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재미있는 시평 - 화본역 / 박해수 - 신광철 시인

문근영 2014. 5. 1. 15:39

<재미있는 시평>

 

 

 

신광철

 

화본역

 

 

-박해수

 

꽃 진 물자리, 젖꼭지 달렸네

자다 잠 깬, 꽃물 든 목숨이네

선 자리 꽃자리

꽃 뿌리 눈물 뿌리

방울새 어디 서서 우나

배꽃, 메밀꽃, 메꽃

배꼽 눈 보이네,

배꼽도 서 있네

녹물 든 급수탑

억새풀 고개 숙인 목덜미

눈물 포갠 기다림,

설렘은 흰 겨울 눈꽃에 젖네

어머니 젖꽃 어머니 젖꽃

젖꽃 실뿌리, 실, 실, 실, 웃는 실뿌리

오솔길, 저녁 낮달로 떴네

어머니 삶 꽃,

젖빛으로 뜬 낮달

오솔길 꽃 진 길 가네

산모롱, 굽이 굽이 돌아

돌아누운 낮달 따라 가네

낮달 따라 꽃 진자리 찾아 가네 

 

 

바다의 시인, 간이역의 시인

 

기차가 서지 않는 역, 간이역. 역으로서는 이미 추억으로 꽃대를 세우는 역의 이름입니다. 추억이 꽃으로 피는 역이지요. 적막한 산골 가게를 찾아오는 나그네처럼 기차가 드문드문 섰다가 갑니다. 간이역은 물건의 내용, 형식이나 시설 따위를 줄이거나 간편하게 하여 이용하기 쉽게 한 역이지요. 역무원이 없어도 기차는 서고 기차는 사람을 태우고 떠나갑니다. 홀로 기다리다가 기차가 오면 표도 끊지 않고 타는 곳이 간이역입니다. 낭만이 포폴 나립니다. 버리면 찾아오는 것이 있어 좋습니다.

된장국이 바글바글 끓듯 생활에 복작대던 역에 사람들이 잦아들기 시작합니다. 하나 둘 도시로 떠나간 사람들 때문에 시골 역은 비어갑니다. 비어간 자리에 들어서는 적막과 그리움이 고스란히 추억으로 일어서는 곳이 간이역입니다. 역무원이 없고 정차만 하지요. 잃은 후에 생의 의미를 깨닫듯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얻었습니다. 살아있음을 찬양하기에는 당장 닥친 아픔이 걸음을 멈추게 하지만 아픔도 꽃이 되고 눈물도 꽃이 되는 역이 간이역입니다.  

아이의 웃음이 함박꽃처럼 아름답습니다. 맑고 투명한 웃음이지요. 더 아름다운 웃음이 있습니다. 눈물을 건넌 웃음이지요. 눈물 속에 소금이 들어있음은 견디라는 암시인지도 모릅니다. 고난을 겪어보지 않은 인생은 반만 산 인생입니다. 축제 뒤에 적막까지를 합해 놓은 것이 축제지요. 간이역을 알기 위해서는 인파로 넘치는 도시의 역을 이해한 후에야 간이역은 숨통을 열고 호흡하기 시작합니다. 여행의 목적지는 마음 안에 등불 하나 켜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불을 밝히는 일이 중요하지만 마음 안에 불을 밝혀야 방황하는 어두운 밤에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음 안에 불 밝히는 발전소를 하나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박해수 시인은 간이역에 대한 시를 864편 지었습니다. 역에 미친 시인입니다. 정말로 장한 일을 한 게지요. 세상 살면서 미치지 않고 살면 제대로 산 게 아닙니다. 시에 미치고 역에 미쳐 사는 시인인데 특히나 간이역에 미쳐 사는 시인입니다. 시인이 시에 미쳐 사니 아름다운 동화 한 편입니다. 박해수 시인은 하루에 시 세 편을 짓는 것이 바람이라고 하더군요. 하루에 밥 세 끼를 축내는 도둑이니 적어도 시 세 편은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필 장소도 남다른 면이 있습니다. 주로 자동차로 이동 중이거나 기차에서 시를 쓴다고 합니다. 시상이 동적인 장소에서 떠오르는 것을 보면 박해수 시인은 유목민의 후손임이 틀림없나 봅니다. 화본역이라고 있습니다. 화본역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전국적으로 현재 남아있는 간이역은 800여 개. 그나마도 폐쇄되거나 철거되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간이역에 서면 어쩐지 시간이 멈췄다 흐르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역이지만 기차가 서지 않는 역이기 때문입니다.

