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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미당 10주기, 이제 떳떳이 부활을 알려야 할 때 / 이경철

문근영 2014. 4. 30. 11:30

미당 10주기, 이제 떳떳이 부활을 알려야 할 때 / 이경철
[47호] 2010년 11월 08일 (월) 이경철 문학평론가

   
사후 더 모질었던 10년의 세월

올해는 미당 서정주 시인의 10주기. 그러니까 2000년 12월 24일 밤 11시 조금 넘겨, 미당은 이 땅에서 85년간 쉬어 온 숨길을 놓아 버렸다. 남의 가슴 쿵쿵 울리는 시를 쓰려 자신의 심장 쪼아가다 사그라지던 조선의 그 좋은 숨결을 아주 놓아 버렸다. 때마침 겨울 마른하늘에선 눈이 펑펑 쏟아지며 즐거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고 있었다. 그 눈발을 타고 미당은 우화등선(羽化登仙), 그토록 바라던 신선의 하늘로 날아갔던가.
그리고 꼭 10년 후인 이 계절 ‘가장 미당다운 시인이 제10회 미당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문이 문단에서 왁자지껄 들려온다. 이 소문 아닌 평판이 내겐 미당의 부활, 조선 시의 부활처럼 들려 즐겁다. 미당 사후 10년, 그와 시에 대한 모진 세월을 직접 보고 겪고 견디고 뚫어내야 했던 내게는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정확하게는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던 10월 7일 저녁 오봉옥 시인이 찾아왔다. 오봉옥 시인이 누구던가. 《붉은 산 검은 피》란 시집을 펴내 ‘빨갱이 시인’으로 잡혀갔다가 풀려났고, 민중시 운동을 펼치다 어느 날 문득 미당을 조선의 최고 시인으로 읽은 《서정주 다시 읽기》를 펴내 가져다줬던 시인. 민중시 운동을 펼치면서부터 고은 시인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모셔오고 있는 시인이다. 그런 고은 시인이 노벨문학상 후보로 유력하게 올라 코앞에 발표만 앞둔 시점이라 자연 오 시인과의 대화는 미당과 고은 시인의 이야기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먼저 고은 시인이 이번엔 꼭 상을 받아 한국문학을 빛냈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더욱 간절히 나눴다. 그러면서 자연 미당과 고은 시인의 관계, 지금 한국시의 흐름, 그리고 올 미당문학상 수상자와 지난 10년간 미당 평가의 변화와 한국 시단의 난맥상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기 시작했다. 미당과 고은 시인. 떠올리기만 하면 땡감 씹은 듯 아리고 떫은맛. 표면의 역사적 사회적 당위와 내면의 우리 인간네 삶의 진정과 깊이. 그렇다면 문학, 시는 우리 사회와 인간을 굴리는 두 바퀴, 이 표리부동의 어느 편에 가까운 것일까 등등. 하여 미당의 10주기를 맞아 이번에는 내가 몸소 보고 겪은 미당 사후 10년을 한번 찬찬히 둘러보는 것도 우리 시단에 아주 의미가 없는 일은 아닐 것.

한 천년이 다음 천년으로 넘어가는 1999년 가을부터 관악산 자락 미당 댁을 뻔질나게 찾았었다. 건강도 그렇고 산 이름만 외고 있다는 그 속은 모르겠지만 또 뭐도 그렇고 해 당시 미당은 두문불출,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키고 있었다. 그런 미당에게 새천년 첫날에 독자들에게 보여주고픈 시 한 편 기어코 받아내고 싶어 미당 댁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천년을 소재로 해서 영원을 자연스레 갖고 놀 시인이 이 땅에 미당밖에 더 있었겠는가.

찾아가면 부인이 안에서 “누구신가?” 하고 묻기만 하고 문을 따주지 않았다. 다음에 또 찾아가면 주무시니까 안 된다 하고 또 다음에 찾아가면 해 다 저물녘이라서 안 된다 하고 또 다음 날 아침에 찾아가면 아침부터 웬일이냐며 안 따주고. 그러길 한 열 차례, 마침내 미당 댁 문을 열 수가 있었다. 큰절 올리며 시 청탁하고 나서 원고료를 건네니 그 돈을 활짝 펴 흔들며 아내한테 자랑하며 웃던 얼굴, 그 죄 없이 좋고 환하던 웃음이 내가 마지막 본 미당의 좋은 얼굴이었다.

