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희]
1. 전통의 서정과 현대의 서정
2000년대의 시단에서 서정시를 둘러싼 논란의 핵심은 ‘과연 무엇이 오늘의 서정이라 할 수 있는가?’이다. 이러한 문제제기의 배경에는 전통의 서정과 현대의
서정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전제한다. 전통 서정시는 본질적으로 일원론적 세계관을 지향한다. 즉 자아와 세계가 충돌하여 빚어낸 갈등과 모순을 동화시킴으로써 자아와 세계의 거리를 없애려는 시적 세계관을 반영한다. 반면에 현대 서정시의 패러다임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이는 오늘의 서정시를 거론하면서 사용되는 ‘신서정’, ‘반서정’, ‘탈서정’이라는 용어가 함축하듯이 현대의 서정시는 전통 서정의 근본 정서가 상실되거나 파괴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단적으로 말해 전통 서정시가 자아와 세계의 합일을 지향하고 있다면, 현대의 서정 양식은 자아와 세계의 마찰과 균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현대시의 서정 양식이 이처럼 변화되는 이유는 90년대 이후 전개된 이념부재와 탈중심주의적 경향에 따른 급격한 세계 단절의 인식이 개입되어 있다.
《문학과 현실》지로부터 요청 받은 글의 주제는 “현대 서정시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이다. ‘현대 서정시의 힘’이라는 말의 뉘앙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여전히 서정시의 위력이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으며, 그 힘의 원동력과 원리가 무엇인지를 파악해 보자는 취지일 것이다. 문제의 초점은 ‘현대의 서정시’이다. 현대의 서정시에 대한 논란과 입장이 정확히 자리매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서정시의 힘이 무엇인지를 진단한다는 것은 어쩌면 피상적이며 원론적인 차원의 이야기만을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현대 서정시를 둘러싼 논쟁은 미학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다양한 견해차, 현대 서정 양식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차이에 따른 의식의 편차가 공존하고, 그 해석에 대한 입장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의는 현대 서정시에 대한 개념 규정과 이해의 차이를 바탕으로 한 논의에 집중되기 보다는 현대 서정이 추구하는 내용적 특성의 양상에 대한 점검이라 할 수 있다.
2. 뿌리 찾기의 의식 많은 서정시가 전통 공간을 시상의 모델로 선정하는 것은 자신의 근원에 대한 탐색과 관련된다. 이는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근본 뿌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이다. 즉 한 개인은 개별적 존재성을 통해 확인되기보다는, 가족이나 공동체라는 연속적 차원에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때문에 뿌리 찾기에 대한 의식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나’, ‘역사적 존재로서의 연대 의식’, ‘과거와의 유대감’을 확인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뿌리 찾기는 본질적으로 ‘관계성’에 대한 재확인을 의미한다.
내 꿈속에 오는 빼빼 마른 조상들은
왜 둘씩 셋씩 숨죽이고 앉아
한국식으로 육회를 먹나
피 묻은 쇠고기를 허겁지겁 맨손으로 떼어먹나
손등까지 싹싹 핥아먹고
굶주린 개들처럼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다들 어디로 가나
얼굴도 모르는 수세기 전 사람들과 몸을 섞어
안개처럼 바람처럼
또 어디로 몰려가나
육촌형님은 죽어서도 홀아비고
할머니는 날 전혀 모른다는 듯 웃고 있고
왜 조상들은 제사가 있는 날이며 꼭
상반신만 남아 꿈속으로 몰려다니나
귀신들도 국경이 있나, 정부가 있나
왜 나는 한번도 본 적 없는 증조부와 닮았나
고향을 한참 떠나왔고, 친척도 이젠 없는데
내 가느다란 팔다리마다 최씨들뿐이다
서른다섯 해를 살아도 내 몸에 온통
가난하게 살다 죽은 최씨들뿐이다
― 최금진, 「다를 어디로 가나」부분
최금진은 ‘나’를 구성하는 진정한 요소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나는 “고향을 한참 떠나왔고, 친척도 이젠 없”다. 하지만 나의 얼굴은 “한번도 본 적 없는 증조부와 닮았”으며, 나의 “가느다란 팔다리”에는 “온통” “최씨들”의 흔적이 배어있다. “서른다섯 해를 살아도 내 몸에 온통 / 가난하게 살다 죽은 최씨들뿐이다”라는 말이 함축하듯이 ‘나’는 “최씨들”이라는 혈연 공동체와 단절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의 부분으로서의 존재 각인 방식은 ‘몸’이라는 물질성의 세계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피’로 엮인 ‘가족’의 관계성은 시인의 무의식의 깊은 심층에까지 닿아 있다. “내 꿈속에 오는 빼빼 마른 조상들” “왜 조상들은 제사가 있는 날이며 꼭 / 상반신만 남아 꿈속으로 몰려다니나”라는 발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꿈’의 공간에서 조차 그는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게 된다. 즉 나의 몸과 정신, 의식과 무의식의 모든 영역에 조상들의 흔적이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이때 나와 조상들을 매개하고 있는 문제의식 속에는 ‘슬픔’, ‘가난’, ‘숨죽임’ ‘쫓김’과 같은 고통의 징후들이 스며있다. “숨죽이고 앉아” “허겁지겁 맨손으로” “굶주린 개들” “홀아비” “가느다란 팔다리” “가난하게 살다 죽은”과 같은 표현들은 이러한 삶의 아픔들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최금진의「다를 어디로 가나」는 삶에 대한 고통의 연대기를 보여주며, 나의 현존의 방향을 규정짓는 근본이 무엇인지를 되묻게 한다. ‘가족’ ‘조상들’과의 만남은 아프지만 부정할 수 없는 뿌리에 대한 끈끈한 유대감을 재확인시켜 준다.
