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학주 시인의 시세계
<<과묵한 삶의 길, 시의 길>>
이경호(문학평론가)
황학주는 ‘도상(途上)의 시인’이다. 그의 삶은 늘 길 위에서 받은 ‘상흔’의 집적과도 같았다. 그렇다면 청소년 시절부터 그를 길 위에 세운 삶의 ‘상흔’이 그의 시쓰기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이번 시집에 등장하는 ‘노랑꼬리 연’과 ‘기차’와 ‘별’과 ‘바람’의 이미지들 속에서 우리는 길 위의 삶과 그로 인한 ‘상흔’이 그의 시세계에 미친 영향을 읽어낼 수가 있다. 그런데 시집<노랑꼬리 연>에서 길 위의 삶은 어떤 방향성을 뚜렷하게 노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프리카 시편에서건 고흥 시편에서건, 심지어는 가족과 유년의 추억을 향한 시편들에서도 오롯이 드러나는 그 방향성은 이미 시집 첫 번째 시편「고향」에서 선보인 ‘산그늘’과 ‘독방 구덩이’, 그리고 ‘그림자빛’의 이미지들 속에 아로새겨져 있던 것이다.
신발을 들고 돌아서면 발 디딜 데 없이 고요한,
더 필요한 것이 모두 젖은 해안선
지나쳐온 고요를 함부로 밟을 수 없는
몸의 습성은 장례지의 바람을 닮았다
유년의 바람을 묻어놓은 바다의 다락방으로
되돌아가는 하루였을까 조가비 하나,
희고 파리한 그런 말일까
-「고흥」부분
나는 차를 멈추고 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긴 송곳니 하나를 부러뜨리고 오는 코끼리
새가 날아오는 거리를 알 수 있는 나무는 어디에도 없고
코끼리가 되면서부터 걸은 거리는 코끼리만 어림하고 있을 것이다
점점 가까워지는 코끼리 귀를 펼치고 오는 코끼리
잃어버린 식구들이 발목을 접고 누워있는 어딘가도
펼친 귀뿌리 주름처럼 구겨져있으리라
코끝을 대면 땅 위에 깔리는 쉰 목소리
그리움이 누그러질 때까지
붉은 강물에 등이 다 잠기도록 달리는 코끼리
거리를 가질 수 있는 동안은
가족에게 갈 수 있어서 좋으리라
- 「발목 지고 가는 코끼리 발목이,」부분
그의 몸은 이제 고흥에서 고요함을 눈여겨보고 있다. 고요함을 눈여겨보는 마음속에서 유년의 추억이 떠오른다. 그리고는 ‘바람’처럼 떠돌던 외로움을 묻어놓을 ‘장례지’로 그의 처소가 자리잡는다 - “바다의 다락방으로”. 아프리카의 길 위에서 그의 삶이 이입된 ‘코끼리’의 이동을 그는 눈여겨본다. 그 동물이 그의 삶으로 이입되는 까닭은 “긴 송곳니 하나를 부러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길 위를 살아온 그의 삶처럼 ‘상흔’을 간직하고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시선은 ‘코끼리’의 ‘송곳니’에서 ‘귀’로 이동한다. ‘귀’를 근거로 ‘코끼리’는 혼자가 아니다. ‘코끼리’의 ‘귀’는 어딘가에 있을 ‘가족’과 ‘고향’의 세계를 이어주는 소통의 매개체다. 어릴 때 종이컵으로 전화놀이를 해보았다면 ‘귀’의 소통과 교감 효과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식구들이 발목을 접고 누워있는” 고향을 기억하는 마음이 그러한 소통과 교감의 효과이다. 더구나 “귀뿌리 주름처럼 구겨져있으리라”는 표현 속에서 우리는 그리워지는 가족의 따뜻한 표정이나 고향의 추억을 참신하게 떠올려볼 수도 있다.
