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덕룡의 시세계>
성찰과 생명애
배한봉
1. 참회의 방식
신덕룡 시집 아주 잠깐에서 성찰은 자연과 우주의 이치를 통해 이루어지고 생명애는 바닥 위에 그늘을 드리운 힘없고 낮은 존재들을 통해 발현된다. 우리 삶의 근원을 파헤치려는 신덕룡의 의식적/무의식적 세계관에서 비롯됐을 성찰과 생명애는 삶의 불완전함을 극복하려는 참회다. 참회는 불완전한 삶의 존재를 인정하는 존재자의 의식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존재자란 ‘존재하는 자’를 말하지만 존재란 이 존재자가 ‘있음’이다. 그래서 진정한 참회는 지난 업에 묶이지 않고 현재의 삶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현재의 삶에 집중하는 것은 현재의 삶이 놓여있는 세계와 만나는 일이다. 그래서 그의 시편들은 “세연정”(「고사목, 동백」), “안압지기념관”(「농담」), “추월산”(「추월산」), “장복산”(「아침, 장복산」) “원당”(원당일기 연작시)등 머무는 장소에서 태어난다. 따라서 신덕룡의 시에서 참회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다. 스스로 진정한 ‘나’를 찾으려는 본성에서 비롯된다. 선정(禪定)과 뿌리를 같이하고 있고 성찰과 생명애라는 물줄기에 입술을 대고 있다. 근원을 향해 뿌리를 뻗고 있기 때문에 성찰과 생명애의 물줄기는 자연과 우주, 현존재의 존재가 놓인 위치와 상황을 적시며 장강을 이루고 바다에 이른다. 그러므로 자연과 우주의 이치는 내 자신이며 내 이웃인 존재자와 혼융하며 의미를 확장한다. 시집 맨 앞에 놓인 「사월」은 그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쿨럭쿨럭 배꽃 핀다.
이건, 이 꽃들은 살아 있는 자의 멍에다.
혼자서는 결코 벗어버릴 수도
주저앉을 수도 없도록
두 팔을 벌려진 채 철사줄로 단단히 묶여
꾸부정한 몸으로
기침하듯 내뱉는 비명이겠다.
위로 솟구치려는 야성은 늘 위태로운 법이어서
고개 드는 가지란 가지 모두 참수 당했으니
발치에 수북이 쌓여갈 터이니
하늘은 퍼렇고 봄날은 간다.
꽃 진 자라마다 또 한 근심 주렁주렁 매달아야 할
늙은 나무들, 공장에 늘어선
튀밥기계 같다.
한평생 달궈져 식을 줄 모르는, 말이 없다.
-「사월」
철사에 묶여 가지의 형태가 잡힌 배나무들이 무성하게 흰 꽃을 피운 풍경은 화자에게 있어 아름다운 느낌보다는 고통의 형상으로 다가온다. 고통은 모든 존재자가 가지고 있는 숙명 같은 것. 하여 이 풍경은 화자에게 참회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작용을 한다. 참회 의식은 가장 먼저 “꽃”을 “살아 있는 자의 멍에”로 보는 시선에 출발한다. 모든 생물은 자연에서 생존에 필요한 것을 취한다. 자연과의 공존이며 순환의 과정이다. 그러나 자연에 간섭을 하여 생존에 필요한 것을 취할 때 그것은 자연을 착취하는 일이 된다. 인간은 생산을 증대하기 위해 그만큼 더 거름을 하고 전지를 하는 등 생육의 조건을 최적하게 만든다. 그러나 배나무에 있어서 그것은 “야성”의 “참수”이고, 그렇게 하여 매단 열매는 “근심”의 덩어리일 뿐이다. 이때 나무는 생명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장의 튀밥기계처럼’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은 사고를 하는 존재라는 이유를 들어 인간중심주의를 합리화한다. 