어머니는 그때 만삭에 가까웠다.
아버지와 어떤 사내가 드잡이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한사코 싸움을 말렸는데 그만
누군가의 팔꿈치에 된통 떠받쳐 벌러덩 자빠져버렸다.
나는 태중에서부터 늑골 아래가 아파 몹시 울었다. 세상에 툭, 떨어지자
냅다 더 큰 소리로 울었다. 잠시도 그치지 않고
새파랗게, 새파랗게 질리며 울었다.
1941년생, 나는 아직도 피고름 짜듯 가끔, 찔끔, 운다.
(중략)
가난이야 뭐 본래대로 바짝 웅크린 채 견디면 된다.
당시엔 당연히 가슴 쪽에 나 있던 수술자국이 이 시각,
왼쪽 등뒤 주걱뼈 한뼘 아래까지 와 있다. 생각건대,
이 징그러운 흉터야말로 몸을 두고 공전하는 기억이지 싶다. 궂은날,
지금도 수천의 잔발로 간질간질간질간질 세밀하게 기면서
씨부럴,
썩을놈의 슬픔이 또, 온다, 간다.
― 문인수, 「지네 -서정춘전(傳)」부분
문인수의「지네」는 존재의 근원이 어디에서 연원하는지 보다 확실히 제시한다. 어머니의 자궁은 나의 고향이다.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인 태중에서 나는 잊을 수 없는 상흔을 지니게 된다. “아버지와 어떤 사내와의 드잡이를” “한사코” “말렸”던 “어머니”는 그만 “누군가의 팔꿈치에 된통 떠받쳐 벌러덩 자빠져버렸”고 때문에 나는 “태중에서부터 늑골 아래”를 다치게 되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사건과 추억으로 존재하는 과거의 일이 아니다.
‘나’의 슬픔은 태생적인 것이다. “세상에 툭, 떨어”져 나왔지만, 나와 어머니는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어머니의 고통과 상처는 고스란히 나에게 전이되었다. 어머니의 슬픔, 어머니의 가난, 어머니의 설움은 곧 나의 슬픔과 가난과 설움의 바탕이다.
문인수는 현재의 나는 과거와의 연대와 지속성을 통해서만 존립할 수 있음을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1941년생, 나는 아직도 피고름 짜듯 가끔, 찔끔, 운다.”라는 구절이 환기하듯이 나는 ‘여전히’ 그리고 “아직도” 슬픔과 고통의 한가운데 있다. 이 처절한 가족에 대한 연대 의식과 공동체적 감각은 존재의 뿌리에 대한 강한 집착과 애정을 보여준다. 이 뿌리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 슬픔과 고통의 감각은 본질적으로 한국인의 정(情)과 한(恨)의 원형이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전달한다.
