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과 열정으로 빚어낸 기행시집
오순택, 그곳에 가면 느낌표가 있다(아동문예사, 2007)
전병호
“국토는 인생의 교과서였습니다.”
책을 펼치자마자 머리말 제목이 눈길을 끈다. 시인은 지난 5년간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몇 권의 답사 관련 책과 노트, 그리고 카메라를 메고 집을 나섰다고 한다. 그래서 국토의 최남단 마라도에서부터 동쪽 끝 울릉도, 독도 그리고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는 최북단 신탄리역까지 시로 빚어내고 있다. 총 58편. 대단한 열정이다.
무엇이 이렇게 시인이 전국을 누비게 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국토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시인이 말하기를, 그동안 그냥 지나치기만 했던 서울 한복판 탑골 공원에는 국보와 보물, 여러 점의 역사 유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답사를 하면서 비로소 알았다고 한다. 248.5km에 이르는 휴전선에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조국 분단의 비애를 가슴 깊이 되새겼을 것이다. 그뿐인가. 담양 가사문화권은 송강 정철의 숨결을 듣기 위해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마다 찾았으며, 고산 윤선도의 얼이 녹아 있는 해남 녹우당과 보길도 세연정에서는 자신을 곰곰이 돌아보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시인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찾아가는 곳마다 퐁퐁 샘솟는 시심으로 시를 쓸 수 있었으랴. 소록도, 영랑 생가, 땅끝 마을 등 많은 곳은 시상이 잘 떠오르지 않아 두 번이나 찾아갔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땀과 열정으로 빚어낸 시집이라고 하겠다.
대개의 경우 시집에는 기행시가 몇 편씩 실려 있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시집은 처음부터 한 권으로 기획된 기행 시집이다. 이럴 경우 시인의 의도를 과도하게 노출시키다 보니 충분한 문학성을 획득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이 시집에서 그런 점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작품들이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오순택 시인은 1966년 시문학으로 등단해서 이미 문학적 역량을 인정받은 중진 시인이다. 그동안 그 겨울 이후, 탱자꽃 필 무렵, 남도사 등의 시집을 펴냈으며, 동시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창작에 몰두해서 풀벌레 소리 바구니에 담다, 산은 초록 삼각형이다 등 많은 동시집을 펴냈다. 그는 이 기행시집에서도 자신의 시적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를 읽는 일은 즐겁다.
선운사 동백꽃은
누나 입술같이
곱더라.
고운 입술에
봄빛 듬뿍 물고
배시시
웃고 있더라.
지난 겨울
싸락눈 먹고 자란
초록잎사귀가
저렇게 붉은 꽃 피웠겠지.
꽃이 지면 어쩌지.
붉은 동백꽃 똑똑 따며
봄이 가 버리면 어쩌지.
어디서 날아왔는지.
꽁지 몽땅한
새 한 마리
떨어진 꽃잎을
쪼아 먹고 있더라.
- ‘선운사 동백꽃’ 전문.
참 아름다운 이미지다. 선운사, 동백꽃, 누나 입술, 봄빛, 싸락눈, 초록잎사귀, 꽁지 몽땅한 새 한 마리가 어울리며 빚어내는 동백꽃 이미지가 읽는 이의 마음을 붉게 물들인다. 정말 ‘꽃이 지면 어쩌지’ 걱정도 된다. 동시의 독자를 꼭 어린이만으로 한정 지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른이 읽고도 동심에 흠뻑 젖을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동시일 것이다. 이 시는 초등학교 중학년 이상 고학년 어린이들이면 충분히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알까? 이것이 사실은 시인의 마음에 비추어진 동백꽃인 것을! 동백꽃을 통해 표현해낸 시인의 아름다운 마음인 것을! 시를 읽음으로써 독자는 선운사 뜰에 서서 직접 동백꽃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것이 기행시의 참맛이 아닐까? 이 시를 읽은 어린이는 언젠가 어른이 되면 동백꽃 붉은 이미지를 떠올리며 선운사를 찾게 될 것으로 믿는다.
