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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풍경을 흔드는 바람 한 줄기 - 임  연태 론 / 김미정

문근영 2014. 4. 30. 11:31

연태 론 / 김미정
풍경을 흔드는 바람 한 줄기
[35호] 2008년 12월 15일 (월) 김미정 시인

시간의 돌들은 강물을 따라 흐르기도 하고, 때로는 큰 바위가 되어 바닥을 긁으며 굴러가기도 한다. <뜰 앞의 잣나무>, <마른 똥 막대기>. 화두로 시작되고 끝나는 생(生). 누가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했으며 누가 이 시간 온갖 생각들을 일으키고 다시 버리게 하는가. 오직 빈 하늘로 존재하는 마음,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이 우리의 마음속 풍경을 가만히 흔들어 깨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자아 상실감과 소외감으로 인해 ‘실재가 이미지와 기호의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는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자기 본모습을 숨긴 채 가면을 쓰고 낯선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정신적 가치가 탈락한 세계 속에 방황하는 인간 존재의 모습들을 삶의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

임연태 시인은 2004년 <유심>신인상으로 등단하였으며 현대불교신문사 부국장으로 다년간 불교계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서 불교적 색채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항상 미소 띤 얼굴로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시인의 따뜻한 심성이 그대로 용해되어 있는 시편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전등록》에 <어떤 것이 너의 부모 만나기 전의 너의 참 얼굴인가(如何是父母未生前眞面目)?>라는 화두가 있다. 나는 어디에서 났으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삶의 흔적을 뒤져보지만 자신을 찾는 것은 늘 막막하다. 얼굴 없는 익명의 사람들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은 자신의 존재를 지우기에 익숙해져 있다. 진지하지만 때론 통쾌하게 생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임 시인의 시세계로 들어가 본다.

1. 자아의 환기

겨울이 벌떡
일어선다.

울긋불긋 허리춤을 풀어 놓은 산마다
아직 가을 색 찬연한데
겨울이 벌떡
일어선다.

입, 똥, 입, 똥.

입으로 들어간 것은 매양
똥으로 나오기 마련

들어갈 땐 더없이 귀(貴)하던 것이
더없이 천(賤)한 신세로 나오는 동안
화려하던 단풍 산
바싹 말라 덧없어지는 동안

나는 한 덩어리
똥으로 마르고 있다.
─ 〈입, 똥, 입동(立冬)〉 전문

하루에 1분,
분침이 늦게 간다.

맞춰 놔도 고집스레
한 칸씩 뒤처진다.

내 삶의 고단함이
초침의 맥박 속에 흘러들었나?
반란의 유전자가
시침의 평온을 거스르나?

~
그 자식,
좀 천천히 가자니까 …
─ <늦게 가는 시계> 부분

시간은 늘 우리보다 한발 앞서 간다. 아침에 눈을 떴나 싶으면 밤이고 오늘이 월요일인가 하면 벌써 금요일이다. 계절 또한 언제나 우리 앞에서 불현듯 ‘벌떡/ 일어선다.’ 이렇듯 우리들은 시간에 이끌려 다닌다. ‘입동’이라는 절기의 기의(시니피에)와 기표(시니피앙) 틈새에서 ‘입’과 ‘똥’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의 모습을 발견한다. ‘한 덩어리 똥’과 ‘늦게 가는 시계’의 알레고리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들어갈 땐 더없이 귀(貴)하던 것이/ 더없이 천(賤)한 신세로 나오는 동안’과 ‘화려하던 단풍 산/ 바싹 말라 덧없어지는 동안’의 ‘나’는 ‘똥’이 된다. 자아 성찰의 시이다. ‘맞춰 놔도 고집스레/ 한 칸씩 뒤처지는’ 시계는 ‘삶의 고단함’ 때문이라고, 내 안에 꿈틀대는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고자하는 ‘반란의 유전자’ 때문일 것이라고 눙치지만 화자는 ‘그 자식,/ 좀 천천히 가자니까…’로 절박한 심정을 고백한다.

