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홍일표의 좋은 시 찾아 읽기(22) - 주어진 길을 믿지 않는 시인

문근영 2014. 5. 1. 15:39

주어진 길을 믿지 않는 시인
홍일표의 좋은 시 찾아 읽기(22)
 
홍일표

낙타의 눈물
 
김성순


 
어둠이 내리면 몸 속 어딘가에서 낙타의 울음소리 들리고
  
게르 앞에서 나는 무릎 꿇고 비밀스런 의식을 치른다 
제단에 올릴 수 있는 건 마두금 연주뿐이므로 향은 노을빛이다 
예복을 걸쳐 입은 옥빛 바람, 당상집례로 홀기를 읽는다 아직도 사막 위를 부유 중인 새끼여

주술가처럼 광활한 초원 불러들인다 우주의 뱃속, 깊은 곳의 소리를 모아 바람이 부르는 노래 
삐걱거리는 몸 낙타의 호흡 가다듬으며, 떨어져 나간 너의 한 쪽 귀를 찾아 
구름의 행렬 길을 나서는 저녁
 
길을 믿지 않는 너, 오늘도 독수리로 
어느 죽음 파헤치다 깊은 산자락에서 발톱의 날 세워 쓸쓸히 어둠을 파고들겠지 
이제 평화롭게 불을 지피자 땅거미 지면 
 
이국의 숲에서 내가 걸어왔던 길들 사이, 네가 있었노라 
달빛 편지라도 띄울 때면 초원의 풀들은 살아 선한 눈빛으로 내게 안길까, 웅얼웅얼 울음통이 되어버린 사막 길
  
젖은 눈썹 사이 모래톱 숨은 홍예는 아스름 피어오른다
 
 -『현대시학』2010년 4월
 

시의 첫 행을 읽는 순간 몸 속 어딘가에서 낙타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낙타는 흔히 가혹한 고난과 고달픈 삶을 상징하지요. 그래서 낙타와 사막은 시와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익숙한 소재입니다. 근래에 글로벌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것이 노마디즘(Nomadism)입니다. 유목주의로 번역되는 노마디즘은 특정한 가치에 사로잡히지 않고 매순간 자신을 변혁하는 탈영토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목은 단순히 공간적 이동만 꾀하는 것이 아니라 척박한 환경을 새롭게 바꿔나가는 창조적 행위입니다. 김성순 시인은 「낙타의 눈물」에서 사막을 걷는 낙타를 통해 유목의 삶에 주목합니다. 고난과 갈증의 현장인 사막은 열악한 삶의 장소요 화자가 반드시 극복해야 될 대상입니다. 화자는 낯선 삶의 공간으로 이동하기 전 마두금 연주로 ‘비밀스런 의식’을 치르고, 사막과 대비되는 ‘광활한 초원’을 불러들여 ‘우주의 뱃속, 깊은 곳의 소리’로 내적 충일을 기합니다. 길 떠나기 전 의식이 끝나고 화자는 ‘떨어져 나간 너의 한 쪽 귀’를 찾아 장도에 오릅니다.
 

화자는 주어진 길을 믿지 않습니다. 유목민에게 모든 길은 낯선 길의 새로움을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온갖 고난과 역경을 딛고 독수리처럼 신생의 길을 열어가는 과정은 다름 아닌 죽음과의 외로운 고투입니다. 그 속에서 화자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험한 뒤안길을 발견하고, 낙타의 고단한 삶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달빛 편지라도 띄울 때면 초원의 풀들은 살아 선한 눈빛으로 내게 안길까’라는 간절한 염원을 갖고, 다시 ‘울음통이 되어버린’ 사막의 길을 걷습니다.
 

화자는 마침내 ‘젖은 눈썹 사이’로 피어오르는 무지개를 봅니다. 여기서 홍예는 무지개를 가리키는 말로 찬연한 삶의 징후요 현시이겠지요. 사막에 사는 유목민은 최악의 삶의 조건을 마다하지 않고 한 마리 낙타처럼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더 깊은 사막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 길은 곧 시인이 홀로 걸어가야 할 창조의 길이요 숙명의 길이겠지요. 창조란 불가능한 것들 사이로 자신만의 길을 열어나가기 위해 끝없는 고통과 싸워나가는 것이니까요.
 
그리하여 세상의 시인들은 자신의 내면에 불사의 낙타를 기르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시인들이 기존의 정형화된 시의 문법에 일정 부분 기대고 있습니다. 불가피한 과정이겠지만 기대고 있던 어깨를 과감히 떼어버리고, 팔과 손가락까지 잘라버릴 때 사막 너머의 세계는 홍예가 피어오르듯 가까이 다가오겠지요. 시의 길에서 만나는 무지개는 환상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 때 낙타시인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돌덩이도 안고 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내 몸의 일부가 되더라구요.”

 

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한국시인협회 기획위원)

- '문화저널21'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우가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