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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큰길에는 쉼터가 없다 - 신덕룡 시인

문근영 2014. 4. 30. 11:32

신덕룡 시인 강연

<< 큰길에는 쉼터가 없다>>

 

 

1. ‘천천히빨리빨리

 

우리는 늘 속도에 매달려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이 급속도로 변한다는 것과 함께 공간이동이 잦음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우리 삶의 변화는 산업화와 더불어 급격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변화는 이동수단의 발달과 병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17세기 기차의 발명은 시간의 소유를 가능하게 한 첫 신호였습니다. 시간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필요가 있는 곳에로의 이동이 쉽고 빠르게 되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우리의 삶의 터전이 확대되었음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따라서 필요에 따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빠르게 오고갈 수 있는 것이지요.

기차에 이어 자동차, 비행기로 공간이동이 자유롭게 되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잃게 되었는데, 그 중 가장 큰 것은 우리의 감각입니다. , 감각에 대해 인간이 행사하던 통제력을 상실했습니다. 가령 기차를 탔다고 합시다. 우리는 창가에 앉아 흘러가는 풍경을 보게 됩니다. 풍경을 보면서 터널을 지나게 될 것이고, 간간히 들려오는 기적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밖에 비라도 온다면 그 풍경은 아름답게까지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편안하게 앉아 비오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보다 넉넉한 일은 없지요. 그러나 이는 풍경이 아니라 스쳐 지나가는 배경에 불과합니다. 어느 한 순간도 우리 눈 속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가는 것일 뿐, 기억되는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속도가 빠를수록 창문을 열지 못하니 안과 밖이 유리된 채 우리는 단지 구경꾼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고속도로 위를 달린다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향기 대신 매연이 소리 대신 소음이 우리의 감각을 점령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 앞서 말했듯 감각, 풍경과 냄새와 소리와 촉감입니다. 도보여행을 생각해봅시다. 길을 걷다보면 발바닥으로 전해오는 작은 돌멩이들의 감촉,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식혀주는 산들바람, 앉을 때 엉덩이로 전해오는 흙의 감촉, 멀리 보이는 산과 들과 하늘의 풍경, 바로 옆에서 풍기는 풀냄새와 꽃향기 …… 내 주위의 온갖 존재들이 뿜어내는 존재의 향기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큰 길에서 우리는 더 이상 여행객이 아닌 화물입니다.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렸다고 합시다. 차에서 내려 팔다리 운동을 몇 번 할 것이고, 서둘러 화장실에 갈 것이고, 간단한 요기를 할 것이고, 주변을 둘러보다 다시 차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출발지에서 도착지까지 가는, 살아 있는 화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빨리 도착지에 가야 할 일만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큰길이 단순히 공간이동의 수단이란 점에서, 우리는 자연이나 주변사물과 분리된 존재에 불과합니다. 쉼터에서 느끼는 교감은 없습니다. 느껴야 할 대상과 분리된 채 멍하니 바라보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더 이상 장소나 장소에 귀속된 시간적 정체감도 없습니다. 한곳에 머물면서 그 장소와 함께 했던 기억이 없기에 애착은 더더욱 없지요.

 

2. ‘보기들여다보기

 

본다는 것은 대상을 살피는 일입니다. 대상의 모양, 구조, 특성 등에 대해 요모조모 살피는 것이지요. 이렇게 함으로써 다른 것과 구별할 수 있고, 같거나 비슷한 것들을 한데 모을 수도 있습니다. 이른바 관찰에 의한 분석이나 분류라 할 수 있지요. 또한 자연을 관찰하면서 그 특성과 구조를 익혀 인간생활에 필요한 여러 도구들을 만들기도 합니다. 포클레인, 헬리콥터 등등이 자연의 동물에서 착안된 기계들이지요.

이런 태도는 사물의 속성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이성(도구적 이성)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자연(사물)은 학습의 대상에 지나지 않지요. 그러나 들여다본다는 것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좀 전에 말씀 드렸듯, 배경 대신 풍경이 다가오지요. 길을 걷다가 적당한 곳을 골라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봅니다. 아픈 다리를 주무르다보면 목덜미를 스쳐가는 산들바람을, 형형색색의 들꽃들을 느끼고 보게 될 것이다. 자칫 새의 둥지가 있는 나무 아래라면 어미새의 다급한 울음소리와 주변을 날아다니는 새의 부산한 날갯짓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또 옆의 나뭇가지에서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의 조용한 움직임을 볼 수도 있지요.