“밤새워 긴 글 쓰다 지친 아침은/ 찬술로 목을 축여 겨우 이어가나니/ 한 수에 오만 원짜리 회갑시 써 달라던/ 그 부잣집 마누라 새삼스레 그리워라./ 그런 마누라 한 열대여섯 명 줄지어 왔으면 싶어라.” 돈을 흔들며 좋아라 하던 그 천진스런 얼굴에서 이 〈찬술〉이란 시가 저절로 떠올랐다. 미당이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느냐며 그러니까 ‘철부지 말당’이란 비난부터, 재밌고 천진하니 그래 미당 아닌가 하는 무릎 치는 찬탄까지 받게 한 바로 이 시가 떠오르며 내가 받게 될 새 천년시는 과연 얼마짜리 시일까가 궁금했다.

하루를 천년같이 영원을 빚은 조선 최고의 시인

“우리는 첫째로 우리 아이들을 잘 길러내야겠다./ 백두산이나 한라산보다도/ 이왕이면 에베레스트 산만큼 센,/ 그래서 이 세계에 실력을 발휘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게 해야겠다. // 해와 달이 밤낮으로 그 빛을 다하듯이/ 언제나 목숨의 빛을 제대로 나타내는/ 그런 여무진 사람들이 되게 해야겠다.// 하로를 천년같이 넉넉히 살며/ 천년을 하로처럼 꾸준히 사는 / 그런 끈기를 길러내야겠다.”

그렇게 얻어낸 〈2000년 첫날을 위한 시〉 앞 부분이다. 미당의 마지막 시이기도 한 이 시는 미당 전용 원고지 ‘봉산산방용전(蓬蒜山房用箋)’에 쿡쿡 눌러 칸칸이 다 찰 만큼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그러나 글자 획들이 톱니처럼 심하게 떨려 기력이 쇠진해 가고 있음을 그대로 전하고 있었다. 이 시를 받아본 신문사 편집국 간부들도 위 시 〈찬술〉에서와 같이 평판이 엇갈렸다. 너무 밋밋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소리가 시가 되느냐, 그래 그러니 부러 흉내 낼 수 없는 천의무봉의 미당 아니냐 등등.

2000년 1월 1일 자 〈중앙일보〉에 한 면을 거의 다 차지하며 이 시가 나가자 진보 진영 쪽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미당이란 이름 자체가 새천년 첫날을 잡쳤다는 것이다. 아마 이런 소리에 더 이상 상할 가슴도 없어 미당은 말년에 두문불출, 산 이름만 외웠던 건 아닐는지.

그렇게 냉담한 시류(時流)와 담쌓으며 지내다 2000년 10월 10일 아내와 사별한 미당은 그만 숟가락을 놓아 버렸다. 아내를 고창 선산으로 내려보내는 날 미당은 방에 누워 “이 불쌍한 사람 지금은 고속도로에 접어들었구먼. 이제 하늘도 편안하다던 천안을 지나고 있네. 아니 이 사람 지금은 묻히고 있구먼. 그 옆에 내 자리도 훤히 보이는구먼.” 하며 간호하던 제자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 한다.

그리고 아내도 없는 이 땅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 자제들이 있는 미국행을 결심했다. 겉으로는 그곳에서 당신을 잘 보살필 며느리와 병을 잘 치료해 줄 의사 아들을 내세웠지만 이 땅을 영영 떠나야만 할 그 속내야 어찌 편할 수 있었겠는가. 비행기도 못 오를 정도로 건강이 악화돼 미국행만은 막을 수 있었던 게 한국시의 자존을 위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해로하다 한쪽 먼저 가면 남은 쪽도 곧 따라간다 했던가. 곡기를 끊고 연명하길 50여 일, 다음 날이면 병원으로 옮긴다 하여 댁을 찾았다. 좁은 마당에 여기가 천년 시인의 집이라 알리는 듯 의연히 서 있던 오동나무가 마지막 한 잎을 쿵 하고 커다랗게 떨어뜨렸다. 조선 시인 이미지를 대표하던 그 좋던 얼굴과 풍채는 반쪽으로 사그라져 사진을 찍어 내보낼 수 없었다. 그래 줄곧 간호하며 마지막을 정리하던 제자에게 병원에 옮기더라도 기자들 출입은 어떻게든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옮긴 병원으로 찾아가 보니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쾌유를 빌며 보낸 난이 눈길을 끌었다. “하늘이/ 하도나/ 고요하시니/ 난초는/ 궁금해/ 꽃 피는거라”는 미당 육필 시 〈난초〉가 떠올랐다. 며느님이 찻숟갈로 떠 넣어주는 요구르트와 홍시로 입술만 축이고 잠에 빠지는가 싶더니 뭐가 궁금했는지 스르르 눈을 뜨고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어떠신가. 이만하면 나도 시인으로 불릴 수 있겠남.” “그럼요. 선생님이 조선의, 아니 세계의 가장 큰 시인이시지요.” 미당과 마지막 대면에서 나눈 말. 이 짧은 한 마디씩 나누고 미당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스르르 잠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다 다시 병원을 옮겨 영원한 잠으로 빠져든 것.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병실이 아니라 부음 기사를 위해 신문사로 뛰어갔다. 타계가 눈앞에 보이는 저명인사의 부음 기사는 미리 써 놓는 것이 신문사의 상례. 그러나 미리 잘 써 놓으려 해도 그런 기사는 한 줄도 안 써졌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부음 기사와 해설 기사 두 꼭지 합쳐 2백자 원고지 15장 분량이 1시간 만에 주르륵 써졌다. 필사보다도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아! 미당과 고은, 아리고 떨떠름한 맛이여