인간은 항상 자기를 응시하면서 마음자리를 돌이켜 보며 내재해 있는 진인(眞人, 참나)을 만나야 한다. 생(生)이라는 허무의 바다를 건너 참자아를 찾아가는 삶, 그 자체가 오늘날, 우리에게 화두로 다가온다. 소소한 일상을 유머와 함께 버무려 나지막이 속삭이는 시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닫이 미닫이도 없이
기둥만 서 있는 문

없음이 곧 경계라서
안과 밖이 따로 보이지 않는 문

수없이 많은 문을 열고 닫으며 살지만
내게 있어 오히려 내가 열지 못하는 문

보이지 않음을 경계로 서 있는
내 마음 속 일주문 밖에서
나는 오늘도 하염없는
떠돌이였네.
─ 〈일주문(一柱門)〉 전문

‘떠돌이’가 아닌 것이 어디 있으랴. <내게 있어 오히려 내가 열지 못하는 문> 앞에 나는 서 있다. 내 안에 있는 ‘마음’의 ‘문’인 것이다. ‘마음’은 모든 욕망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깨달음의 궁극적인 장소가 된다. ‘없음이 곧 경계라서/ 안과 밖이 따로 보이지 않는 문’을 사이에 두고 ‘나’라는 주체는 소멸되고 ‘떠돌이’로 살아가고 있다. ‘여닫이 미닫이도 없이/ 기둥만 서 있는 문’은 진공묘유(眞空妙有)로 존재하는 세계이다.

진공은 ‘참다운 공(空)’을 말하며 묘유는 ‘묘하게 존재함’을 의미한다. 진실로는 비어있지만 현상으로는 존재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떠도는 구름과 떠도는 바람처럼 나 자신도 ‘떠돌이’로 묘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오직 빈 하늘로 존재하는 마음이 떠돌이 사랑, 떠돌이 미움 속을 헤매고 있다. 모든 것이 허상이며 가유(假有)인 까닭이다. 그 안에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 우리 모두 바람처럼 인연에 따라 왔다가 인연에 따라 갈 뿐이다.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근원을 환기시키는 시이다.

<일주문(一柱門)>은 기둥을 일렬로 세워 불교의 진리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불이(不二)라는 실상을 보여준다. 부처와 중생, 진(眞)과 속(俗)이 둘이 아니며 만법이 한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의미이다. 세속의 번뇌로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고픈 시적 화자의 열망이 담겨져 있음을 읽는다.

삼수령*에 떨어지는 물 한 방울
그게, 알고 보면 오대양이고
오대양도 결국 한 방울이어서
나도 한 방울 물이라는 거지요.

삼수령 고갯마루 아침 바람이
인천 앞바다 석양으로 타오르면
해운대와 경포대 모래톱 사이로
물 한 방울 스며들고 있다는 소식이지요.

*삼수령(三水嶺):강원도 태백시 적각동에 있는 고개(해발 920m).
─ 〈물 한 방울〉 부분

‘한 방울’은 바다가 되고 ‘오대양’이 되며 다시 ‘한 방울’로 세계는 돌고 돈다. <진여법계(眞如法界)> 곧 ‘하나가 곧 일체요(一卽一切). 일체가 곧 하나(一切卽一)’라는 불교적 사유가 녹아있는 시이다. 서로서로 통하여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바로 하나라는 것이다. ‘삼수령’(三水嶺)은 강원도 태백시 적각동에 있는 고개이다. 화자는 강원도 태백에 있는 고개에 바람이 불면 ‘인천 앞바다’에 ‘석양’이 떠오르고 ‘해운대와 경포대’에 ‘물 한 방울이 스며든다’고 한다.