사마귀의 조용한 움직임, 먹이를 덮치기 직전의 팽팽한 긴장, 아무 것도 모르고 천연덕스럽게 우는 매미 …… 여기에 우리의 눈을 고정시키는 순간 주변의 산과 들과 하늘은 모두 배경으로 물러가고 상황이 다가옵니다. 이 상황에서 눈앞에 있던 주변의 사물은 사라지고 사마귀의 모습만 내게 다가오는 것이지요. 여기서 나도 숨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대상과 나와의 관계가 시작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관계는 선악, 호오(好惡) 등 판단이 배제된 같은 생명체로서의 참여입니다. 이 관계는 들여다보기즉 보면서 느끼는 시선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들여다본다는 것은 볼 줄 안다는 것이고, 사물의 속성뿐만 아니라 관계 속에서 교류를 한다는 것이지요.

들여다본다는 것은 대상을 세세하게 관찰함은 물론, 나와 대상이 서로 만난다는 것이고, 또 내 숨소리나 작은 행동도 그 대상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를 가진 존재로 관계하고 있으니 이를 교감(交感)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이런 교감은 우연히 만나는 사람이나 사물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미와 새끼 염소 세 마리가 장날 나왔습니다.

따로 따로 팔려갈지도 모를 일이지요. 젖을 뗀 것 같은 어미는 말뚝에 묶여 있고

새까맣게 어린 새끼들은 아직 어미 반경 안에서만 놉니다.

2, 상사화 잎싹만한 뿔을 맞대며 톡,

골 때리며 풀 리그로

끊임없이 티격태격입니다. 저러면 참, 나중 나중에라도 서로 잘 알아볼 수 있겠네요.

지금, 세밀하고도 야무진 각인 중에 있습니다.

- 문인수, 각축전문

 

이 시는 서골 장날의 한 풍경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골 장터에 가면 별의별 것들이 널려 있습니다. 새끼염소는 물론, 강아지, , 상추, 월동배추, 말린 고사리 --- 등등 없는 게 없지요. 이 시에서는 어미와 새끼염소를 누군가 팔러 나왔네요. 그런데 새끼염소들은 각각 어디로 팔려가는 줄도 모르고 장난을 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런 모습을 골 때리며 풀 리그로”, “끊임없이 티격대격하는 천진스런 장면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간 서글픈 일이 아닙니다. 이런 놀이가 오늘로 끝일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어미와 따로 팔려갈 수도 있고, 또 새끼들이 따로 팔려갈지도 모를 일이지요. 나는 이 장면에서 시인의 내면풍경을 떠올렸습니다. 이것은 비극을 바라보는 시선에 관한 것입니다. 우선, 비극은 어긋남이지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얻은 것을 잃는 것도 비극입니다. 가장 큰 비극은 느닷없이 닥치는 불행이지요. “?” 라는 질문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새끼 염소들의 운명이 그렇지요. 문제는 이를 어떻게 드러내느냐는 것이지요. 이 시에서 보면 시인은 시치미를 뚝 떼고 있습니다. 마치 자신과는 관계없다는 듯이. 과연 그럴까요? 시인은 이들의 비극적 운명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또 비극적 운명에 공감하기에 희극적으로 더 세세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지요. 애이불비(哀而不悲)의 경지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철저하게 상황 속에 자신을 밀어 넣고, 또 객관화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새끼 염소의 처지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고, 그들의 운명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이지요. 더욱 중요한 것은 새끼 염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상황 속에 내가 끼어들게 되고, 그 속에서 삶의 뚜렷한 모습과 함께 깊이를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지요. 대상에 대한 애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3. ‘듣기와 귀 기울이기

 

교감은 문학적 사유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감은 달리 말한다면 존재의 상호교환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것은 나와 너 사이에도, 나와 대상 사이에도, 나와 나 자신 사이에도 존재합니다. 우선, 응시의 시선은 내 자신과 관련해서 생각할 때, 나에게 붙들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에게 붙들림으로써 나는 현재의 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무엇을 돌아보느냐?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내 자신의 존재론적 문제입니다. 이는 현재의 자신에 대한 반성을 전제로 하는데, 반성의 내용은 당연히 인간은 혼자라는 것, 고독한 존재라는 것을 잊고 사는 사실에 대한 반성입니다. 철학적인 냄새가 풍기기도 하지만, 인간은 철저히 고독한 존재입니다. 또한 남과 다른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차이가 상호작용을 하면서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외면하려 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기연민에 빠지거나 끊임없이 타인과 어울려 고독을 피하려 합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을 돌아 볼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고독하다는 것을 인정하면, 남도 나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게 됩니다.

또 하나는 습관적 사고에 대한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광고 문구가 있습니다. ‘생각대로 하는 것이 답이다라는 모 통신회사의 광고인데, 이런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재미있습니다. 남보다 늦게 말을 하는 것, 반장이 아닌 것, 영어를 못하는 것--- 등이 지는 게 아니란 것이지요. 당연한 말인데 왜 신선하게 다가올까? 한마디로 우리의 습관적 사고에 충격을 가하기 때문이다.

