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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남구의 작품 세계 - 노자의 벌레-오남구 시전집을 중심으로 / 방민호

문근영 2014. 5. 1. 15:38

평론 | 오남구의 작품세계 / 방민호
어느 동학교도가 걸어간 길, 그 방법론 ―《노자의 벌레-오남구 시전집》을 중심으로
[47호] 2010년 11월 08일 (월) 방민호 문학평론가

1.

   
오남구(1946-2010)

오남구 시인의 시전집이 《노자의 벌레》(글나무)라는 이름으로 올해 초 간행되었다. 1975년에 펴낸 《동진강 월령》부터 마지막 시집인 《빈자리》에 수록된 시들을 수록하고 여기에 작고할 때까지 쓴 시들을 합쳐 놓은 것이다. 1946년생인 그는 2010년 3월 24일에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 전집의 간행 날짜는 올해 3월 25일이다.

이것은 시인 자신이 이 전집을 위해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음을 의미한다. 전집에 수록된 〈느낌표〉라는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시 전집의 끝장을 넘기고/ 퇘! 침을 뱉는다/ 시의 느낌표를 뱉는다” 여기서 침을 뱉는다는 행위는 김수영의 〈눈〉에 나오는 기침 행위와 다르면서도 유사한 기능을 한다. 그것은 자신의 더러운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의 진수를 말한 것에 가깝다. 더러운 것처럼 묘사했지만 사실은 그것이 생명이 내놓는 자신의 존재증명인 것이다.

그는 “봉인하듯”(〈느낌표〉) 전집 원고까지 다 만들어 놓고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한 생애 동안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빛나는 시적 이력을 쌓아 놓지는 못했고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던 한 시인의 삶이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그런데 그런 그가 남긴 전집은 그것을 읽는 사람에게 독특한 감동을 베푼다. 그가 남긴 전집의 시들은 시집이 간행된 역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앞에 수록된 시들이 처음 것보다 더 어렵다면 어렵다. 그것은 이 글에서 잠시 분석해 보게 될, ‘탈一관념’의 시라는 그의 독특한 시 창작 방법론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유작들은 깊은 울림을 가지고 다가온다. 그것은 생의 마지막 국면까지 삶을 생생하게 인식하고자 했던 시인의 태도 때문이다. 그가 남긴 마지막 시들에는 투병생활을 하는 그 자신의 모습, 자신의 눈에 비친 자연의 모습, 사람들과 도시의 모습 같은 것이 모두 디지털카메라에 찍힌 사진처럼 선명하게 인화되어 있다.

봄이 오는데…… 왠 낯선 사람이 거울 속에서 봄을 기다립니다 굴러가지 않는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텅 빈 거울 속에서 앉아 있습니다 거울 속은 영 봄이 올 것 같지 않습니다만 낯선 사람이 혼자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봄을 맞으러 열심히 달리고 있습니다 문득 문득 떠오르는 얼굴들이 곧 스러지고 눈도 코도 없는 밋밋한 해가 어깨에서 집니다 낯선 사내는 하루 종일 거울 속에 갇혀서 꼼짝 못하고 있습니다 거울 밖은 봄이 오는데

―〈낯선 사람〉 전문

족두리봉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진달래꽃 사태에 내 몸 향에 묻는다. 향로봉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철쭉꽃 사태에 내 몸 눈물에 묻는다. ―입산 치료 중― 결가부좌하면, 산길 환한 세상 진달래꽃 속을 떠돌고 철쭉꽃 속을 떠돌고 안개 속 서오릉의 능선길을 걷는다. 아늑히 돌아서 나오는 후미진 공터에 쑥이 자란다. 간밤 봄비에 쑥쑥 자란 쑥, 어느새 내 공포 두려움이 쑥 쑥 자란 쑥, 지팡이를 놓고 쑥을 뜯는다. 땅에서 쑥쑥 솟아오는 울음! 쑥을 뜯는다. 산 아래 쑥국! 쑥국! 애간장을 녹이고 쑥국새 운다. 아침, 아내가 끓이는 정성 쑥국 향에 묻는다.