기사를 마치고 병실로 달려가 빈소 마련을 도왔다. 출근 시간 전부터 조문객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내가 얼굴을 아는 문인 중 아마 가장 먼저 빈소를 찾은 분이 고은 시인이었을 것이다. 나는 하 반가운 마음에 선생님이 첫 손님이시다며 정중히 인사하고 다음날 신문에 싣겠다며 이제 미당 선생이 가셨으니 조시(弔詩)나 조사(弔辭) 한 편을 부탁했다. 아직 마음의 정리가 안 됐다며 나중에 좋은 글로 답하겠다고 정중히 거절했다.

아! 미당과 고은 선생. 미당이 급히 쇠약해져 가던 1999년부터 나는 고은 시인에게 졸랐었다. 미당 선생과 함께 금강산길 오르시면 안 되겠느냐고. 만나기만 하면 그렇게 간청하곤 했다. 하도 졸라대니 “경철이, 술만 먹으면 또 그 소리구먼.” 하던 분이 마침내 “그래 한번 그렇게 해봄세.” 했다. 아, 그러나 그건 시인 개인의 정 깊은 속내, 어디 당시 시류가 민주화의 큰 어른에게 그게 가당케 놔두기나 했겠는가.

그 일이 성사는 안 됐지만 앞에서 끌든지 뒤에서 밀어주든지 하며 금강산을 오르는 미당과 고은 사진을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싣고 싶었다. 그 사진 한 장으로 하여 사생결단으로 치닫던 이 사회의 이념의 골을 메워보고 싶었다. 세기말 스산한 풍경을 인간다운 정, 시정(詩情) 넘치는 풍정으로 바꿔보고 싶었다.

그런 심정으로 졸라대 왔던 터에 빈소를 제일 먼저 찾은 고은 시인을 보니 그리 반가울 수밖에. 사제지간의 정으로 미당의 조시 한 편 따뜻이 써 준다면 이 또한 금강산 사진에 버금가는 사회적 효과를 낼 수 있을 터. 그러나 이마저 못 이루고 급히 이문구 선생을 찾아 조사를 청탁했다. 당시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으로 있던 이문구 역시 같은 사정으로 청탁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

그러나 이문구는 흔쾌히 받아들이며 이제야 선생님 영전에 따뜻한 술 한 잔 올린다며 예의 명문장을 써 주었다. “미당에게 시인 이상의 무엇을 요구하는 것은 오답을 유도하거나 위답을 기대하는 뒤틀린 심사”라며 천생 최고의 시인에 대한 예우를 갖춘 조사. 정부도 최고 시인에 대한 예우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고 전 매스컴이 미당의 타계를 대서특필하고 그 좋은 시들을 낭송하며 연말연시를 넘겼다.

새해가 되자 나는 미당과 황순원문학상을 나란히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먼저 신문사 내에서 상 제정 취지와 규모, 운영 등 대강의 협의를 마쳤다. 같은 해 태어나 한국 시와 소설을 대표하다 같은 해 타계한 미당과 황순원. 세기가 바뀌고 삶의 양식이 달라진다 해도 결코 변해서는 안 될 인간성과 한국인의 정체성, 그리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그분들의 이름으로 확대, 심화시켜 나가자는 취지에서였다.

최고 권위의 시·소설문학상을 만들어 오늘의 한국문학과 문인들에게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해서다. 최고의 이름에 걸맞게 상금도 시 한 편에 5천만 원, 중·단편 소설 한 편에 5천만 원으로 하기로 했다. 상의 권위를 위해 심사의 객관성과 공정성은 물론 포괄성과 투명성에 특히 관심을 기울여 후보작 추천, 예심, 본심의 3심 제도를 택하기로 했다.