이러한 삶의 방향성이 이번 시집에서 가족과 유년의 추억을 다룬 시편들의 비중을 어느 시집에서보다 크게 만들어 놓았는지 모른다. 삶에 들러붙는, 그야말로 “몸 전체로 밀고 나아가는” 시편들을 생산해온 그의 입장에서 이러한 변화는 불가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가족과 고향 시편들의 증가와 더불어 죽음과 연관된 시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운명이 아니면 찾아오지 않는
죽기를 기다리지 않는 사랑
- 「봄이 돌아온 바다의 어느 거북 이야기」부분
우리 사랑할 때와 죽을 때
헙수룩한 뗏목여행이라 해도
어디선가 서로의 우연이 되어준 지상의 강물 같은 시간을 추억할 수 있다면
- 「우연에 가까운 사랑을 미루면 어떤가」부분
‘죽음’은 지금까지의 황학주 시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은 소재로 특히 사랑과 연계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강렬한 에너지가 느껴지며 앞으로 그의 시쓰기에서 좀 더 본격적으로 다루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시집에서 가장 아름답고 절실한 시편들은 역시 길 위의 삶을 노래한 것들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아직은 몸과 마음에 ‘상흔’을 부벼넣는 길 위의 삶이 더욱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탓일까. 앞에서 인용한 ‘코끼리’에 관한 시편도 가장 아름다운 대목은 마지막 부분의 ‘발목’을 다루는 내용 속에 표현되어 있다.
노을은 물 있는 곳을 찾아 도망 나온 태양의 불목하니,
물어보랴 흘러내려가는 것들이 풀과 낮달을 키우는 동안
비 개인 어느 날 코끼리로 다녀가는
한 수컷과 한 암컷 사이 바다 같은 슬픔으론 무엇이 되느냐고
사라진 풀들의 잠언을 생각해 낼 수 없는
발목은 따스하게 이는 흙먼지를 매달고 간다
연밥같이 발을 들어 땅을 딛는 육중한 영혼을
몸 안으로 불어 밤새 부풀어 오르는
달덩이 코끼리,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리는
발목 지고 가는 코끼리 발목이 킬리만자로 아래 있었다
‘슬픔’으로 “흘러내려가는 것들”이 길 위의 생이라 할지라도 그런 생의 “발목은 따스하게 이는 흙먼지를 매달고 간다”고 바라보는 시선은 길 위의 생을 긍정하려는 안간힘이 부려놓은 아름다운 표현이다. 길 위의 생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려는 마음은 슬픔과 고통의 “발목 지고 가는 발목”을 “연밥 같이” 받아들이는 뛰어난 상상력을 빚어내기도 한다. ‘연밥’의 형상과 코끼리 발바닥의 형상이 비슷한 점을 착상한 것도 예사롭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고통의 발목’을 진흙 밭에서 자라나는 ‘연밥’의 결실로 관계 짓는 착상이 참신하면서 절실하기 때문이다. 우연하게도 ‘코끼리’와 ‘연꽃’은 모두 불교의 상징이라는 동질감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 ‘연꽃’은 진흙 밭에서 피어나는 속성으로 속세의 고통을 견디어내는 깨달음을 상징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데 그는 슬픔과 고통의 ‘발목’을 “육중한 영혼”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길 위의 삶을 육중하다고 생각하는 마음, 그 마음은 대상과 말의 관계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는 의미로움을 연출한다.