 

꽃 진 물자리, 젖꼭지 달렸네

자다 잠 깬, 꽃물 든 목숨이네

선 자리 꽃자리

꽃 뿌리 눈물 뿌리

방울새 어디 서서 우나

배꽃, 메밀꽃, 메꽃

배꼽 눈 보이네,

배꼽도 서 있네

 

간이역 「화본역」이라는 시의 첫머리입니다. 이 시는 이미지의 징검다리로 만들어진 시여서 이미지를 따라가야만 겨우 시인의 의도를 눈치챌 수 있습니다. 연상기법으로 만들어진 시여서 앞줄의 시어를 이해하고 다음 줄로 가야만 시가 하나의 커다란 완성을 위하여 가는 과정을 이해하고 화본역의 진가도 만나게 됩니다. 시에서는 화본역의 풍경이나 정황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어째 감이 팍 오지 않습니다. 상징적인 단어들이 중첩되면서 현상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확대됩니다. 화본역이라는 현실과는 격리된 추상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덕분에 시가 확장되면서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가능하게 되지요.

서정에 감성만 담겨 있으면 시가 어려워집니다. 상황파악이 잘 안 되거든요. 그림이 그려져야 하는데 시인의 감성과 서정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면 독자는 난감해집니다. 감성의 징검다리를 하나씩 건너다보면 시인의 마음이 보이겠지요. ‘꽃 진 물자리, 젖꼭지 달렸네 / 자다 잠 깬, 꽃물 든 목숨이네  / 선 자리 꽃자리 / 꽃 뿌리 눈물 뿌리’ 선문답이라는 말 아시지요.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들끼리 진리를 찾기 위하여 주고받는 대화를 말합니다. 선문답이라는 말에는 말이 안 통한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그만큼 어렵고 높은 경지의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감성의 선문답 같은 시어들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가 논문처럼 증명하고 논리의 체계를 쌓을 필요야 없겠지요. 하지만 분명 시의 제목과 연관성은 확인할 수 있어야 간이역의 시로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다음 연을 볼까요.

 

녹물 든 급수탑

억새풀 고개 숙인 목덜미

눈물 포갠 기다림,

설렘은 흰 겨울 눈꽃에 젖네

어머니 젖꽃 어머니 젖꽃

젖꽃 실뿌리, 실, 실, 실, 웃는 실뿌리

   

<녹물 든 급수탑>이라는 문장 외에는 여전히 이미지만을 전달하는 시어들로 다리를 놓고 있습니다. 별자리를 여행하듯 우리는 상상의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습니다. <눈물 포갠 기다림>이나 <설렘은 흰 겨울 눈꽃에 젖네> 같은 기막힌 문장이 시의 완성도를 받쳐주고 있습니다. 급수탑이 없다면 화본역과의 연관성을 끄집어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시가 가진 강한 흡인성 때문에 중독되는 것을 느낍니다. 중독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옥 마당에 놓은 각기 크기가 다르고 제 멋에 겨운 모양의 디딤돌처럼 다른 상징들을 기가 막히게 엮어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앞에 핀 꽃이 뒤에 핀 꽃에게 바람의 모습을 설명하고 뒤에 핀 꽃이 그 뒤에 핀 꽃에게 형상도 없는 바람을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아름다운 시어에 젖어가고 있습니다. 「화본역」은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그리고 상상력이 상상력을 잇고 서로 상생의 다리를 만들어가며 절묘하게 연상적용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박해수 시인은 몽환의 징검다리를 만들었습니다. 징검다리를 아름답게 만들어 환상의 화본역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설명도 묘사도 없이 시인의 상상력에 담겨진 언어들로 추상화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추상화의 아름다움은 시인의 세계를 그려내는 것이겠지만 구체적이지 않은 점 때문에 상상력에 날개를 달게 됩니다. 「화본역」이라는 이 시가 가진 특징적인 면입니다. 시의 비구상화라고 할 수 있는 게지요.  