자연을 착취하는 것과 순환의 법칙을 따르는 것은 다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한, 아니 현대사회를 살아내야 하는 존재로서 우리는 모두 자연의 착취자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자연과 더불어 우리가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참회할 줄 아는 존재도 인간이다. 인간의 참회 없이는 자연은 물론 자연 속의 다른 생물도 그 안위를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한편 이 시는 농부의 삶의 비극성을 내포한다. 시대의 멍에를 짊어진 자로서의 농부는 철사에 단단히 묶여 수형이 고정된 배나무와 다름없다. “혼자서는 결코 벗어버릴 수도/주저앉을 수도 없도록” 철사에 묶여 “꾸부정한 몸”으로 “비명”만 내뱉으며 첨단문명시대의 흐름에 동참하고자 하나 늘 소외받는 존재가 될 뿐이다. 이와 같이 힘없고 낮게 살아가는 존재들의 모습에서 발현한 신덕룡의 성찰과 생명애는 ‘한평생 달궈져 식을 줄 모르는 튀밥기계’ 등과 같은 표현에서처럼 비극적 인식이 근저를 이루고 있다. 이 인식은 현재 삶이 놓여 있는 세계의 비극적 실상을 시적으로 참회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2. 자비와 구원의식
신덕룡의 시편의 주인공은 “노인”(「소금」, 「낡은 유모차」, 「접촉불량」, 「봄동배추」), 중식 요리사(「만월」, 「동해반점」), “잡역부”(「모닥불」), 노숙자(「서면 지하철역에서」, 「빨간 모자」), 정비소 주인(「프로페셔널」) 등이다. 이들에 대한 화자의 시선은 비극적 인식이 주조를 이룬다. 인간 존재의 한계와 근원적인 비극성을 보여줌으로써 그 극복과 구원에 대한 성찰을 담는다
노인이 큰 밀대를 밀고 온다. 찰박거리며
비스듬히 틀면서 밀고 밀면서 트는
깡마른 종아리의 힘, 거기
한때는 물이었으나 몰리고 쓸리면서
쉽게 삭고 썩을 수 없던 것들 모여 반짝거린다
모자를 눌러쓴 이마 밑 그늘이 전부다.
햇볕에 바랜 그늘이
쓰다. 함부로 버리지 못한 슬픔의 조각들
쏴아 쏴아아 피운 꽃 본다.
-「소금」 부분
동트기 전, 빛의 어귀에다 잡역부 둘이
모닥불을 피웠다.
새로 지은 원룸빌라 외벽에 페인트칠을 하려는지
물감 묻은 겉옷을 목까지 여미고
후후 불어가며 함께 컵라면을 먹는다.
(중략)
하루하루 매달려 사는 삶에
칼바람 스쳐간 곳곳마다 상처가 문신처럼 남았을 터
오늘 만큼은, 타오르는 불길의 작은 혀끝마다
아이스크림 핥듯 어둠을 녹여
움츠린 어깨들 위에
슬며시 아침 햇살로 내려앉는 중이다.
-「모닥불」 부분
밀반죽 한덩이로
팔천 가닥의 면발을 뽑아내는 사내가 있다.
반죽을 치대고 늘이고 꼬고 두들리며
가업을 이은 지 이십여 년,
투박한 손끝에선 거미줄 같은 면발이 흘러나왔다.
차지고 질긴 면발 가닥 가닥엔
엉겨 붙은 삶의 옹이를, 옹이의 속살까지 보듬고 걸어온 이의 담담한 눈빛이
이른 봄의 달빛처럼 환하게 찰랑거렸다.
풀치재 터널을 빠져나오는, 순간
눈이 부셨다. 처음부터 투명한
맑은 빛이 잘랑잘랑 따라왔던 셈인데
터널을 지나서야 알아챈 것이다.
누가 이 고요를 흩뜨리는가
문틈으로 들어온 달빛 한 가닥씩 물고 쩝쩝거리던 우리 사남매
주린 배를 달래주던 꿈속 같구나.
흔흔해서 눈 감으니
젊은 어머니, 밤새워 돌리는 재봉틀 소리 결마다 곱다.