몸에 각인된 “징그러운 흉터”는 거부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뿌리의 표식이다. “지금도 수천의 잔발로 간질간질간질간질 세밀하게 기면서” 끔찍한 ‘지네’처럼 자신을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태생의 슬픔을 통해 시인은 한국적 정한의 실체를 확인하게 한다. ‘가난’ ‘치욕’ ‘슬픔’ ‘눈물’로 점철된 가족사의 비극은 결국 우리 민족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며 그 역사의 파도를 온몸으로 감내하며 살았던 지독한 삶의 고통을 보여준다. 또한 그것은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삶에 개입하고 있는 본질적 문제임을 암시한다. 현재란 과거와의 연계성을 바탕으로 존속할 수 있음을 문인수는 말하고 있다. 과거의 기억은 회상과 추억의 부스러기가 아니다. 과거는 현재적 삶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진행형의 사건으로 존재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뿌리는 무엇인가?’ ‘나의 현재적 삶은 어떠한가?’ 와 같은 본질적 물음들을 오늘의 서정시는 ‘존재의 근원 탐색’이라는 방식을 통해 그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3. 자연과의 교감
문명화된 도시적 삶의 울타리가 견고하게 우리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어도 ‘자연’을 향한 인간의 그리움은 꺾이지 않는다. 자연에 대한 영원한 향수는 생명에 대한 애착만큼이나 본질적이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도 많은 서정시의 소재와 주제가 ‘자연’ 향하고 있다는 점은 자연이야말로 삶의 원천임을 시사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서정시는 자연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연이란 특정한 시대에 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은 언제나 되돌아갈 수 있는 원형적 세계이다.
비록 현대의 서정의 양상이 변화되었다 하더라도 그 근원적 모델로서의 자연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자연’이 여전히 삶의 규범으로 작용하며, 자연을 통해 오늘의 삶을 반추해 볼 수 있는 반성의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오백년을 축축 늘어진 동백나무 가지가
철렁 내려앉으며 들여놓은 동백나무 방들
미처 널어말리지 못한 채 몇계절이 쌓인
어룽 햇살 꽃진 낙엽을 금침으로 깔아놓고
시간 없어서 한번밖에 못했다며
아줌마를 앞세워 동백 그늘을 나오는 아저씨라든가
그 나이에 한번 허면 됐다며
추임새 좋게 동백 그늘에 드는 늙은 아줌아라든가
동백의 몸통은 쌍춘년 동백처럼 불끈불끈
동백의 팔다리는 춘삼월 정맥처럼 구불구불
봄이 길다는 춘장대 옆 마량리 화력발전소 뒤
그렇게 한 오백년
춘정의 봄군불을 때가 벌겋게 데기도 하는
오백년 된 동백숲의 온봄 동력
내연(內燃)의 한 천년은 들고나겠네
― 정끝별, 「춘장대 동백숲」전문
“동백의 숲”은 살아있는 몸의 세계이다. 그곳에는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흐르고, 삶이 깊어지는 “오백년”의 세월이 녹아있다. 그 “오백년”의 시간을 시인은 지나간 전통과 역사의 현장으로 인식하기보다는 “불끈불끈” “구불구불”거리는 생동하는 현장으로 뒤바꿔놓는다. “동백나무”가 드리운 “방들”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들고 난다. “몇계절이 쌓인” “낙엽의 금침”을 이불삼아 “아줌마”와 “아저씨”는 육감의 정을 나눈다. 이들이 나누는 살의 감각은 “쌍춘년 동백처럼 불끈불끈”하고 “춘삼월 정맥처럼 구불구불”하다. 이 “내연”의 현장을 시인은 “춘장대 동백숲”에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욕정에 사로잡힌 남녀의 모습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어 뜨거운 “춘정”에 온몸을 들썩이는 봄의 생명력을 시인은 감각화 한다.
“춘장대 동백숲”의 역사는 이렇듯 끊임없는 생명의 약동을 통해 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르지 않고 퇴색되지 않는 뜨거운 ‘불’의 세계이다. 정끝별에게 “오백년의 동백숲”은 “온몸”의 “동력”을 체감하게 만드는 살아있는 ‘불의 공간’이다. 그는 자연을 대상화하지 않고 내적 감각의 세계로 수용한다. 나와 자연은 분리된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육체이자 생명으로 인식된다. 몸으로서의 자연은 인간화된 자연을 의미한다. 자연 친화의 방식을 육체성, 욕정, 생명의 감각으로 전이시키는 이러한 태도는 자연에 대한 단순한 예찬과 동경을 지나, 인간이 곧 자연이라는 동화의 단계를 보여준다. 자연에 대한 몰입은 세속의 삶에 대한 반성과 정화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자연의 동력을 통해 생의 동력을 부여받으려는 생명의 의지는 건조한 죽음의 세계로부터 탈출하려는 욕망을 드러낸다.