 ―〈쑥국〉 전문 

   

위에 인용한 두 편의 시는 시인의 마지막 투병생활을 그린 것이다. 이 시들은 시에서 절대적인 권좌를 차지하고 있는 수사학의 힘을 보여준다. 〈낯선 사람〉에서 시인은 자신을 가리켜 “굴러가지 않는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텅 빈 거울 속에서 앉아” 있는 사람으로 표현한다. 봄을 맞아 산야에 돋아난 쑥을 가리켜 “어느새 내 공포 두려움이 쑥 쑥 자란 쑥”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제 시인에게 시간이나 인생은 더 이상 굴러가지 않는 자전거가 되어 버렸고, 생이 마지막 국면에 다다랐다는 공포, 두려움은 산야의 쑥이 되어 돋아난다.

그 표현도 생생하지만 이 구절들을 포함하여 시 전체가 드러내는 상황 역시 사진처럼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것을 가리켜 저 소설가 박태원의 이름을 빌려 ‘카메라 기법’에 견줄 수도 있을 것이다. 박태원은 장면과 사태를 객관화시켜 보여주고자 한 의욕 때문에 《천변풍경》의 ‘카메라 기법’을 고안했었다. 오남구 시인은 생의 마지막 종착역을 앞에 두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의 모습을 생생하게 포착해 두려 한다. 다음의 시는 그러한 의도를 잘 보여준다.

북한산의 계곡 점! 점! 점! 핑크 물감을 찍는다 회색 배경 수많은 진달래가 피어나서 얇은 날개를 펴며 공중에 뜬다 아득히 작은 웃음소리 깊은 계곡 증폭되었다가 소멸하고 얼핏 바위 사이의 낮달 얼굴을 내밀었다가 사라진다 급히 카메라 클로즈업! 한점 바람에 진달래 날개를 가냘프게 흔들고 계곡에 핑크 글자를 마구 떨어뜨린다 나는 글자들 속 정신없이 날아다니며 가까이 더 가까이 날아 꽃술에 눈 맞춘다 싱싱한 숨결 코끝이 닿아 핑크 물이 들고 찰칵 찰칵 계속 사진을 찍는다 일순 번쩍번쩍 먼 지구 저쪽 사이버 공간에서 핑크 글자를 마구 떨어뜨린다 계곡에 누드 낮달이 누워 있다

―〈핑크 글자〉 전문

진달래 꽃잎을 “핑크 글자”라고 표현한 것은 얼마나 선명하면서도 새로운가! 아마도 시인은 눈을 깜박일 때마다 감각적 인식의 카메라 셔터를 “정신없이” 눌러 댔을 것이다. 진달래 꽃비 내리는 그 생생한 삶의 현장을 있는 그대로 찍어 생명의 하드웨어에 저장해 두고 싶어 했던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2.

그런데 이 ‘카메라 기법’은 시인 자신이 오랫동안 전심을 기울여 고안해 온 시적 방법론에 따른 것이기에 더욱더 음미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마지막 시집이 된 제5시집 《빈자리》(2008. 1, 글나무)의 〈머리말〉을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빈자리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물과 관계를 지으며 의미가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 주목하고 그래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맨 처음 사물을 인지하는 시점인 관념의 제로 포인트를 ‘탈一관념’으로 보고 그 시 쓰기의 방법을 찾는다.

여기서 시인은 세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사물의 의미가 시간에 따라 변해 간다는 것, 다른 하나는 자신의 시는 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관념의 제로 포인트를 찾아내려는 노력이라는 것, 마지막 하나는 바로 이것이 ‘탈一관념’의 시라는 것. 이러한 맥락에 따르면 “빈자리”란 곧 “탈一관념”의 시공간이 된다.