모든 사물은 그것을 그것으로 있게 하는 수많은 원인과 조건에 의한 상호의존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보는 불교의 연기설의 요지이다. 즉 세계는 나를 내포하고 나는 세계를 내포하여 모든 것이 하나로 연관되어 있다는 관점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다.’는 것이며 모든 대립과 차별을 넘어서 나와 세계가 근원적인 합일에 도달한 경지를 뜻한다. 하나가 되는 동일성의 세계이며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둘이 아니라(不二)는 것이다. ‘물 한 방울’과 ‘오대양’이 다르지 않고 ‘나’와 ‘한 방울의 물’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시인의 이러한 사유를 통하여 일상적인 삶에 의미를 부여하므로 실존적 한계 상황을 초월한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 전이되어진다.

낯설지 않다. 이 서늘함.
작년 아니면 10년 전 아니면 천 년 전
천 번 아니면 열 번 아니면 한 번 정도는
느꼈던 것 같다.
내 몸이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의 느낌을
지금 내가 기억하는 것은
작년 아니면 10년 전 아니면 천 년 전부터
물과 불과 바람과 흙먼지로 떠돌다가
어머니의 자궁으로 동그랗게 말려들어갔다가
퐁, 퐁, 퐁 샘물로 솟아 나온 탓이겠지.
~
작년 아니면 10년 전 아니면 천 년 전의 내가
천 년 뒤 아니면 10년 뒤 아니면 내년의 나를
흘려보내고 있다.

솟구쳐 하염없는 발원(發源).

*검룡소: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에 있는 소(沼). 한강의 발원이다.
─ 〈검룡소에서〉 부분

화자는 검룡소의 ‘샘물’에서 ‘천상으로 통하는 지상의 한 구멍’을 발견한다. ‘천 년 전’의 나와 ‘천 년 뒤’의 내가 뒤엉켜 솟아오르고 흘러내리고 있는 ‘구멍’이다. 태초 이전과 이후의 세계가 함께 있는 것이다. ‘물’은 수많은 생명의 원형적 에너지, 즉 모태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시에서 ‘자궁’과 ‘샘물’은 동의어로 생명의 원천이며 그 곳에서 화자는 ‘내 몸이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의’ ‘나’를 만난다. 그 느낌을 ‘낯설지 않은’ ‘서늘함’이라고 했다. 그것은 인간과 더불어 천하 만물이 모두 지니고 있는 본래의 자성, 즉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본성이 아닐까. ‘자성이 불성이다’라는 말처럼 자기 본성을 깨닫는다면 우주의 근원 즉 궁극적 진리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솟아’와 ‘솟구쳐’의 시어는 ‘샘물’과 ‘발원(發源)’과 닿아있다. 솟구치는 것들은 그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 발생적인 것이다.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자기 안에 있는 불성을 찾으라는 시인의 목소리가 샘물처럼 솟아나온다. 원초적 상상력을 토대로 샘물에서 인간 존재의 근원을 발견하며 생명력 가득한 태초의 세계로의 회귀를 꿈꾸는 것이다.

2. 일상의 환기

아─ 하고 놀랍니다.

깻단이 삭아가는 밭이랑 끝
엉성하게 문 닫힌 집 곁에
노파는 야트막한 무덤으로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여름 내내 노파는 참깨를 다 털고
새집 지어 이사를 갔으되 멀리는 가지 못하고
살던 집, 참깨 밭 곁에 무덤으로 앉았다가
새봄이면 다시 참깨 씨를 뿌리려나 봅니다.