-「만월」
「소금」은 평생을 염전에 바쳐온 노인의 생을 보여준다. 노인의 삶은 “깡마른 종아리의 힘”에 집약돼 있다. “몰리고 쓸리면서/쉽게 삭고 썩을 수 없던 것들”의 결정체인 소금처럼 노인의 일생은 고집스럽고 우직하다. 하지만 그 일생의 뒷면에는 그늘이 있다. 그 그늘은 짠 소금 맛이 아니라 ‘쓰다.’ 쓰디 쓴 인생의 맛인 까닭이다. 햇빛에 반짝거리는 소금이 “슬픔의 조각들”이 “피운 꽃”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도 비극적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쓰디 쓴 인생의 맛은 「모닥불」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새벽 일터에서 “모닥불”을 피운 “잡역부 둘”이 “컵라면”을 끓여먹고 “빌라 외벽에 페인트칠을 하”기 위해 “밧줄”에 몸을 메달고 “벽”을 탄다. “하루치 일당만큼 벌어질” “세상의 틈”은 “하루하루 매달려 사는 삶”을 “헐렁한 몸”으로 만든다. 하지만 화자는 그 모닥불의 “타오르는 불길의 작은 혀끝”에서 “어둠을 녹”이는 조그마한 희망을 발견한다. “아침 햇살”로 표상된 그 희망의 메시지는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전해주는 온기요 빛일 것이다.
「소금」과 「모닥불」이 타자에 대한 응축된 시선이라면 「만월」은 자기 내면에 새겨진 유년의 풍경을 그려내는 시선이다. “밀반죽 한덩이로/팔천 가닥의 면발을 뽑아내는 사내”는 중국집 주방장이기도 하지만 의인화 된 “만월”이기도 하다. 여하튼 그 사내가 뽑아내는 면발에서 화자는 “문틈으로 들어온 달빛 한 가닥씩 물고 쩝쩝거리던 우리 사남매/주린 배를 달래주던 꿈속” 같은 시절을 발견한다. 가난과 허기는 “늘 목이 말랐던 내 유년의 지옥”(「동해반점」)이다. 육화된 화자의 유년기 경험은 면발을 뽑는 요리사의 투박한 손에 잡힌 밀반죽 덩어리처럼 물컹거리는 슬픔의 덩어리로 남아 있다. 하여 화자는 거기서 “엉겨 붙은 삶의 옹이를, 옹이의 속살”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만월」은 삶이 육화된 상상력의 힘을 보여주는 가편 가운데 하나다.
신덕룡의 시들이 내포한 비극적 인식은 자비(慈悲)의 한 유형이다. ‘자’는 자무량심(慈無量心)이다. ‘자’는 내리사랑이며 최고의 우정을 의미한다. 모두에게 사랑을 베풀려는 한량없는 마음이며, 평등한 우정을 갖는 것이 ‘자’이다. ‘비’는 비무량심(悲無量心)이다. 모든 존재자의 고통과 슬픔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마음이다. ‘비’는 ‘탄식하다’는 뜻이 원래 의미지만, 여기서는 존재자의 괴로움에 대한 깊은 이해·동정·연민의 정을 갖는다는 의미다. 자비의 깊이와 넓이는 무량이다. 그 무량에 닿는 길은 멀고 쓸쓸하지만 아름답다. 신덕룡은 직접적으로 자비에 대해 말하지 않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을 드러낸다. 다음 시를 보자.
방에 들어와 앉으니 통영 앞바다에 불이 켜진다. 예까지 따라오던 빗길들이 하나 둘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걸 보면
돌아 돌아서 멀리 왔구나.
(중략)
천길 물속이다. 심해어처럼 등과 배, 꼬리에 지느러미 달고 위 아래로 부지런히 유영(遊泳)하지만 송골송골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들
눈 씻고 보아도 그 자리다.