사랑하니까
나를 뒤집어쓰고 있는 너를 알아볼 수 있다
지금의 너는 가장 아름다운 나의 말이니
나의 뱃속을 기억할 너 때문에 몸이 녹고
나 먼저 예뻐진다
입이 생기면 말을 잃게 되는 세상,
부디 나를 빠져나와 내가 잃을 오늘의 말보다 추운
네가 잃을 내일의 말을
상상력이 떨어지는 바깥세상의 말을 우적우적 먹어다오 배부르도록
얼음호수를 지나 갈잎처럼 미끄러지며 호도로 가던
오래된 내 말을
언젠가 이 한 마디의 말이 길이 되라고
오늘 밤 핏방울만 한 별이 하늘을 노 젓고 있다
- 「하늘호수」부분
이 시편의 인용되지 않은 부분에는 “풀을 찾아 호도로 가는 어린 양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눈이 온 세상”이 있다. ‘어린 양’과 ‘눈’은 흰색의 순수한 존재성을 환기시킨다. 시인은 그러한 존재를 “가장 아름다운 나의 말”이라고 규정한다. 대상과 언어가 일치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시인은 또한 “입이 생기면 말을 잃게 되는 세상”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니까 시인이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언어의 존재성은 마음속에 머물러 있는 상태일 따름이다.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세상의 언어는 불완전하고 훼손되어 있으므로 시인은 어린 양에게 “상상력이 떨어지는 바깥세상의 말을 우적우적 먹어다오”라고 요청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언어에 대한 자의식이 그의 시쓰기를 과묵한 표현법으로 인도하는 또 하나의 원인이기도 하다. 세상에서는 매끄럽게 빛날 수 없는 자신의 시쓰기가 감당해야 할 언어의 운명을 그는 길 위의 삶이 스스로 맞이해야 할 운명과 겹쳐놓기도 한다 - “핏방울만 한 별”이라고. ‘상흔’으로 얼룩진 길 위의 삶을 인도하는 “핏방울 만한 별”은 아마도 이번 시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편으로 꼽혀야 할 다음의 작품에서 ‘되새’와 ‘홍매(紅梅)’의 모습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정거장 대합실 파닥이며
되새가 들어왔다
산간에 눈이 내려
달빛이 산마루를 덧칠하며 원 없이 넘어올 때
탈탈 털고 대합실에 들어서는 사내가 발을 전다
오래 절룩거리는 나이는 먼 데 있는 정거장까지 알아볼 것이다
주위에 목마름이 심한 별들이 많다는 것은
그 증거이다
별 발자국이 눈밭에도 찍혀 있다
발자국의 뿌리는 사내의 키만큼 깊을 것이고
별의 뿌리는 더 먼 곳에서 요동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
눈밭을 절며 걸어온 발로
걷기 전의 성한 데를 건드려보는 것이다 반짝반짝,
하늘은 가지에 목이 걸린 홍매紅梅를 밤새 살리고 있었나보다
숨소리 돌아오며 안색 밝아지는
산마루 앞 칸으로 옮겨 타려다 멈칫거리는 앳된 별
사내가 대합실 우윳빛 유리에 비치는 발자국을 지켜보고 있다
되새가 머리를 박으며 대합실을 빠져나간다
아무래도 되새는 부력이 좋은 봄기차로 가려는 것 같다
새벽밥 먹은 별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자
빈자리마다 덴 자국이 있었다
- 「은하수역, 저쪽」전체
오래 전, 호남의 어느 시인이 이런 계절의 간이역을 소재로 아름다운 시를 한편 작성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시를 모티프로 그의 친구인 소설가가 같은 제목으로 짧은 소설을 한 편 발표했었다 - 「사평역」이라고. 그때 그 시와 그리고 후일에 발표된 소설을 읽으며 나도 언젠가 아름다운 시를 소재로 수채화 같은 단편을 한편 써내고 싶다는 강렬한 유혹을 느꼈었다. 거의 삼십 여년이 지난 지금, 그 작품보다 훨씬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 작품을 읽으며 나는 다시 한 번 강렬한 유혹을 느낀다. 삶의 “오래 절룩거려온” 상처로 “먼 데 있는 정거장까지 알아볼”수 있는 시선이 내 마음을 사로잡고, “별의 뿌리는 별보다 더 먼 곳에서 요동치고 있을 것”이라는 표현에서는 삶을 인도하는 슬픔의 절실한 깊이를 체감할 수가 있다. 무엇보다도 ‘홍매’와 교감하는 ‘별’과 그것들이 부려놓은 슬픔의 힘으로 원기를 찾아 “대합실을 빠져나”가는 ‘되새’의 움직임이 선명한 영상으로 뇌리에 박힌다. 내 친구 황학주의 이 작품을 언제쯤 소설로 써낼 수 있을까? 그때까지는 우선 기억의 메모장에서 지워지지 않도록 자주 암송하는 습관을 가져야 할까 보다. 매일매일 황학주의 ‘상처학교’에 등교하는 기분으로.
-http://cafe.daum.net/vita-poem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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