습관적 사고는 현실의 질서와 가치에 종속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남과 같이 생각하고 남과 같이 행동해야 뒤떨어지거나 외롭지 않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경쟁사회 속에서 받는, 따를 수밖에 없는 억압 중 하나이긴 합니다만 과연 이렇게 살아야 행복한가? 이 질문이 곧 내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 귀 기울이는계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계기는 구체적 상황으로 우리 눈앞에 수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쿨럭쿨럭 배꽃 핀다.

이건, 이 꽃들은 살아있는 자의 멍에다.

혼자서는 결코 벗어버릴 수도

주저앉을 수도 없도록

두 팔은 벌려진 채 철사줄로 단단히 묶여

꾸부정한 몸으로

기침하듯 내뱉는 비명이겠다.

위로 솟구치려는 야성은 늘 위태로운 법이어서

고개 드는 가지란 가지 모두 참수 당했으니

발치에 수북이 쌓여갈 터이니

하늘은 퍼렇고 봄날은 간다.

꽃 진 자리마다 또 한 근심 주렁주렁 매달아야 할

 

늙은 나무들, 공장에 늘어선

튀밥기계 같다.

한평생 달궈져 식을 줄 모르는, 말이 없다.

- 신덕룡, 사월전문

 

과수원에 가보면, 배나무 가지를 옆으로 벌려 철사로 묶어 놓았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가지가 위로 자라면 수확하기 힘들지요. 사람의 편에서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나무의 편에서 보면 불편하기 짝이 없지요. 나무의 속성은 가지를 위로 뻗으며 하늘을 향해 크는 것이 본질적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인간과 자연 사이의 갈등이 있습니다. 이 갈등을 당연한 것으로 보면, 타자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적 사유란 나는 물론, 타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불편한 자세로 두 팔을 벌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매달아야 하고 또 말라 죽을 때까지 이 일을 반복해야 하는 나무의 처지에서 보면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가만히 살펴보니 윗가지에 가시가 돋쳐 있고, 옆으로 자란 가지는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팽팽해져 있고, 그런 반면에 나무줄기는 구불구불 살갗이 터져 있고,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하고 …… 참 다양합니다. 이건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존재의 외로움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의 삶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욕망하는 대로 할 수도 없고 주위의 여건이 그렇게 살도록 허락하지도 않습니다. 삶의 체제나 규범, 규율 등이 우리를 묶어 놓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삶을 포기하거나 내쳐둘 수도 없습니다. 이 시에서 쿨럭쿨럭배꽃을 피운다고 했습니다만, 어떤 조건에서 건, 자신을 실현해야 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철사줄에 매달린 배나무나 인간이나 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펼쳐가다 보니, 소리의 진경이란 침묵이나 고요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내면에서 아우성으로 들끓어도, 입을 꾹 닫고 있는 침묵이야 말로 진정한 소리, 존재의 참모습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그걸 시인이 대신 말해주는 것이고.

 

4. 허물기와 짓기

 

다른 존재를 대신해서 말한다는 것은 자신을 확장하는 일입니다. 자신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집을 새로 짓듯 과거의 습관이나 사유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말했듯, 자기중심적 사유를 허무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눈으로 대상을 볼 줄 알게 되고, 들을 수 있고 드러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따가운 햇살에 문득 솔방울 터지는 소리

가지에서 포르릉, 멧새 놀라 날아오르는 소리

그 솔숲 너머 환한 여백 쪽으로

귀가 기울여진다

 

미풍 속 큰 고요의

오늘의 말씀은 싸리꽃 향기로 스쳐오리

- 고재종, 말씀- 오솔길의 명상1전문

 

 

이 시의 내용은 거창하거나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숲 길가에 앉아 있다가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리한 것이지요. 이렇듯 아무 생각 없이 있는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여기엔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려는 일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말하듯 빨리빨리의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존재를 열어놓는 일입니다. 존재를 열어 놓는다는 것은 전체 속의 일부로서의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솔방울 터지는 소리”, “멧새 날아오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솔숲 너머의 환한 여백에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환한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잊고 있거나, 잃어버린 것이지요.

앞서 말씀드렸듯, 시적 사유는 관계적 사유입니다. 그러나 조화로운 관계는 현실에서 찾기 힘듭니다. 그래서 시를 통해서 드러내는데, 앞서 새끼염소의 처지에서 보았듯 부조화그 자체로도 삶의 진실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늘 속도의 저편에 있으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속도에서 벗어난 쉼터에서 잃어버린 감각을 찾고, 잃어버린 를 돌아 볼 줄 알아야 하지요. 나를 볼 줄 알아야 나를 구성하고 있는 주변의 것들을 살필 수 있고, 숨겨진 존재의 참모습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http://cafe.daum.net/vita-poem 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우가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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