나는 없네, 나를 털어 바친
매화원, 꽃송이들만 앞 다투어 피고 있네
보게나 꽃송이들로
피어나는 나일세
꿀벌들, 윙윙대는 날갯짓도
때로는 나인 적 있네
그렇네 꽃향기로
번져 가는 나도 있네
매화꽃, 꽃진 자리
오물오물 알져 오르는 저 열매들!
열매들 뽀얗게 자라
푸르른 하늘, 흰 구름
제 속에 가득 담기도 하네
나는 없네 나를 털어 바친
바람으로 물결로 떠 흐를 뿐이네.
― 이은봉, 「매화원에서」 전문
이은봉의 「매화원에서」는 자연 풍경을 통해 주체의 지각이 변화되고 있음에 주목한다. “나는 없네”라는 존재 부재의 명제는 자연에 삼투되어버린 자아를 의미한다. 나의 부재는 “나를 털어 바친”과 같이 나의 적극적인 의지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대상(자연) 속에 편입되고자 하는 화자의 능동적 태도를 보여준다. 즉 “매화원, 꽃송이들”의 아름답고 환상적인 세계 속으로 자신 또한 몰입하고자 하는 화자의 욕망이 자연과 하나 되는 순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처럼 주객일치, 물화 일체를 꿈꾸는 상상력은 “보게나 꽃송이들로 / 피어나는 나일세”라는 말처럼 자신을 식물화된 몸으로 인식하는 단계에 이른다. 인간의 몸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나를 털어 바”쳐 식물화되려는 시인의 의지는 결국은 자연의 이치와 원리를 닮아가려는 의식적 투신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몸이 “꿀벌들”의 “날갯짓”으로, “꽃향기”로, “오물오물 알져 오르는” “열매들”로, “푸르른 하늘, 흰 구름”으로 변신하는 상상력은 매화의 순수하고 아름답고 고매한 기품을 닮아가고자 하는 의식화의 산물이다.
이처럼 인간이 자연화되는 방식에서 이은봉은 무엇보다 자신의 존재성을 적극적으로 소멸시키려는 주체의 자각화된 의지를 강조하고 있다. 즉 “나는 없네 나를 털어 바친”이라는 반복적 표현은 주체를 온전히 유지했던 인간 세계와의 과감한 결별만이 인간이 자연화 될 수 있는 방식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관점은 자연과 인간의 수평적 조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기보다는 자연을 인간의 우위에 두려는 인식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연으로 향하는 삶, 자연을 닮아가려는 태도, 자연화된 인간으로의 순수성 회복을 역설하고자 하는 심리인 것이다.
이은봉이 형상화하고 있는 자연은 그런 의미에서 시인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 실존의 풍경이기도 하다. 이는 단순한 의인화의 방식을 통해 자연 친화적 관심을 드러내거나, 자연과 인간을 교감시키는 소박한 자연시가 아니다. 즉 이은봉의 시는 외연적 언어에서 제시되지 않는 내포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현상적 풍경과 실존의 풍경은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인간은 꽃이 될 수 없는 존재이지만, 시인은 꽃에서 자신을 본다. 꽃과 자신의 동일화는 표면적으로는 인간과 자연의 동일화를 지향하는 전통서정의 방식을 따르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자연의 생명과 초월의 세계를 지향하는 생태학적 상상력과 도가적 의식이 내재되어 있다. 특히 “푸르른 하늘, 흰 구름 / 제 속에 가득 담기도 하네”와 같은 표현은 지상적 존재를 넘어 천상적 세계와 교감하려는 의지를 내포한다. 이는 무위자연의 사상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매화원에서」는 소박한 자연 예찬을 넘어 자연 그 자체가 지닌 무한한 신성성의 세계, 생명의 구경적 아름다움에 이르고자 하는 시인의 주체적 열망이 내재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의 자연 풍경은 인간 존재의 실존적 성찰을 드러내는 주제를 함의한다.
자연 친화와 동화, 자연에 대한 신성성과 실존화의 방식 등 자연을 매개로 한 서정시의 탐색은 서정성의 원형 속에 ‘자연’에 대한 근본적 동경이 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자연 교감 의식의 저변에는 문명세계의 야만적 폭력성에 대한 반성적 시각이 깔려있다.