상 제정의 대강이 마련되자 신문사 간부들과 함께 유족 측을 만나 뜻을 전하고 협조를 구했다. 황순원 측과는 신중하게 잘 협의가 돼 나갔으나 미당 측과는 처음부터 난관에 부닥쳤다. 해방 후 미당이 잠시 근무했고 집안과도 내력이 있는 신문사와 먼저 상 제정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던 것. 해서 미당 제자 문인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유족 측을 수차례 설득해 마침내 허락을 받아냈다.

그래 후원 기업도 알아보는 등 두 문학상 제정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다 미당문학상은 뜻밖의 큰 난관에 부딪혔다. 아니 미당이 사후 마땅히 넘어서야 할 큰 벽에 부딪혔다. 고은 시인이 그해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장문의 〈미당 담론〉을 발표했던 것. 그 글에서 고은 시인은 “상대가 일제든 해방 이후의 집권세력이든 권력의 편에 존재함으로써 시인의 특장인 음풍농월의 가락 속에 일신의 안보를 유지했다.”고 비판했다. “근현대사의 고행 가운데서 아직도 역사의 진실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삶과 문화의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며 미당을 준엄하고 혹독하게 비판하고 나섰던 것이다.

준엄한 역사와 인간의 정 깊은 속내 사이

아뿔싸, 눈앞이 캄캄할 정도로 뒤통수를 호되게 맞은 것 같았다. 이념으로 갈가리 갈린 사회를 인간의 정으로 화합하기 위해 금강산 같이 가시라 그리 졸라댔건만, 이문구 선생이 미당을 그렇게 재단하는 것은 ‘뒤틀린 심사’라 미리 말했건만…… 고은 시인의 장문은 그야말로 역사적 당위를 내세운 ‘실천적 담론(discourse)’의 거대한 줄기가 되어 가지를 쳐나갔다.

대표적 진보 문인들이 ‘역사적으로 흠결이 있는 문인을 기리기 위해 신문사라는 공적 기관에서 문학상을 제정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논지의 칼럼 등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지역 지부들이 반대성명을 내기 시작했다. 신문사 앞에서 반대 피켓을 든 시위도 시작됐다.

고은 시인의 담론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삶과 역사를 시에 덧씌우는 것은 문학을 왜곡하는 것’이란 문학원론적인 것에서부터 ‘미당이 과연 민족과 역사의 이름으로 단죄될 만한 친일과 친독재 행각을 벌였는가는 앞으로 더 엄밀히 밝혀내야 할 것’이란 입장까지. 심지어는 ‘조선 최고의 시인이 되기 위한 시적 아비의 살해’란 사제지간을 내세운 사적인 비난까지 나왔다.

〈미당 담론〉으로 야기된 미당 반대는 신문사 간부들을 매우 당혹스럽게 했다. 그래 올해는 일단 황순원문학상만 제정, 시행하고 미당문학상은 좀 더 논의해 보자는 이야기도 나오기 시작했다. 어떤 결론이 나오든 회사의 결정에 따르겠다며 나는 회사에 아무 통보도 않고 백담사로 떠났다. 며칠째 신문사 앞에서 ‘미당문학상 제정에 반대한다’는 피켓을 들고 서 있는 열 살 남짓한 어린애의 그 해맑은 눈동자를 보면서.

유월 백담사 계곡은 정말 푸르고 푸르렀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하는 미당의 〈푸르른 날〉 운율이 초록 햇살로 무늬져 왔다. 백담사 계곡 푸른 물살만 바라보았다. 푸른 햇살과 흰 물살이 어우러지며 빚어내는 속물살의 흰 그늘. 겹겹 초록 흰 그늘의 물무늬만 하염없이 바라보니 나는 왜 이곳에 왔고 미당문학상이란 무엇인가를 되뇌고 있는 나 자신이 물살에 비치기도 했다.

그렇게 사나흘 물바라기만 하고 있을 때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우리 신문사에 미당문학상을 밀어붙일 문화적 마인드와 역량이 없는 것은 아니니 속히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그래 나는 백담사에서 내려와 두 문학상 제정을 마무리하고 6월 27일 자 신문을 통해 그동안의 경과와 제정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렸다.

시류에 휩쓸릴 수 없는 한국인의 마음자리를 위해

“올 초부터 추진된 문학상 제정 과정에서 황순원 선생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었으나 미당 선생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미당 생전부터 논란이 돼온 친일, 친독재 부분 때문이다. 특히 미당 사후 고은 시인의 강한 비판의 글이 나와 제정 여부를 더욱 신중히 따졌으며 지면을 통해 논쟁의 장도 마련했다.