 

오솔길, 저녁 낮달로 떴네

어머니 삶 꽃,

젖빛으로 뜬 낮달

오솔길 꽃 진 길 가네

산모롱, 굽이 굽이 돌아

돌아누운 낮달 따라 가네

낮달 따라 꽃 진자리 찾아 가네

 

시가 참 곱고 아름답습니다. 꿈을 꾸어도 죄가 되지 않는 시의 나라에서 빛나는 무지개를 놓고 있습니다. 안내판이 없어도 낮 달을 따라가면 되는 환상의 길입니다. 길 없는 길을 걸어보세요. 내가 걷는 길이 그대로 길이 됩니다. 길을 잃어야 내 길을 찾을 수 있다니까요. 길은 마음에서 발원하는 것임을 길을 잃고 나서야 깨닫는 것입니다.  

 

상상의 징검다리를 건너야 만나는 화본역

 

화본역에는 하루에 상행 두 번, 하행 두 번 총 네 번 열차가 정차합니다. 하루 평균 이용객은 승하차 모두 합쳐 40여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역 앞에 역전상화가 있습니다. 어느 역에서나 볼 수 있는 역전상회라는 이름에는 기다림이 담겨 있습니다. 하루에 네 번 서는 기차를 기다리는 역이어서지요.  

박해수 시인은 간이역에 대한 사랑이 남달라 ‘간이역 시인’으로 통합니다. 사라지는 것들은 모두 향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움이라는 향기지요. 정지된 풍경 속에 기차가 바람을 가르며 다가오지만 서지 않고 지나가는 역 화본역. 이별이 아름다운 역이리라 생각됩니다.

박해수 시인은 처음에는 ‘바다의 시인’으로 불렸습니다. 이름 탓도 큽니다. 해수海水, ‘바다 해’와 ‘물 수’를 이름자로 쓰고 있습니다. 시도 바다와 연관된 시를 주로 썼습니다.  ‘바다에 누워’ ‘서 있는 바다’ ‘바닷가 성당에서’ 등 시집의 주류가 바다였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잉태하는 곳, 모든 생명들을 창조하는 곳이 바로 바다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거기에다 1974년 한국문학 신인상 당선 작품인 「바다에 누워」가 1985년에 대학가요제 대상을 받게 되면서 대중들에게 ‘바다의 시인’으로 각인됩니다. 박해수 시인은 자신의 시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 시집 속에서는 모두 바다가 출렁입니다.’

박해수 시인이 ‘간이역 시인’이라는 별칭을 듣게 된 것은 2000년대 이후부터였습니다. 간이역 시인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 박해수 시인의 발언을 직접 들어보시지요.

 

1938년에 어머니가 남겨 놓으신 사진 한 장이 저에게는 큰 영향을 줬어요. 그걸 본 이후로 간이역을 떠돌면서 시를 쓰게 됐거든요. ‘철로에 서 있는 부평(浮萍)의 마음을’ 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는데…. 간이역 시인이라 불리게 되는 것은 2000년대에 오면서부터입니다. 1938년 어머니가 남겨놓은 사진 한 장 ‘철로에 서 있는 부평(浮萍)의 마음을’ 보며 간이역을 떠돌며 시를 쓰게 되었지요. 그러다보니 대구문화방송에서 ‘경부철도 100년, 현대시 100년’을 기념하면서 간이역마다 제가 지은 시로 시비를 세워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확실히 ‘간이역 시인’이라는 이름을 달게 된 거죠. 