제대로 떠나지 못했구나 눌러앉지도 못했구나, 팽팽한 존재와 부재 사이가 한 끗이다. 틈을 벌려 한가운데 자리 깔고 누우니
오늘밤 턱 턱, 발에 걸리는 꿈들 많겠다.
-「물속에서 하룻밤」 부분
자비심을 갖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화자의 성찰은 “존재와 부재 사이”에 대한 사색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안과 바깥, 내면과 외면,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 “사이”에도 놓여있다.
통영 앞바다가 보이는 곳에 숙소를 잡고 여장을 푼 화자는 걸어온 길을 회상한다. 창 안과 창밖은 자신의 내면과 외면의 상징이기도 하다. “따라오던 빗길”이 사라진다는 것은 새 길이 열린다는 의미를 가진다. “돌아 돌아서 멀리 왔”지만 바라보면 “그 자리”라는 한탄도 새 길로의 방향전환의 한 과정인 셈이다. 또한 그것은 과거와 현재, 미래 사이에 놓인 변환점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진다. “존재와 부재 사이가 한 끗”이라는 의식은 저 멀리 생명이 한 호흡지간에 있다는 것과 맞물려 있을 것이니, 갈등의 밤은 이제 ‘꿈속 물거품 그림자(如夢幻泡影)’에 불과할 뿐. “틈”의 세계는 “틈”의 세계로 들어감으로써 극복된다. “틈”은 “세상의 틈”(「모닥불」)이고 “문틈”(「만월」)이고 내 삶의 틈(「물속에서 하룻밤」)이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삶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구원에 대한 성찰은 자비라는 무량의 길과 조우하게 된다. 나와 이웃과 자연이 하나로 혼융될 때 그 무량의 길은 더 아름답고 깊은 영혼의 심연이 될 것이다. 따라서 신덕룡의 시가 가진 비극적 인식은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성찰적 시선이며, 새 길을 열어 인간 존재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구원 의식을 보여주는 대자비심의 한 형태다.
3. 마음에 점을 찍다
눈을 감은 이 자리가 살얼음판이다.
어느 반듯한 손길이 쓸고 닦았는지
들고나는 숨소리조차 선득하고 투명해서
편하지 않다.
톡, 똑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
나뭇가지를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소리
오래 전에 풍화한 상처들
주춤거리며 다시 몰려와 수런대는 소리,
말은커녕 생각조차 끊는다는 적막한 벌판에
‘이 뭣고’란 물음조차
보이는 곳곳마다 갈래길 많고
샛강의 모래알만한 대답들 사방에 널려 있다.
내 마음도 섬돌 위에
톡톡 튀는 봄볕보다 가볍고
생철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만큼 많으니
어느 마음이 다리를 절고 있는지
알 길 없다. 길 없으니
멈칫멈칫, 어디 한걸음 내딛을 데 없다.
-「초행-원당일기 2」
“원당”은 어디일까? “이 뭣고?”라는 화두를 꺼내 오는 것을 봐서는 선(禪)발이 푸른 절간이다. “가야면”(「병원놀이-원당일기 8」)이라는 지명이 나오고, “용성선사, 비문”(「파문-원당일기 4」)이 등장하는 걸로 봐서는 해인사의 부속암자인 원당암(용성선사 비는 이웃 암자인 용탑전(龍塔殿)에 있다)이 분명하다. 원당암은 조계종 종정을 지낸 큰스님 혜암이 주석했던 암자다. 그래서 이 시의 첫 구절은 서늘하게도 선적인 발언으로 시작된다.
선가에서는 화두를 참구할 때 백척간두에 선 듯 하라고한다. 그러니 눈을 감고 머리를 누인 “자리가 살얼음판” 아니겠는가. 일찍이 선사들은 나뭇잎 지는 소리에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고 하니 어떻게 마음 “편하”게 잠을 자겠는가. 그래서 화자는 “‘이 뭣고’란 물음”에 “어느 마음이 다리를 절고 있는지/알 길 없다”고 한숨을 내쉰다. 나는 이 대목으로 인해 화자에 대한 믿음이 더 커진다. 아직 한창 젊은 시인들이 마치 화두를 작파하고 깨달음을 얻은 듯한 시 구절을 내뱉는 것에 비하면 차라리 이런 번민은 진정성 있는 아름다운 번민이라 할 것이다.