내년 여름, 노파는
새하얀 머리 빗질하고 나와
탁, 탁, 탁 저승의 손으로
이승의 참깨를 털고 있을까요?
─ 〈참깨 털던 노파는 무덤으로 앉아〉 부분

일상은 한없이 가볍거나 무겁다. 한 조각 구름처럼 피었다가 사라지는 삶. 고즈넉한 생의 순간이 고소하게 펼쳐진다. 그 속에서 시인은 진리의 세계를 잠시 엿보고 있다. ‘여름 내내 노파는 참깨를 다 털고’ 가을에는 ‘참깨 밭 곁에 무덤으로 앉아’ 있다. ‘노파’가 ‘무덤’이 된 것이다. 이승과 저승이 함께 있는 풍경이다. 삶과 죽음을 분별하지 않는 것이다. ‘새봄이면 다시 참깨 씨를 뿌리고’ ‘내년 여름’에는 ‘이승의 참깨를 털고 있을까.’ 여기서 ‘참깨’는 인간이 힘겹게 등에 지고 있는 ‘업(業)’이 아닐까. 저승에 가서도 끊을 수 없는 것들. 삶이란 결국 끊임없이 견디어 내야할 ‘업’일 것이다. 삶이란 그렇게 또 뜨겁게 이어지는가 보다. 지금, 이 시간 영겁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뫼비우스 모퉁이 어디쯤을 지나는 것일까. 시간은 우리의 생 위에 선명한 화인을 찍으며 돌고 돈다. 무상함이 스며든 일상의 편린 속에서 숭고한 순간들이 유난히 반짝이는 이유다.

1.
가을 깊은 조계사 근처 골목에서
모퉁이 돌아가는 원명(圓明) 스님을 보았다.
오랜만이라 인사라도 하려고 달려갔는데
빈 골목엔 바삭바삭 오동잎만 마르고 있었다.
사무실에 와서 그 스님 걸음 참 빠르더라 말했더니
여자 후배, 나직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 스님 몇 년 전에 돌아가셨잖아요?

2.
총각 때 두 여동생과 삼청동으로 이사를 왔다.
따로 살던 세 남매가 한 집으로 모인 것인데
이삿짐 다 풀고 나니 필요한 게 많았다.
낙원시장으로 뭘 좀 사러 가는 길에 아차,
지갑을 갖고 오지 않았다.
정독도서관 앞 좁은 골목 ‘국제연등회관’에서
원명스님에게 5만원을 빌려 쌀도 사고
바가지와 빗자루도 샀었다.

그 돈, 내가 갚았는가 어쨌는가?

3.
영어도 잘하고 바둑도 잘 두던
성철스님의 상좌 원명스님
밝은 곳으로 돌아갔다는 그 스님
조계사 근처에서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그때를 대비해 5만원은 꼬불쳐 둬야겠다.
─ 〈건망증〉 전문

서로 얽히고 스민 기억의 자리에서 ‘원명스님’의 출현은 ‘건망증’ 있는 화자의 기억을 일깨워준다, 혜능스님의 ‘오도송’에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즉 ‘마음이 머무르는 참된 바탕은 맑고 깨끗함으로 이루어져 있어 티끌이 낄 수 없다’는 내용이 있다. 맑고 깨끗한 자연 그대로의 시인의 심성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따뜻한 시이다. 화자는 ‘원명스님’에게 빌린 5만원으로 ‘쌀도 사고/ 바가지와 빗자루도’ 산다. 여기서 ‘쌀’은 육신의 양식만이 아니며 ‘바가지와 빗자루’는 눈에 보이는 용도를 넘어서는 의미로 재탄생한다. 그것은 마음과 정신의 양식이며 소중한 것을 담거나 쓸데없는 헛것들을 쓸어버리는 역할로 읽어지기도 한다.

또한 ‘5만원’은 ‘원명스님’에게서 얻었던 마음의 빚에 대한 것이 아닐까. 평생 간직하며 이생에서 두고두고 갚아나가야 할 자비와 깨달음에 대한 채무일 것이다. 이러한 따뜻한 기억의 무늬들이 서로를 끌어당기며 힘든 현실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깨달음의 물결이 행과 행 사이를 천천히 건너며 과거와 현재의 시간 속에 발자국을 남긴다.

높은 곳일수록 바람이 많다.