이 ‘빈자리’는 시인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찾아낸 것이며, 장차 이곳에 의미가 차례로 쌓이게 될 곳이다. 그래서 시인은 “탈一관념해 버리면 관계를 짓는 장소 상황만 있는 빈자리의 텍스트만 남는다”고 썼다. 오남구 시인의 이러한 시론은 음미해 볼 만한 점이 있다.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면서 ‘의지적 기억’과 상반되는 ‘무의지적 기억(m켌moire involontaire)’을 통해서 자신 삶의 기억을 총체적으로 기록하려 했다. 그것은 지성이나 이성으로는 환기되지 않은, 어떤 냄새나 맛 같은 것에 의해서나 소급해 돌아갈 수 있는 원천적인 기억의 세계다. 또 최근에 필자는 소설가 김영현 씨를 만났는데 그는 최근 2년 동안에 걸쳐 집필하고 있는 에세이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자연 시간과 생명의 시간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운동으로서의 시간과 변화로서의 시간으로 정리해 놓았다고 한다.

생철학자로 알려진 베르그송의 지속의 개념이나 순수 기억, 프루스트의 ‘무의지적 기억’ 같은 것은 시간과 지성의 작용에 의해 ‘오염’되기 전의 원래 형상을 찾아보려는, 그럼으로써 현대적 자아의 자기 동일성을 새롭게 구성해 보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오남구 시인의 ‘빈자리’ ‘탈一관념’ 역시 그와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오 시인은 이러한 시학을 현대과학의 총아인 유전공학에 빗대어 시인과 독자의 관계를 새롭게 수립하는 쪽으로 확장시킨다.

유전공학은 인류의 꿈이다. 시에 있어서도 줄기세포의 배양이 가능한가? ‘빈자리x’에서 작가의 의미 x를 소거(탈一관념)하고 그 빈자리에 독자의 의미 x를 집어넣는 것은, 난자에서 염색체를 빼어내고 다른 염색체를 집어넣는 유전공학과 흡사한데, 텍스트가 독자에게 수용됨으로써 x를 소거한 그 빈자리에 제각기 ‘체험에 따라 의미(관념)’가 발생한다면, ‘빈자리x’는 시에 있어서 줄기세포에 비유될 수 있다. 빈자리의 텍스트는 시인이 쓰고 의미는 독자가 만든다.

시인이 만약 관념을 벗어버린 텅 빈 기억 또는 경험의 자리를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을 읽는 독자들은 그것에 각자의 의미의 집을 지으리라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언어의 창조란 가능한 것일까? 텍스트를 읽는 이가 그것에 관해서 저마다 다른 의미를 축조해 나간다는 것은 독자반응비평 이래의 상식이다. 그러나 그것 말고 시인이 독자들에게 어떤 물상에 관한 순수 경험과 기억의 자리를 제시하고 그들로 하여금 저마다 다른 의미를 생성하도록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문제가 될 것이다.

오남구 시인은 자신의 시론을 위한 터전을 영상, 곧 이미지에서 찾는다. 이미지 스스로는 나타날 뿐 명료한 의미를 형성하지 않는다. 그림의 독해는 그림을 보는 사람들 저마다 다르다. 이미지는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만나는 최초의 접점에서 저마다 다른 의미를 생성하도록 한다. 그는 “시인이 추상적으로 관념을 말해 버리면 영상은 떠올릴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직접 관념을 말하지 않고 관념의 형성 이전인 인지 단계의 개념, 또는 사물을 묘사하여 동영상을 보여준다”고도 했다.

〈백남준의 연주〉라는 제목을 가진 ‘서화동행(書畵同行)’의 시는 이런 시론에 대한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여기서 시인은 백남준의 퍼포먼스 영상을 사진으로 제시하고 이에 대한 독자적 해석의 여러 가지 가능성을 보여주려고 했다.

연주한다, 아니다, 백남준은

바이올린을 맨땅에 끌고 간다

기자는 이 순간 렌즈를 통해서

질질 끌고 가는 바이올린을 읽는다

 레지던트는 신경정신과의 창가에서

질질 끌고 가는 강아지를 읽는다

나는 시를 쓰다가 눈을 감고서

질질 끌고 가는 연주를 읽는다

깨뜨린다, 활로 연주하는 방법

‘참’인가, 이 연주 소리는?