도심 공원에서는 벤치에 누운
사람이 야생이고
건너 고깃집 야외식탁을 들러온 바람은
검은 냄새의 문명이다
빈 낙엽 한 장 누더기처럼 내려와
습성처럼 어깨를 덮는
빌딩 숲속서 나온 한 야생이 다른 야생을 깨워 삶은 계란 하나를 내밀고 캄캄한 동굴 속으로 흰 계란속이 허기를 몰고 떨어지고 동굴 밖에서 누런 계란껍질이 닭 대신 비둘기를 키워 공원을 사육하는
한 번에 한 개비씩 담배를 밀려가는 손과 얼룩의 세월이 반질하게 몸에 붙은 외투와 거기 문서처럼 꽂힌 신문지와 희멀거니 먼 데 걸어놓은 동공과 그리고도 한시코 불을 빌려가지 않는
빳빳한 머리카락이 푯말처럼
서 있는
― 신용목, 「야생동물보호구역」전문
‘야생’과 ‘문명’을 구분 짓는 경계는 무엇인가? 신용목은 인간의 욕망이 그 경계마저 실종시켜 버렸음을 반어적으로 표현한다. “도심 공원에서는 벤치에 누운 / 사람이 야생이고 // 건너 고깃집 야외식탁을 들러온 바람은 / 검은 냄새의 문명이다”라는 발언은 일종의 아이러니이다. 도심에 있는 “사람”이 야생이고, 자연의 “바람”이 “문명”이라면 이때 자연은 이미 죽은 자연이다.
신용목에게 자연은 “검은 냄새”의 “바람”, “누더기” 같은 “낙엽”, “캄캄한 동굴”처럼 부패되고 누추하고 어두운 세계로 그려진다. 그곳에 야생의 생명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스스로 자생력을 갖추지 못한 “사육”된 세계이다. 보호의 미명하게 자행되는 죽음의 현장, 기생의 흔적, 비정상적인 자연의 먹이사슬을 바라보면서 진정한 ‘야생’은 상실되었음을 시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야생의 자취가 남아있지 않는 인공화된 자연(공원)은 그저 관념 속에만 남아있는 자연을 재구성해놓은 이미지의 자연일 뿐이다. 자연마저 시뮬라크르한 세계가 바로 오늘의 문명사회임을 그는 암시한다.
신용목이 말하는 야생은 도시를 배회하는 인간의 생존의 먹이사슬만이 존재하는 살벌한 세계를 의미한다. “희멀거니 먼 데 걸어놓은 동공” “빳빳한 머리카락이 푯말처럼 / 서 있는” 공원의 침울하고 어두운 세계가 진정 살벌한 야생의 공간인 것이다.
자연을 점령한 인간의 사악한 욕망이 난무하는 세계 속에서 자연과의 진정한 교감은 이루어 질 수 없다. 원시적 생명력이 넘치는 자연과 격리된 인간, 자연마저 재단하고 인공화하려는 세속의 야만성은 불모화된 자연에 대한 반성적 시각을 보여준다.
4. 인간성 회복과 생명성에 대한 희구
서정시의 원류에는 인간에 대한 탐구의 정신이 내재한다. 그것은 인간됨의 현주소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자문하게 만든다. 오늘의 서정 양식은 결국 삶에 대한 문제가 무엇이며 그 문제적 현실을 어떻게 해결하고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모색인 것이다.
존재의 근원에 대한 뿌리 찾기의 과정으로서의 가족, 공동체, 역사, 전통에 대한 관심은 궁극적으로 현재적 삶을 보다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라 볼 수 있다. ‘나’의 정체성을 혈연의 관계와 공동체의 지평 속에서 확인하려는 시도는 본질적으로 ‘세계와 소통’을 의미한다. 관계에 대한 모색은 ‘소통의 의지’를 보여주는 실천적 의지이다. 이러한 관계성의 통로는 가족과 공동체적 의식 뿐 아니라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서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서정시의 힘은 ‘세계와 나’의 ‘소통 지향성’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소통을 통해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고, 단절된 역사와 조우하고, 죽어가는 자연과 인간을 되살려는 의지를 오늘의 서정시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서정의 위기를 말한다. 서정의 위기는 변화하는 세계에 전통 서정의 양식이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한다는 것에 기인한다. 하지만 2000년대 시단에는 여전히 서정시의 위력이 건재 한다. 소재와 형식에 대한 양식적 탐구의 다양성이 확대되었을 뿐, 자연과 인간에 대한 소통의 지향성은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오늘의 서정이 모순적 세계에 대한 반성이든, 이상적 세계에 대한 동경이든, 생명의 자연과의 교감이든 그 뿌리에는 끊임없이 나와 세계를 연결 지으려는 ‘소통의 의지’가 담겨있다, 이 소통의 열망이 서정시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일 것이다.
■ 강경희(姜敬姬) / 문학평론가
[계간《문학과현실》2010년 여름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