남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당나귀를 끌고 가다가 아들을 태웠고, 저도 올라탔고 끝내는 땀을 뻘뻘 흘리며 당나귀를 들쳐 메고 갔다. 다 옛날 이야기다.
젊은 여자가 짐을 싸면서 운다. 그녀 역시 주제를 잘 몰랐거나 지나치게 몰입했던 거다. 여기서는 누구도 주인공이나 주인공인 마음에게 왜 그랬냐고 묻지 않았다.
단순하고 속 없는 게 의심이다. 뒤로 감출수록 물에 뜬 기름 같아 울긋불긋 표정이 많은데,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내뱉었으니 제대로 한방 먹은 듯 싶은데
무설설(無說說)! 저 보따리는 작고 낡아 가져온 짐조차 울룩불룩 삐져나왔으니 입만 여럿 달린 전거와 주석들까지 다 싸매지는 못하겠다. 질질 흘리겠다.
메고 가면 어떻고 패대기치면 또 어떠랴. 눈 질끈 감고 의심만 잘라낼 걸 눈물 끝에 리플을 달았으니 오늘, 나도 줄을 잘못 당겼다, 무심코 겁도 없이.
-「리플을 달다-원당일기 13」
화두 참구는 선방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선객은 행운유수의 만행으로 정진한다. 마음공부를 하는데 때와 장소가 필요 없다. 현시대에는 인터넷/사이버 공간에 들어가서도 화두를 들 수 있다. 인터넷/사이버의 영향력은 산중 깊은 절간에까지 크게 파급효과를 미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리플을 단다’는 것은 무엇인가. 리플이란 리플라이(Reply)의 준말 형태로 쓰는 통신언어다. 곧 인터넷/사이버 공간에 남겨진 질문에 응하거나 답장을 남기는 것은 리플을 다는 행위가 된다. 화자는 인터넷 게시판에 답글을 올리며 삶의 근원에 대해 참구하고 성찰한다. 여름날 당나귀에 아들을 태우고 자기도 타고 가다 끝내는 당나귀를 들쳐 메고 갔다는 옛날이야기는 깊은 어리석음의 골짜기를 헤매는 사람에게 지금도 여전히 소용된다. 짐을 싸면서 우는 젊은 여자도 결국은 ‘나’의 “주인공인 마음”에게 길을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한한 “의심”에 대해 말하지만 언제나 남는 것은 “물에 뜬 기름” 같은 “울긋불긋한 표정”이다. 그러니 문제의 핵심을 비켜가는 말은 “입만 여럿 달린 전거와 주석”이 되어 마음의 책 무게만 늘리고 있다는 말씀이다. 마음에 점 하나를 찍는 일이 삼천대천세계의 근원을 알아채는 일임을 안다면 그까짓 “전거와 주석들”을 “메고 가면 어떻고 패대기치면 또 어떠랴.”
총 14편을 남기고 있는 “원당일기” 연작은 삶의 근원에 대한 성찰과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사색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근원에 대해 사색하는 것, 이것은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의 작용, 이것보다 간단하면서도 무겁고 어려운 것은 많지 않다. 마음의 작용은 우주 만물의 이치와 통한다. 그러므로 마음의 작용을 단숨에 알아내는 일은 우주 만물의 원리를 깨치는 일이다. 화두를 참구하고 꿰뚫는 일은 문장 몇 구절로 도사연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오늘, 나도 줄을 잘못 당겼다, 무심코 겁도 없이.” 그러니 줄을 잘못 당겼으되 그로 인해 제대로 된 줄을 찾아낸 마음과 관련된 이야기 하나를 따라가 보자. 이름하여 ‘금강경 고수와 점심 노파의 내공 겨루기 한판’. 벽암록이 우리에게 선물하는 영양가 많은 점심이다.