귀 기울이며 가고 있는 백남준

그는 “이 소리도 아닙니다”

한마디 하고 훌쩍 사라졌다

―〈백남준의 연주〉 전문

과연 하나의 영상, 곧 이미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이해된다. 기자는 기자 직업을 가진 사람답게 그것을 축자적으로 읽을 것이요, 신경정신과 레지던트는 바이올린을 끌고 가는 사람에게서 강아지를 끌고 가고 싶어 하는 충동을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시인 자신의 해석까지 포함한 그 모든 독해에 대해 정작 백남준 자신은 “이 소리도 아닙니다” 하고 모든 것을 ‘공(空)’으로 돌린 후 사라져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도대체 오남구 시인은 이러한 ‘탈一관념’을 무엇 때문에 시도했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삶을 매 순간 새롭게 보는 시각을 획득하기 위한 방법론이었을 것이다. 〈푸른 가시 짐승―빈자리 x〉는 매 순간의 삶을 청신한 감각 속에서 살고자 했던 시인의 마음이 묻어나는 시다.

간밤, 회색 담장 ‘회색’을 헐고 푸른 울타리 ‘푸른’을 세웠다 반짝이는 인동의 사금파리 ‘반짝’을 빼고 가시장미 ‘가시’를 올렸다 갑자기 ‘푸른 가시’ 짐승이 나와서 달빛을 갈가리 찢고 온밤을 으르렁댔다 다시 ‘푸른’을 밀고 가시장미 ‘가시’를 내리고 비워 둔 빈자리 x, 아침, 울타리에 구름 한 쪼각 앉아서 쫑긋 꼬리를 들었다가 사라진다 ―〈푸른 가시 짐승―빈자리 x〉 전문

3.

여기까지 써 내려온 필자에게는 지금 한 가지 난제가 남아 있다. 오남구 시인의 ‘탈一관념, 빈자리’의 시학이 과연 어디서 왔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을 전라북도 부안 태생으로 집안 대대로 동학교도였던 시인의 내력에 비추어 해석해 볼 수는 없느냐. 이렇게 보았을 때 떠오르는 것이 바로 〈약수터에서 수운을 만나다〉 〈다시 백산에 가면〉 〈봉황각〉 〈다시 손병희〉 등 동학의 세계에 접맥된 시들이다. 이 시들은 오 시인의 원천 세계인 동학으로 필자를 이끌어 간다.

오남구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인 《딸아, 시를 말하자》(2000.4, 다층)의 〈자서〉에서 시인은 자신의 이번 시집이 1989년 이후 2000년 1월까지의 작품들을 정리한 것으로 ‘탈관념 문학’을 정리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어 썼다. “나이 쉰이 넘도록 산에 들락거리며 심학(心學)을 하고, 명상하는 가운데 얻었던 영감적인 것들이 많다.” 이러한 언급은 오 시인의 창작 말기에까지 연장된 ‘탈一관념’이 “심학”에 뿌리박은 것임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이 “심학”이란 무엇인가.

《딸아, 시를 말하자》를 통해서 보면 이 “심학”은 “깨끗하고 가장 아름다운 공”을 만드는 일, “심상이 관념의 벽인 천장도 뚫”어 버리는 일로 통한다.(〈탈관념―시로 쓰는 시작론 7〉) 또한 그것은 “태양을 마음에 그”리고 그 “태양을 향해서 몸이 둥둥 떠”가도록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감각여행―시로 쓰는 시작론 3〉) 즉 그것은 마음의 힘을 믿고 마음의 작용이 삶의 본질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허황된 마음의 작용을 믿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그것은 이 마음을 통해 ‘나’ 자신을 우주적인 본체에 연결시키려는 실천적 행위다. 다음의 시는 이러한 시인의 생각을 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육신에 마음이 있듯