5월 하순
모란꽃, 그 환한 모습 보러
강진에 갔습니다.
꽃물 묻은 돌담 돌아
열린 대문 들어서면
방문 열어놓고
오늘도 시 쓰고 있는
시인 영랑.
시 쓰는데 조용히 해야지
발걸음 소리 죽여
장꽝 곁에 서면
모란도 조용조용 지고 있었습니다.
시 쓰다 목 마르면
새암물 길어올려 한 모금 마셨겠지요.
사랑채엔 누가 왔다 갔는지
방문 고리가 손에 잡힐 듯 했습니다.
햇볕 따스한 5월 하순
모란, 그 빠알간 꽃잎 위에
눈인사하고 돌아오는 길은
내 마음 속에도 꽃물이 들었습니다.
- ‘모란꽃 피는 것 보고 싶어서’ 전문.
영랑 시인이라고 하니까 선뜻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생각난다. 이 시는 한국인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명시이지만 아직 읽지 못한 어린이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영랑 생가를 찾기 전에 미리 이 시와 시인의 삶을 알아보고 찾아간다면 어떨까. ‘방문 열어놓고/ 오늘도 시 쓰고 있는/ 시인 영랑.’을 볼 수 있을 것이며, ‘발걸음 소리 죽여/ 장꽝 곁에 서’야 하는 이유도 알게 될 것이다. 또 시인이 ‘장꽝’, ‘새암물’ 등 아름다운 우리말을 살려 시를 쓴 까닭도 짐작하게 될 것이다.
해외 여행객이 이미 오래 전에 1,000만 명을 넘어선 시대이다. 그러니 국내 여행객은 어찌 다 일일이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지금 우리의 여행 문화는 과연 바람직한가. 이런 점을 돌이켜보면 반성할 점이 참 많다고 생각된다. 지금 우리는 ‘겉’ 모습만 보는데 익숙해 있다. 이젠 웬만한 것을 보아서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마음에 차지 않는다. 아마 무엇으로도 ‘겉’모습만 보는 그 눈을 충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안’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겉보기에는 허름한 초가집일지라도 그 집에 누가 살았으며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위인의 숨결과 생각을 생생히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여행의 참뜻일 것이다. ‘모란, 그 빠알간 꽃잎 위에/ 눈인사하고 돌아오는’ 내 마음에 ‘꽃물’이 든 것은 ‘안’을 들여다보는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기행시는 ‘안’을 들여다보는 여행을 떠나게 한다.
사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시적 긴장이 좀 느슨한 편이다. 대체로 길이도 길다. 여행지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시인이 독자를 위해 베푼 배려는 또 있다. 그것은 시인이 직접 찍은 사진을 작품마다 배경으로 수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진을 보며 시를 읽으면 현장감이 더욱 생생하다.
-아빠,
이 기차 타고 가면
백두산까지 갈 수 있어요?
경원선 기차를 타고 가며
꼬마가 물었습니다.
북녘을 향하여 달린 기차는
동두천, 한탄강, 대광리 역을 지나
민통선 눈앞에 둔
신탄리 역에서 멈췄습니다.
쪼그만 역 하나
거기 기다림처럼 서 있었습니다.
땅 끝도 아닌데
기차는 더 가지 않았습니다.
-아빠,
기차가 왜 가지 않지요?
아빠 따라온
눈이 큰 아이가 물었습니다.
다음 역 알리는 입간판엔
역 이름은 지워진 채
화살표만 북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빈칸 메우기 게임하듯
|
( )← 철원 |
적어넣고 싶었습니다.
- ‘빈칸 메우기’ 전문
신탄리역은 현재 남한에서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가장 북쪽에 위치한 역이다. 신탄리역의 사진을 보며 시를 읽으니 문득 나도 신탄리역에 가고 싶어진다. 그때서야 문득 이 동시집의 제목이 그 곳에 가면 느낌표가 있다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된다. 나도 그곳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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