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신예 평론가 나민애가 뽑은 이달의 좋은 시- 폭풍 속의 시인, 바람을 말하다

문근영 2014. 5. 14. 14:25

신예 평론가 나민애가 뽑은 이달의 좋은 시-11월
[이 달의 좋은 작품]폭풍 속의 시인, 바람을 말하다
 
나민애
□ ‘천 년’의 바람이 전해오는 것
 
- 이건청, 「천 년」
 
미황사 길,
옥수수 밭
지석묘 아래 누우면,
돌이끼에 덮여 누우면,
추운 개 한 마리
쉬다 갈까
올무에서 풀려난 개가
겨우 겨우 기어와서
잘린 발목을 핥다가 갈까,
돌이끼 건너 쪽,
풍경이 울까
바람이
풍경소리 실어다 줄까,
미황사 길
옥수수밭
지석묘 아래
내가 누우면…
(《현대시》, 2010. 10.)

* 미황사(美黃寺)는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에 있는 절. 아니, 그보다는 두륜산을 지나 한반도의 남쪽 땅끝 더 갈 곳도 없는 정점에서 달마의 고향을 바라보고 있는 절. 그래서 마지막에 놓여 있으면서도 처음이 되어 줄만한 절. 「천 년」은 이곳에서 시작하는, 이건청 시인의 신작이다.
 
그렇지만 오해하지 말자. 엄밀하게 말해서 이 시는 절로 상징되는 종교적 정신세계에 들어가 있지 않다. 산사 내로 들어가면 우리는 - 그 전에 어떠한 내면과 자아를 가지고 있었든지 간에 - 일주문을 지나면서 종교의 거대함에 반응하는 작은 일점이 되고 만다. 종교와 마주했을 때 그것이 아닌 다른 더 큰 것을 생각할 도리는 인간에게 없다. 그러나 이 시의 마음이 지닌 것은 아직 종교가 아니다. 시인은 미황사와 불교의 깊이에 취해 있지 않고, 혹은 도취를 지연시키기 위해 아직 노상에 머물러 있다. 이 시에서 우리는 동양적 산수화의 잔영을 느낀다. 그는 담묵으로 미황사와 그곳으로 향하는 소로와 옥수수밭과 지석묘라는 네 가지의 배경을 그려냈다. 그리고 전경 인물로서 한 영혼은 오래된 묘 아래에 누워있다.
 
이것은 정적이지만 한가롭지 않고 단아하지만 무력하지 않다. 시인이 단절된 산수화 속으로 들어가 얻은 것은 바로 ‘천 년’이 아닌가. ‘천 년’을 통해 실려오는 미망스런 소망의 인생이 ‘바람’ 속에 있고 가엾은 생명살이에 있지 않은가. 그것이 종교보다 큰 항구불변의 무엇이 아닌가.
 
 
□ 거센 바람으로 연마하기
 
- 박성현, 「세한도, 봄꿈」
 
  당신의 몸에 바람이 파고든 흔적이 있다.
 
  그 흔적의 깊이와 완력은 당신 속으로 내려앉았던 돌 하나의 무게, 그러니까 잔설이 멈춘 순간이다.
 
  붓이 까마득한 벽에 닿았을 때 시간의 연골이 바쁘게 빠져나갔다.
 
  속이 패이고 거죽만 남은 목어가 간신히 지느러미에 묻은 흙을 털었던 것인데
 
  지천에 널린 반백의 입술들이 쏟아낸 것은 말이 아니라 울음들이 뒤엉킨 소리였다.
 
  단단한 것들이 피고 지는 몸에 다시 꽃잎이 터지고 허공은 그만큼 밀려났으며, 또한 살과 뼈의 경계는 분명해졌다.
 
  바람 한 무리가 새의 겨드랑이를 흔들거나 낙타 위에 앉아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니까 멸(滅)이 통(通)의 관자놀이를 때리고서야 당신은 봄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유심》, 2010. 11/12.)
 
 
* 박성현 시인은 2009년 《중앙일보》로 등단한 신인이다. 등단평에서 그는, 시의 스팩트럼이 ‘지나치게 다양하다’는 평을 들은 바 있다. 단점일까. 아니, 흥미롭다. 이 시인은 방황하는 신세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시력(詩力)이 단단하게 숙련된 구절들을 발견할 수 있어 지나친 다양성이란 곧 상당한 중량감의 일각이라고 믿게 된다.
 