나와 우주는 전체가

하나의 생명체로서

우주에도 마음이 있으니

그 마음이 신이다

그러니 곧 내 마음이 신이요

신의 마음이 내 마음이다

마음이 흐트러지면

신도 흐트러진다

―〈우주는 생명체―시로 쓰는 시작론 11〉 전문

이처럼 ‘나’와 ‘우주’를 “하나의 생명체”로 연결시킨 위의 시는 동학의 세계관을 표현한 것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주지하듯이 동학, 곧 천도교는 천지만물을 우주의 본체인 한울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만물은 한울에서 나와 한울로 돌아간다. 때문에 사람도, 짐승도, 초목도, 바위도 모두 그 근본에서는 평등하며 그들 각자는 내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내적, 유기적인 유대를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의 본질에 근접해 갈 수 있으며, 자기 자신과 타자를 함께 존중하는 평등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이 평등한 인식 세계 속에서는 아이도 어른과 같이, 여성도 남성과 같이, 상민과 노비도 양반과 같이 존귀하다.

이 모든 존재자들은 모두 한울의 서로 다른 표현들이며, 한울에서 나와 한울로 돌아가는 한울과 같은 존재다. 이 모두가 한울의 유기적 일부분인 것이다. 위의 시에서 “내 마음이 신”이고 “신의 마음이 내 마음”이라 한 것은 이를 가리켜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다. 다른 곳에서 그는 “문단에 갓 나온 무렵 나는 평등이라든가 공존 등의 존재의 언어에 무척 매료되어 있었고, ‘나’와 ‘너’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인간, 그리고 그 인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딸아 시를 말하자》 〈자작해설〉)라고 다소 고백적인 어투로 동학적 사유의 영향력을 밝혀 놓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은 그의 시에 몇 가지 특징을 부여한다. 첫째 그것은 사물을 투명하게 인식하려는 태도를 낳는다. 그 결과 마음의 눈을 맑게 씻어 현상의 빛에 가려진 사물의 본질을 살피고 그럼으로써 버려진 것, 하찮은 것에서도 가치를 발견하려는 노력이 펼쳐진다. 〈꽃! 직관―딸아, 시를 말하자 1〉 같은 시는 이러한 양상을 잘 보여준다.

어느 날 정원에서 가위를 들고 나무를 다듬다가, 문득 눈이 맞아서 나무가 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어? 화단에 서 있는 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꽃!’ 하고 바로 눈에 보이자, 국어대사전의 견고함이 무너지고 있었다. 눈물이 주룩 쏟아지고 이날, 나무의 이름이 모두 없어져서 내 앞에 선다.

―〈꽃! 직관―딸아, 시를 말하자 1〉 전문

다른 하나는 사람들, 특히 가족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낳는다. 시인은 행복하지만은 못한 삶을 살아갔던 것 같다. 그 자신 “굴복”하는 법, “굽히는 법”을 모르는 성품 탓에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없다고 자책하기도 했다(〈삶의 수학〉). 아내가 척추에 종양이 생겨서 입원해야 했을 때 수술비가 없는 절망적인 가난에 빠져 보기도 했다(〈풀꽃 1〉).

그가 쓴 시들의 형태와 내용, 시집의 구성 방법 따위는 그가 자신에 대한 믿음이 강하고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을 때 잘 타협하지 못하는 성품을 가졌음을 추측하게 한다. 시를 통해서 보면 이런 그에게 식구들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존재였다. 그는 아내와 딸을 즐겨 시의 소재, 주제로 삼았다.

이런 시에서 그는 아내를 소중히 여기는 남편, 딸을 향한 자애에 넘치는 아버지로 나타난다. 같은 맥락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노래한 〈벽, 멈추어 서 버린 그 곳―하관〉은 읽는 이를 숙연하게 하는 깊은 감동을 자아낸다.

차마 헤어질 수가 없다.