이승과 저승을 지키듯
우뚝하던 관문, 그땐
낮은 곳에 모의(謀議)가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허리춤, 그 아래 어디쯤
은밀하게 속살 파고 든 터널
시간당 100Km도 넘는 속도로
이쪽과 저쪽이 내통할 줄이야

대관령 옛길 고갯마루엔
전성기를 날려버린 여가수의 노래만
하품처럼 맴돈다.

높은 곳일수록 바람이 맵차다.
─ <대관령> 전문

‘높은 곳일수록 바람이 많다.’고 했다. 그것이 넘을 수 없는 ‘높은 곳’이라면 그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하지만 ‘낮은 곳’, ‘허리춤, 그 아래 어디쯤/ 은밀하게 속살 파고 든 터널’을 가지고 있다. <이쪽과 저쪽이 내통>한 터널이다. 이쪽세계와 저쪽세계가 통하는 ‘터널’이다. 그렇게 한순간 뚫리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상세계를 지향한다. 그것은 이상과 현실의 거리, 인간이라는 조건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세계는 현실에서 만나기 어렵다. 터널을 뚫고 갈 것인가.

옛길의 구불구불 고개를 넘어갈 것인가? 그것은 각자의 선택의 몫이다. 하지만 ‘높은 곳’의 ‘바람’은 지금도 계속해서 ‘맵차게’ 불고 있다. ‘높은 곳’에 가본 사람만이 그 ‘바람’의 맛을 안다. 누구나 한 번쯤 넘어야 할 고통의 고개일 수도 있고 한편, 그것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존재케 하고 삶의 한 가운데로 당당히 걸어갈 수 있게 하는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세계에는 인간의 힘으로 넘을 수 없는 고개들이 있다. 그 고개들을 넘어가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살아간다. 기다림과 희망의 발자국을 찍으며 높은 곳을 향해 한 발 앞으로 내딛는 것이다. 고통을 넘어서야 꽃이 피고 고통이 여물어야 씨가 된다. 언어로 꽃피워낸 시편들은 일상 속에서 고통의 무늬를 발견한다.

3. 깨달음의 환기

해가 지면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온다.

~~
붓다의 혈족인 것이 괴로웠던 데바닷다여,
진정 너를 괴롭게 한 것은
네 안에서 들끓는 욕망이란 걸 일깨워 주려고
밤마다 촛불 밝혀 온 몸 태우는 저 군중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촛불보다 뜨거운 욕망은
전생부터 이끌고 온 카르마(業)여서
아직도 붓다를 죽이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데바닷다여,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는 붓다를
아무리 밟아도 주눅 들지 않는 영혼을
더 이상, 미친 코끼리도 돌덩어리도
손톱 밑에 숨긴 독약일지라도 어쩔 수 없어
오히려 선명하게 타오르는 저 촛불의 행렬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군중 속의 데바닷다여,
밖에서 구경하는 데바닷다여,
무수한 붓다를 죽이려는
무수한 데바닷다여,
─ 〈데바닷다〉 부분

촛불집회가 온통 거리를 덮던 그 때 시인은 그 속에서 붉게 타오르는 진리를 본다. 거역할 수 없는 어떤 세상을 본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의 친척으로 남달리 큰 야심을 품고 무서운 음모를 꾸며 부처님을 해하려 한 <데바닷다의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데바닷다의 사건은 실패했지만 부처님의 일생에서 가장 큰 아픔이었다.
시인은 ‘데바닷다 사건’과 ‘촛불 집회’를 함께 병치시켜 현대인의 삶 속에 내재된 불온성과 어리석은 인간 욕망의 날카로운 징후들을 시 안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 어떤 ‘미친 코끼리도 돌덩어리도/ 손톱 밑에 숨긴 독약’도 ‘촛불의 행렬’을 막을 수 없고 ‘오히려 선명하게 타오른다’고 한다. 여기서 ‘촛불’은 진리를 향한 열망이며 곧 진리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촛불보다 뜨거운 것이 욕망’이다. 수많은 ‘데바닷다’들에게 ‘진정 너를 괴롭게 한 것은/ 네 안에서 들끓는 욕망’이라는 것이다. 번뇌에 휩싸인 인간의 모습이다.