사실 무게감은 신인에게 가장 낯선 덕목이다. 무릇 신인은 새로운 감각개방하여 참신성을 획득해야 하는 의무를 부여받는다. 신인이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면 곧 스스로 그 단계극복하고 개성적 어법과 세계를 형성해야 한다. 그리고 이 세계의 형성은 스스로의 발목에 쇠줄을 매달아 깊은 바다에 잠수하는, 그런 지난(至難)의 과정을 요구한다. 이런 이유로
 
「세한도, 봄꿈」에 주목한다. 여기에는 발목에 묶인 쇠줄이 얼마만큼 드러나 있다. ‘세한도’에 대한 시를 쓰는 것은 정지상의 「대동강」에 차운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세한도는 한 폭 족자가 아니라 이미 정신화되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신인이 어려운 일을 자처하는 것은 매우 옳은 방법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지난(至難)을 필요로 한다. 결과로서 이 시는 세한도의 ‘바람’을 빌려와 자신의 몸에 바람을 새겼다. 그 필묵이 지닌 ‘흔적의 깊이와 완력’이 무게를 가늠해줄 척도가 된다. 그리고 시인은 바람을 부림으로써 ‘봄꿈’의 환상에서 깨어나게 될 것이다. 깨어남에는 위험이 따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과정을 보는 것은 흥분되는 일이다. 시인이 환상을 부수기 위해 거센 바람 끝에 서서 내공을 연마 중이지 않은가.
 
 
□ 그대를 위한 명품격 위로
 
- 손택수, 「얼음의 문장」
 
아내야, 거기선 지구를 몇 바퀴 돌아온 먼지 한 점도 여행자의 어깨에 내려 반짝일 줄 안다. 설산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은 몇 천 년 전 우리 몸속에 있던 울음소리를 닮았지. 네가 아플 때 나는 네팔 어디 설산에 산다는 독수리들을 생각했다. 한평생 얼음과 바위틈을 헤집고 다니던 부리가 마모되면서 더는 사냥을 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굶어 죽어가는 독수리들. 그러나, 힘없이 굶어 죽어가는 독수리 떼 사이에서 어느 누군가는 마지막 힘을 다해 설산의 바위를 찾아 날아오르지. 은빛으로 빛나는 바위벽을 향해 날아가 자신의 부리를 부딪쳐 산산이 으깨어버리기 위함이라는데, 자신의 몸을 바위벽을 향해 내던질 때의 고통을 누가 알겠니. 빙벽 앞에서 지끈 눈을 감는 독수리의 두려운 날갯짓과 거친 심장 박동소리를 또 누가 알겠니. 부리를 부숴버린 독수리의 무모함을 비웃듯 바람소리가 계곡을 할퀴며 지나가는 히말라야. 주린 배를 쥐고 묵묵히 바위를 타고 넘는 짐승의 다친 부리를 너는 알지. 발가락 오그라드는 뿌리들 뻗쳐오른 뿔 끝에 반짝이는 빛을 알지. 머잖아 쓸모없어진 부리를 탓하며 굶어죽는 대신 스스로 부리를 부숴버린 독수리는 다시 새 부리를 얻는다. 으깨진 자리에서 돋아나는 새 부리만큼의 목숨을 얻는다. 대대로 숨어 유전하는 설화처럼 몇 억 광년을 걸어 내게로 온 아내야, 우리가 놓친 이름들을 헤며 아플 때 네 펄펄 끓는 몸으로 지피는 탄불이 오늘도 공을 치고 돌아온 곱은 손을 녹여줄 때 나는 생각했다, 네팔 어디 혹한에 벼린 부리처럼 하늘을 파고든 채 빛나는 설산을.  (『나무의 수사학』, 실천문학, 2010.)
 
 
* 시인의 아내는 아프다. 원인은 뱃속의 아이를 잃은 일이다. 그러니 이 시는 유산으로 앓는 아내의 몸과 마음에 바치는 헌사인 셈이다. 그런데 위로의 말이 눈물과 번잡한 일상을 떠나 청량한 세계에서 울려퍼지는 목소리로 되어 있어 신선하다.