눈길 꽃상여를 따라가다 따라가다

멈추어 서 버린

그 곳, ―싸르륵

 

첫 흙을 던지는 캄캄한 일순

벽이 보인다

이승과 저승 사이의 냉정한

벽, ―싸르륵! 싸륵! 싸륵!

 

덮는 핏빛 흙

덮는 눈발

삭풍 소리 억새칼잎 소리 소리란 소리

세상의 차가운 것들

덮어서 쌓여서 솟은

이쁘게 만들어서 더 슬픈 봉분

새삼 보는 벽이다. 벽

 

더는 따라갈 수가 없고

멈추어 서 버린 그 곳 ―싸륵! 싸륵!

간 발자국을 되밟아서 오는 우리

흰옷 머리 숙여 눈 쌓이고

말들 잃은 채

눈 위에 그린 한 폭 수묵화다.

―〈벽, 멈추어 서 버린 그 곳―하관〉 전문

삶과 죽음의 세계를 가르는 하관의 의식을 이렇게 처연하게, 아름답게 그린 시는 일찍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시간이 흐르자 이렇게 어머니의 죽음을 겪은 시인이 사람으로 태어난 운명을 거스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아 이렇게 썼다.

……전라북도부안군백산면거룡리445번지턴도교전교실에태어나서시천주의귀신하고나놀고고부군조소리전봉준고택솔밭머리떠돌면서떠꺼머리머슴들귀신하고나놀고어찌어찌하여시를쓰는데……

―〈느낌표〉 부분

또 그는 이렇게도 썼다.

나는 문단에 전봉준의 동학처럼 반란을 일으키고 싶었던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좀 외람되게 보인 내 행보는 무관심과 무시의 견디기 어려운 냉대를 받았다.

―《딸아 시를 말하자》의 〈자서―시심천국〉 중에서

동학교도의 운명을 타고 태어나 강직한 성품을 버릴 수 없어서 시인은 스스로 견디기 힘든 생애를 살아갔던 것 같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신의 삶, 자신의 믿음에 정직했던 것 같다.

그는 동학의 인내천, 시천주의 가르침을 시의 세계에 옮겨 놓기 위해 무던히 애썼고 그럼으로써 사물을 투명하게 보려는 노력을 버리지 않았다. ‘탈一관념’의 시, ‘빈자리’의 시는 그 방법론적 귀결이었다. 그래서일까. 수운과 의암에 기댄 그의 시들은 너무나 투명하고 선명하다. 이 시들에서 자연은 인간의 인식에 더럽혀지기 전의 원형 같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가다가 배낭을 벗어 놓고

물소리도 벗어놓고

수운을 만난다

잠깐 앉으니 뻥 뚫린 마음의

티 없이 파란 하늘

새순이 돋고 바람이 돋고

반짝반짝 잎이 흔든다

새잎 피는 소리가 수천의 말

햇빛 반짝, 슬픔이라든가

달빛 반짝, 이슬이라든가

그러한 비릿한 소리를 쏟는다

바람이 가냘픈 짐승 되어 분다

가다가 서는 저 소나무

―〈약수터에서 水雲을 만난다〉 전문

 

숲이 눈이 푸르도록 아름답다

푸른 단어들이 지나간다

거기에는 무수한 삶의 흔들림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바람 소리도 소슬하다

그 파란 맑음이 빛깔보다

신선하게 빛나기도 하고,

빛깔 무성히 자라나서

숲이 된다. 사람의 숲,

숲이 떠도는 나를 껴안는다

나의 핏속에서

싱싱한 새들이 날아간다.

―〈파고다공원―딸아, 시를 말하자 13〉 전문

 

 

방민호
문학평론가.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965년 예산 덕산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1994년 《창작과 비평》(평론), 2001년 《현대시》(시)로 등단. 저서로 《비평의 도그마를 넘어》 《채만식과 조선적 근대문학의 구상》 《납함 아래의 침묵》 《문명의 감각》 등 공저 및 편저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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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우가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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