. 10. 24. 19:20

한여름의 발광 소나타 외 4편
이제야

달력을 데굴데굴 굴려 서랍에 박았다. 안도의 한숨을 쉬이, 내쉬고 광화문역으로 간다. 바람이 온전히 몸에 닿는 것이 사랑의 척도라면 옷이 얇아질수록 외롭지 않다면 다들 여름을 잘 지내는 중이다. 태양이 나만 피하는지 다들 옷을 벗어 내 육체에 입혀줘도 춥다. 입술이 파래져 애인은 키스도 끊겼고 언 손가락을 뚝 잘라 손이 모자란 피아니스트에게 건네주었다. 한여름의 노래는 완성되어간다. 손에 피가 솟도록 땅을 긁어 눈사람을 만들어도 며칠 뒤 해가 바뀐다고 택시 기사에게 애원해도 얼음 파는 아주머니 주머니에는 돈이 쌓인다. 데굴데굴 굴러 눈뜨니 또 광화문역이다. 내가 신뢰하는 달력은 겨울 여기서 정지, 여긴 날카롭던 애무가 끝난 곳. 그러니 겨울 뒤에 또 겨울이다. 계속 여름 눈이다. 달력을 데굴데굴 굴려 서랍에 박고 안도의 숨을 쉬이 내시고 광화문역으로 간다. 눈사람이 태양에 녹는다.



사과합니다

안부가 궁금하다는 말로 우린 만났습니다. 당신은 참 착하게 안부에 답했습니다. 요즘엔 이런 제철과일이 나왔고 비에 과일 계급이 높아졌다면서요. 나는 과일 맛도 모릅니다.
오래 못 만났다는 말로 우린 만났습니다. 당신은 참 정직하게 시간에 답했습니다. 몇 번의 밤을 보냈는지 답했고 벌써 10일이구나 손으로 셌습니다. 나는 3일까지 세다 말았고요.
근처에 왔어, 들른다는 말로 우린 만났습니다. 당신은 참 성실하게 거리에 답했습니다. 지하철역 2번 출구보다 3번 출구 육교를 건너는 게 낫다면서요. 나는 가던 길로 가렵니다.
밥 사달라는 말로 우린 만났습니다. 당신은 참 푸짐하게 양에 답했습니다. 파란 얼굴에 좋은 보석 밥과 꽃 반찬을 얹어주면서요. 나는 미안하게도 좋은 것일수록 바로 소화합니다.
시간이 괜찮다는 말로 우린 만났습니다. 당신은 참 세밀하게 초심에 답했습니다. 달 얼굴이 더 깨끗해질 때까지 차를 마시자고요. 나는 달 대신 형광등에 얼굴을 비춥니다.
다음은 무슨 말로 만났느냐고요. 그만하렵니다. 배도 안 부르고 시간이 흐르지도 않습니다. 계속 밤이었고 맛을 몰랐고 달은 어두웠고. 외로운 두 개의 팔이 네 개가 되려고 애쓰는, 만남 앞에 근거가 뱉어져야 하는, 그런 무책임한 두괄식 만남은 그만하겠습니다.
중심문장만 있었네요. 혼자여도 진실만 말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나는 자꾸 사과합니다.



발이 춤춘다

절름발이 여자가 걷는다
하이힐을 신은 여자가 앞지른다
로또를 확인하는 남자가 앞지른다
절름발이 여자는 그래도 좋다
뛰지 않는 건,
기꺼이 선택한 일

절름발이 여자가
신문 배달부에게 인사한다
그 사이 당신이 앞지른다
꽃집에 사는 꽃들에 웃는다
그 사이 당신이 앞지른다
절름발이 여자는 그래도 좋다
쉬이 걷는 건,
기꺼이 선택한 일

무엇이 빠르고 느린지
당신의 걸음과 시들어가는 꽃은
절름발이 여자의 걸음과 다시 피는 꽃은




함부로 외로워라

찌그러진 가방에 간신히 종이가 산다
웃다가 울다가 표정이 없어진 애살스럽던 단어들
표정을 잃으니 그저 암호
종이가 태어난 날이 그립다
가방에 살고 있는 그리움

구겨진 바지 주머니에 간신히 휴지 조각이 잔다
닦다가 닦아주다가 얼굴이 녹은 조각들
지켜주고 싶었던 순수함도 얼굴을 잃으니 그저 색맹
휴지가 살던 날이 그립다
바지에 살고 있는 그리움

당신을 적은 종이와
당신을 닦은 휴지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는
시간의 흔적




확실한 대화법

메일함을 연다
발신인 이름을 바꾼다

내 이름은 낙엽
가을이 언제 오는지 편지를 보낸다
조금만 더 외로우라고 답장을 쓴다
낙엽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내 이름은 오후
오후만 살고 싶다고 편지를 보낸다
조금만 더 숨으라고 답장을 쓴다
오후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내 이름은 눈물
그만 그치라고 편지를 보낸다
조금만 더 사랑하라고 답장을 쓴다
눈물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메일함이 꽉 찼다
하루 만이다
나는 이제야 입을 다문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