옛날 중국에 덕산(德山, 780-865)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유식에 조예가 깊고 금강경 연구에 일가를 이루어 속성(俗姓)인 주 씨를 붙여 주금강이라 불렸던 스님은 ‘단박에 한 깨달음을 얻어 세상 이치와 본성을 알면 성불한다’는 선종의 논지를 듣고 이를 논파하고자 여행길에 올랐다. 풍주에 이르러 시장기를 느꼈던 스님은 떡 파는 할머니를 만나 떡을 사려고 말을 건네자 등에 짊어진 걸망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묻는다.
“금강경이 있지요”
그러자 떡 파는 할머니는 내가 묻는 말에 답을 알려주시면 스님께 이 떡을 보시하겠다며 은근슬쩍 법거량을 하잔다.
“그럽시다. 금강경에 관해서라면 무엇이든 물어보시오. 다 알려드리지요.”
“금강경에 ‘지나간 마음도 잡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잡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잡을 수 없다(過去心 不可得 現在心 不可得 未來心 不可得)’란 말이 있습니다. 점심을 하고자 하는 스님이 점(點)찍고자 하는 그 마음(心)은 과거심입니까? 현재심입니까? 미래심입니까?”
점심을 쫄딱 굶어야했던 덕산스님의 마음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그 후 덕산스님은 당대 제방선문의 대표적 선승이 된다. 그리고 임제의 할(臨濟喝)과 쌍벽을 이루는 덕산의 방(德山棒)으로 덕산선풍을 활짝 연다.
덕산스님의 방은 곧 마음이다. 깨달음이 문자화 되지 않듯 마음 역시 문자화 되지 않는다. 신덕룡의 “원당일기” 연작시가 보여주는 마음도 그렇다. 문자화 되지 않는 마음을 보여주는 암묵적이고 주체적인 수행방법이 방이라면, 시는 압축되고 절제된 시적인 언어로 마음을 보여주는 주체적인 창작행위이다. 그러므로 선과 시는 서로 다르지만 시적 방식으로 얼마든지 선의 세계를 담을 수 있다는 점은 시인에게 매우 매력적인 요소다.
마른 잎이 툭 떨어진다.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낮은 떨림 아래
눈 감고 앉아
들고나는 숨소리를 고요히 헤아리는
지켜보는 내가 없어졌다.
아주 잠깐, 누구인가
먼 길을 돌아온 듯 두리번거리는 이는.
-「아주 잠깐-원당일기 14」
마음공부는 ‘말해도 30방, 말하지 않아도 30방’이다. ‘없어진 나’를 찾아가는 길에 “아주 잠깐” 눈앞에 서서 “먼 길을 돌아온 듯 두리번거리는 이”를 만난 화자를 덕산스님이 봤다면 무엇을 던져주었을까. “마른 잎”을 떨어내는 “나뭇가지”로 방을 내려쳤을까. 나를 비우고 도저한 마음의 실체, 그 근원을 찾아 가는 화자의 성찰은 진정한 참회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주인공인 마음”이 곧 자아라는 사실이고, 수많은 번민과 방황 끝에 비로소 그 자아가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았다는 점에서 이 시는 단연코 빛을 발한다. 한 모금 물을 마실 때도 그 근원을 생각하라는 음수사원(飮水思原)의 정신과 같은 것이 마음과 혼융되어 있으므로 스스로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4. 성찰과 생명애를 위하여
신덕룡 시집 아주 잠깐의 시세계는 불교사상에 접맥되어 있다. 시와 종교의 만남은 자칫 시의 형식을 통해 해당 종교인만이 공감할 수 있는 성격으로 고착될 수 있다. 하지만 신덕룡의 시세계는 불교사상을 시의 한 특색으로 불러들이되 시를 종교적 수단으로 삼고 있지 않다. 그의 시는 부처를 찬탄하거나 신앙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땅 위의 존재들을 대상으로 무한한 생명애를 드러내고 자연과 우주의 이치를 통해 근원을 성찰하려는 의식적/무의식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봄동배추」에서의 “미망(迷妄)”이 가진 의미도 그러하다.