‘여래는 폭력에 의해 목숨을 잃는 법이 없다.’는 부처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우리 모두 ‘군중 속’에 있거나 또는 ‘밖에서 구경하는’ ‘데바닷다’들이다. 즉, 피를 나눈 한 민족이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천둥 같은 울림이 우리의 심장을 쿵쿵 두드린다. 사회성 짙은 시 안에서 생의 이면을 잠식하고 있는 이 시대의 문제점을 드러내어 진리와 욕망 사이에 방황하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우물에 빠져 넝쿨에 매달린 사람
아래는 독사가 우글우글해도
떨어지는 꿀방울을 받아먹기에 정신없을 때
넝쿨을 갉아먹던 두 마리의 쥐
대장경을 갉아 먹은 그놈들이지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나의 시간 속을
밤낮으로 기어 다니는 흰 쥐와 검은 쥐
내가 죽은 뒤에도 그놈들의 이빨은
나의 시간을 갉아 먹을 것입니다.

시골 쥐도 아니고 서울 쥐도 아닌 신분으로
어정쩡한 한 생을 살아내는 것도 힘겨운데
온 몸의 핏줄을 갉아 먹는 두 마리의 쥐
징그러워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불갑사 대웅전 흰 쥐와 검은 쥐는
오늘도 부처의 공양물과 중생의 업보를
경전 읽듯 갉아 먹고 있답니다.

사각 사각 째깍 째깍
사각 사각 째깍 째깍

내가 죽고 당신이 죽고
흰 쥐와 검은 쥐가 다 죽어
쥐죽은 듯한 세상이 올 때까지.
─ 〈쥐죽은 듯한 세상이 올 때까지〉 부분

시간은 폭포처럼 떨어지는가, 강물처럼 흐르는가. 아니면 바슐라르의 말처럼 순간 솟구쳐 오르는 촛불 같은 것일까. 시간을 가득 채우는 것은 무엇일까? 때로는 시간을 팽창시키고 수축시키는 기억의 파편들……. 인간이 짊어질 수밖에 없는 깊고 어두운 심연 속에 시간이라는 의미는 어떻게 다가오는가. 시적화자는 ‘내가 죽은 뒤에도 그놈들의 이빨은/ 나의 시간을 갉아 먹을 것’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화자는 ‘두 마리의 쥐’를 ‘잡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떨어지는 꿀방울을 받아먹기에 정신없기’ 때문이다.

<안수정등(岸樹井藤)>의 일화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재로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밧줄 끝에 대롱대롱 달려 떨어지는 꿀을 핥고 있는 인간의 어리석은 생에 대한 통찰적 시선으로 욕망 속에 갇힌 삶의 공허함을 끊임없이 일깨워준다.

‘쥐죽은 듯한 세상’은 ‘내가 죽고 당신이 죽고’ 나와 너의 분별이 없고, ‘흰 쥐와 검은 쥐가 다 죽어’버린 세상, 시간의 개념조차 없는 세상을 말한다. 시간을 초월한 시간 밖의 세상이다. 화자가 꿈꾸는 깨달음의 세계이다.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도달하는 열반의 세계로 모든 욕망이나 집착을 벗어난 무(無)나 공(空)의 경지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시가 궁극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사라진 새로운 공(空) 세계로의 열림을 시사하고 있다. 즉, 텅 비어 있으면서 동시에 가득 차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보이는 것은 모두 허상이며 모든 게 사라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고 공(空)만 남는다. 즉 어떠한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공(空)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도 쥐들이 ‘사각 사각 째깍 째깍’ 밤낮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각 사각 째깍 째깍’ 너와 나, 우리의 시간을 갉아 먹고 있다. 삶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을 내장한 시들은 각박한 요즘의 세태에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쥐죽은 듯한 세상’이 화자가 꿈꾸는 세계라면 그것이 더욱 구체화 된 것이 다음 시에 그려져 있다.