 

속도의 시대와 느림의 시대를 동시에 만나게 해주는 역이 간이역입니다. 박해수 시인은 역들을 답사하면서 역마다 느끼고 본 내용을 시로 만들었습니다. 864수의 시가 만들어졌습니다. 시는 묶여 시집으로 탄생했는데 시집 이름이 극적입니다. 「죽도록 그리우면 기차를 타라」「죽도록 외로우면 기차를 타라」「기차가 네 몸속으로 들어갔다」등이 있습니다. ‘죽도록’이라는 수사가 극적인 상황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간이역에 대한 애정이 깊어서겠지요. 역 순례 시집은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입니다. 또한, 박해수 시인은 북한역 80개를 대상으로 시 만들기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고모역에 가면

옛날 어머니의 눈물이

모여 산다

 

<박해수 시인의 「고모역」 앞 부분>

 

고모역에는 어머니의 눈물이 모여 산다고 합니다. 삶에는 반갑지 않은 친구가 있습니다. 애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물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웃음을 반기지만 눈물을 배우지 못한 웃음은 공허합니다. 역은 이동수단인 기차와 버스가 잠시 머무는 곳입니다. 기차가 들어와서는 것은 내리고 타기 위해서지요.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 중 하나도 슬픔과 기쁨을 함께 만나야 진정 산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애환이 함께하는 삶이라고 합니다. 애환哀歡은 슬픔과 기쁨입니다. 슬픔과 기쁨은 삶을 이야기할 때 그만큼 자연스럽고 삶과 긴밀하게 밀착된 단어입니다. 하나만을 가지는 것은 삶의 이해에 있어 불구지요.

저는 유네스코 문화재 취재를 위하여 경주로 가는 길에 박해수 시인을 잠시 만났습니다. 김영태 시인과 함께 만났습니다. 한비문학 발행인인 김영태 시인이 매운탕을 샀습니다. 굳이 먼데서 온 손님인데 자신이 사야한다며 계산하더군요. 가난한 시인에게 매운탕과 소주를 얻어먹어 미안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박해수 시인의 간이역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삶도 지구라는 별에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우리가 맞은 오늘이라는 날도 결국은 시간의 간이역이거든요. 오늘이라는 간이역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이란 시간의 간이역에는 역동성과 직접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모든 인생은 오늘이라는 역에서만 만들어집니다. 유일한 현실적 실행의 시간장소가 오늘이지요. 애초에 간이역이 아니었습니다. 간이역이 되기 전에는 생활이 북적대던 곳이었겠지요. 오늘이란 아름다운 축제의 날에 박해수 시인과 김영태 시인 그리고 저는 대구의 골목에 위치한 매운탕 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였습니다. 소주 안주로 박해수 시인은 간이역마다 다른 아름다움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이 시로 태어나는 박해수 시인의 영혼에도 간이역 하나 지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비가 내리는 경주에서 경주로 가야했습니다. 박해수 시인의 시를 만나 흐뭇한 날이었습니다. 간이역마다 가진 아름다움에 대하여 박해수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려놓고 갑니다.

 

김천 직지사역 주변은 포도밭이에요. 그런데 포도밭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있어요. 화본역 부근의 길들도 제 눈에는 정취가 넘치고, 우보역 주변은 봄에 딱 좋은 곳이에요. 팔공산 줄기 따라 봄꽃들이 환영 인사 건네는 것 같이 보여요. 벚꽃, 개나리, 진달래는 물론이고 이름 모를 야생화들의 향연이 펼쳐지거든요. 거기다 방울새 울음소리까지 들려오면 그게 심장을 톡톡톡 건드려요.

영천의 화산역은 옛날에 꽃으로 가득 찬 산이었는데, 이제는 그 모습은 볼 수 없어요. 조용하고 한적하고 고즈넉한 시골역인데 폐쇄됐어요. 마음이 아프지요. 낙동강을 끼고 차례로 문경역, 상주역, 점촌역, 용궁역이 이어져요. 어디 하나 아름다움을 버릴 곳이 없어요. 사랑하는 만큼 보이고 마음 가는 만큼 아름다움이 쌓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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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우가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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