  시인은 ‘아내야, 너는 알지’ 하면서 앓는 아내의 머리맡에서 거대한 설산의 위엄있는 독수리를 꺼내든다. 그것은 사랑하는 생명에게 전해주고 싶은 희망의 동화이자 역능적 전설이다. 시인은 저 먼 곳의 위대함을 무리없이 가져와 우리의 아픔을 달랜다. 이 무리없음이 ‘빛나는 설산’을 내면으로 이끌게 한다. 시인은 거센 바람 속에 역경을 극복하는 한 독수리와 그 독수리를 키워낸 설산의 물방울들을 통해 다시 살아갈 날들의 생명을 확신한다. 저 먼 곳의 역능을 따와 아내를 치유하는 이 시는 ‘문 열어라 정도령아’에 비견할 수 있는 재생의 작품이다. 그리고 품위있는 위로를 보여주는 면에서 명품의 수준에 올랐다고 말할 수 있다.   
 
 공자는 ‘빈이무첨(貧而無諂)’이라고 했다. 우리는 가난하고 어려운 상황에도 비루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사실이 믿기 어려운 때, 손택수 시인의 작품을 읽는 것은 큰 응원을 얻는 것과 같다.
 
 
□ 삶의 칼바람 속에서
 
- 마종기, 「파타고니아의 양」
 
거친 들판에 흐린 하늘 몇 개만 떠 있었어.
내가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해도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만은 믿어보라고 했지?
그래도 굶주린 콘도르는 칼바람같이
살이 있는 양들의 눈을 빼먹고 나는
장님이 된 양을 통채로 구워 며칠째 먹었다.
 
어금니 두 개뿐 양들은 아예 윗니가 없다.
열 살이 넘으면 아랫니마저 차츰 닳아 없어지고
가시보다 드센 파타고니아 들풀을 먹을 수 없어
잇몸으로 피 흘리다 먹기를 포기하고 죽는 양들.
 
사랑이 어딘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으면 혹시,
파타고니아의 하늘은 하루쯤 환한 몸을 열어줄까?
짐승 타는 냄새로 추운 벌판은 침묵보다 살벌해지고
올려다볼 별 하나 없이 아픈 상처만 덧나고 있다.
남미의 남쪽 변경에서 만난 양들은 계속 죽기만 해서
나는 아직도 숨겨온 내 이야기를 시작하지 못했다.
(『하늘의 맨살』, 문학과지성사, 2010.)
 
 
* 2009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이다. 이 시를 읽고 비로소 ‘파타고니아’를 찾아보았다. 그곳은 머나먼 남의 땅, 아르헨티나의 남부이며 건조한 초원이어서 목양(牧羊)이 발달한 곳이라 지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거센 바람이 지배하는 폭풍우의 대지라는 부연 설명이 붙어 있는, 듣기만 해도 척박한 곳이었다.

파타고니아는 마젤란에 의해 도륙된 이후에 역사로 편입된, 다시 말해 역사의 시작에서부터 죽음과 피냄새가 함께한다. 그 황량한 벌판에 가서 시인은 오늘날에도 진행되는 목숨의 죽음과 아픈 상처를 확인하고 있다. 아프기 위해 아픔의 땅을 찾아간 것이고, 죽음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살벌한 현장을 찾아간 셈이다. 마치 종군기자처럼 죽음의 현장에 직면하기 원하는 영혼은 사실주의적 고발정신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그는 보다 깊은 이야기를 하기 원한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숨겨온 내 이야기’라는 말에서 보듯 내면의 개인사적 상처에 관한 것이면서 또한 ‘하늘’ 아래 공평한 사랑과 죽음의 인생에 관한 것이다.

굳이 자신의 상처를 들춰내지 않으면서도 그의 시선만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시는 암시적으로 아픔을 느끼게 한다. 경(景)을 말하면서 정(情)을 드러내는 이러한 수사적 기법은 전통적인 것이지만 현대시에서도 훌륭한 역할을 해내고 있다. 그 경(景)과 정(情) 사이에서 먼 파타고니아의 땅은 이 작품으로 인해 적게나마 우리의 눈물이 뿌려진 그런 땅이 되었다. 

나민애 편집위원 (문화저널21)

1979년 충남
공주 출생, 2007년 7월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으로 등단, 현재 계간 《시와시》편집위원, KAIST 강사. 주요 평론으로는 ‘무성성의 사랑과 병증의 치유법-김남조론’, ‘여윈 신화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여성 시학의 갈래화를 위하여’ 등.
 

-'문화저널21'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우가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