노을 젖은 언덕 위
암소 한 마리가 풀을 뜯고 있다

뱃속에 품은 새끼 몫까지
그 새끼의 새끼 몫까지
뜯어도 뜯어도 돋아나는 업보까지
노을 같은 혀로 뜯어 먹고 있다

길들일 그 무엇도 없는 본래의
한가로움 속으로 어둠이 내리고
언덕위엔 풀꽃 같은 별이 뜬다
암소가 둥그런 배를 깔고 누워
눈처럼 흰 소로 변신한 제우스가
아름다운 여인 유로페를 등에 태워
유괴했다는 황소자리별의 전설을
되새김질 하는 동안

뱃속의 새끼는
동자(童子)를 찾아 떠난다

들끓는 마음속 마구니를 길들여
눈처럼 흰 등에 태우고
어미의 뱃속으로 돌아오기 위해
─ 〈심우도(尋牛圖)〉 전문

<심우도(尋牛圖)>는 인간의 본성을 찾아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목동이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해 묘사한 것으로 곧, 선(禪)을 닦아 마음을 수련하는 순서를 소에 비유하여, 소를 찾고 얻는 과정을 깨달음을 얻는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들끓는 마음속 마구니’는 마음 속 번뇌의 상징적 표현이다. 즉 ‘뜯어도 뜯어도 돋아나는 업보’처럼 자라나는 인간의 욕망 즉, 삼독(三毒)인 탐욕〔貪〕과 성냄〔瞋〕과 어리석음〔痴〕을 말한다. 화자는 ‘마구니’ 즉, 삼독(三毒)을 길들이고 다스려서 ‘어미의 뱃속’인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길을 떠난다. 생(生)의 근원적 반성과 함께 본래의 자리를 뒤돌아보게 한다. 고요한 마음의 평정 속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모든 형상들을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것이다. 텅 빈 원상 속에 만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참된 지혜를 상징하는 것이다. ‘길들일 그 무엇도 없는 본래의/ 한가로움’의 모습은 나를 모두 비워 굳이 본성에 집착할 필요조차 없는 전부가 공(空)인 세계를 말한다. 이때의 ‘소’는 완전히 ‘흰’색으로서 동자와 일체가 되어서 피안의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화자는 번뇌를 떠나 현세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오늘도 길을 떠난다. 인간이 가진 외로운 내면과 깨달음에 대한 열망을 투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듯하다.

임연태 시인의 불교적 사유의 시들은 혼란 속에 방황하는 우리를 고요한 성찰의 세계로 이끈다. 삶의 근본적인 성찰을 통해 모든 욕망이나 집착을 벗어난 자유로움의 경지를 맛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시인에게 있어 언어는 삶을 비추는 하나의 프리즘이다. 세계 밖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나 자신 밖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다. 거칠고 황량한 현실 속에서 삶의 고단함을 끊임없이 이겨내기 위해 시인은 오늘도 시 속으로 들어간다. 삶에 숨겨진 희망의 기미를 찾아내어 긍정적 세계를 끌어안는 시인의 시선에 우리가 주목하는 이유이다.

임시인은 ‘시인도 출가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시적궁극(詩的窮極)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몸과 마음, 시간과 공간, 사유와 언어의 개념마저 떠나는 것이다. 생(生)과 사(死)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간들, 그 틈으로 또 새로운 계절이 다가온다. 소멸하는 시간들이 환하게 꿈꾸는 그 소중한 순간이다. ■

 

김미정 | 2002년 <현대시>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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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우가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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