봄동 무침을 먹는다.
남의 집에 얹혀살 듯 오갈이 들어
낮게 낮게 바닥으로 기어가며 숨 쉬던 것
싸아 하면서도 뒷맛은 달다.
쌓인 눈에 못 이겨, 한밤중
혼자서 몰래 어깻죽지를 꺾어버리던 소나무나
폐지 가득 실은 리어카를 끌고 가던 노인이
한꺼번에 몰아쉬는 폭 삭은 한숨 같은데
툭툭 털고 남은 길 마저 가는 걸 보면
마약이다. 입에서
단내 나도록 엎어지고 깨지고 피 흘리면서도
헐거워질 때마다 바투 잡는
끊을 수 없는 미망(迷妄)의 슬픈 끈 아니냐.
어느 날 내가 손을 놓았을 때
여러 번 고쳐 잡았으니
뒷맛은 간간하겠다 그럭저럭 달큰하겠다
문득 위로하고 싶은 날, 있다.
-「봄동배추」
참기름을 넣고 깨를 뿌려 만든 “봄동 무침”은 겨우내 입맛을 잃고 있던 우리에게 깊은 생생력(生生力)의 기운을 밀어 넣어준다. 화자는 “봄동 무침”에서 고난 뒤에 오는 삶의 “간간하”고 “달큰”한 맛을 찾아낸다. 그러한 삶의 맛, 그러한 봄동의 맛의 바닥을 이루는 것은 노지(露地)에서 겨울을 보냈지만 여전히 푸른빛을 잃지 않은 힘이다. 그래서 화자는 봄동의 맛의 근원이 설해를 입은 “소나무”나 “폐지”를 모으는 “노인”의 “폭 삭은 한숨”에 있고 “입에서/단내 나도록 엎어지고 깨지고 피 흘리면서도/헐거워질 때마다 바투 잡는/끊을 수 없는 미망(迷妄)의 슬픈 끈”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러 번 고쳐 잡”은 “미망(迷妄)의 끈”은 생명에 대한 근원적 애착이고 중생심에서 기인된 것이지만 인간의 육체가 가진 유한성과 더불어 비루한 일상을 극복하려는 용맹정진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겨울 찬바람과 눈보라를 견딘 봄동이 만들어낸 생동기운의 간간하고 달큰한 뒷맛이 내가 생의 손을 놓았을 때도 있기를 바라는 화자의 마음은 여러 생명들과 공명하고 공감하는 성찰과 생명애를 보여주는 따뜻한 삶의 풍경이다.
이와 같은 성찰과 생명애는 신덕룡 시집 아주 잠깐을 관류하는 정신이다. 참회의식이나 자비와 구원의식, 그리고 마음을 찾는 구도의 길 등은 그 노정에서 서로 한 몸을 이루면서 존재의 심연을 연다. 그 심연에는 “혼자서 독작(獨酌)하는 슬픔”(「담을 넘다」)이 있는가 하면 “불쑥 나타나 말을 거는 석기 시대의 노을”(「반구대의 고래」)도 있고, “시월의 문턱을 막 넘어선” 생명의 “환한 절정”(「백일홍」)도 있다. 수많은 풍경들은 자연으로서의 풍경이지만 시인의 눈을 여과해 나갈 때 더 깊은 의미를 가진 시적 풍경으로 다시 태어난다. 자연과 우주의 이치는 이미 세계 속에 존재하고 있는 존재자와 혼융하며 삶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인의 성찰과 생명애의 확장된 의미와 더불어 시에 깊이 새겨진다.
* 배한봉 | 시인. 1998년 현대시 신인상 등단. 시집 흑조(黑鳥), 우포늪 왁새, 악기점, 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 등. 현재 시인시각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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