미당에 대한 논쟁은 올곧은 역사의식에 의한 단죄와 한국 최고 수준의 시적 성과에 대한 옹호로 계속 평행선을 그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미당 사후 대부분의 신문과 방송들은 큰 지면과 장시간을 할애해 미당을 ‘국민시인’으로 치켜세워 한국문단의 큰 상실로 받아들이며 추모했다. 이것이 미당에 대한 국민 다수의 정서요 평가이고 정부에서도 ‘미당에 대해서는 시로 말해야 옳다’ 며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또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학번역원이 실시한 최근의 여론조사 결과 우리 국민이 한국을 대표해 세계에 가장 알리고 싶은 시인은 미당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국민 다수의 뜻과 정서, 시류에 휩쓸릴 수 없는 ‘한국인의 마음자리’, 어떤 한 면으로 재단되어서는 안 되는 다층적 삶의 깊이와 자존을 위해 〈중앙일보〉는 이 상을 제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반대 시위하는 어린이의 눈에서, 백담사 계곡의 물무늬에서 곰곰이 보려 했던 게 바로 이 ‘한국인의 마음자리’. ‘그래 애야, 안다. 네가 왜 이렇게 서 있는지. 너희에게 올곧은 역사와 사회를 물려달라는 것 아니겠니. 장하구나. 그러나 애야, 너도 커 속 깊은 네 마음을 들여다보면 알겠지만 우리네 삶이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란다’란 말을 속으로 하며 그때까지 더운 햇볕 아래서 시위하고 있는 애를 시원한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주며 격려하고 싶었다.

미당문학상이 제정된 직후 그해 제1회 수상자를 내기 위해 심사에 들어가는 것도 녹록지 않았다. 공정성, 객관성, 포괄성, 공개성의 원칙에 따라 심사위원을 위촉했으나 진보 진영의 문인들이 정중히 거절했다. 몇몇 문인들은 수상이 가당치 않을 텐데도 예심 후보로 오르는 것조차 섣부르게 거절하기도 했다.

지난 1년 동안 발표된 모든 시를 대상으로 추천, 예심, 본심의 3심의 심사를 통해 정현종 시인의 〈견딜 수 없네〉가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당시 연세대 교수였던 정현종 시인은 학생들과 일부 제자 시인들의 수상 반대 시위에도 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어떻든 잘 익은 술이나 김치의 맛과도 같이/ 그다지도 곰삭은 그의 노래의 맛은/ 느낌의 영매(靈媒)의 이 또한 곰삭은 몸과 마음에서/ 샘솟아 흘러나온 것이니 / 괴로우나 즐거우나/ 세상살이의 맛을 한결같게 하는/ 노래의 일미행(一味行)이 아니고 또 무엇이랴./ 감정이거나 욕망이거나 꽃이거나 바람이거나/ 그 노래에서 새로 태어난 사물의 목록/ 그 탄생의 미묘한 파동의 목록을 우리는 아직/ 다 작성하지 아니했느니./ (한 나라 한 부족이 대접을 받으려면/ 문화적 보물이 있어야 하는 건 뻔한 얘기)/ 나는 술잔을 앞에 놓고/ 한국어의 한 자존심 그 보물 중에서/ 내 십팔번 〈푸르른 날〉을 불러 본다.”

미당 타계 직후 정현종 시인이 발표한 추모시 〈노래의 자연〉 위 한 대목이 수상 이유로 충분할 것. 이 제1회 선정을 두고 이 자리에서 해명해야 할 사실 한 가지. 오규원 시인의 사후 “미당의 시는 좋아하지만 작가론의 관점에서 그 이름이 붙은 상은 감당하기 어려우며 같은 신문사에서 시상하는 소설 부문 황순원문학상 상금이 5천만 원인데 시 부문 미당문학상 상금이 3천만 원인 점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미당문학상을 고사했다는 ‘비화’가 시인 제자의 글로 알려졌는데 실상은 이렇다.

예심에서 올라온 오규원 시인을 포함한 후보 10명을 대상으로 본심 결과 수상작이 선정되고 난 후 다른 후보들의 근작시편들을 모아 수상작품집을 펴낼 때 작품 수록을 거부한 것이다. 신작 시집 출간을 앞두고 있기에 중복 게재는 시인의 개결했던 양심상 곤란했기에. 물론 소설보다 시가 상금이 적은 것은 시인의 드높은 자존심으로 수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상금이 원래 5천만 원에서 3천만 원으로 깎여 제정된 것은 반대시위 때문. 시의 자존을 위해 언젠가는 소설과 같은 금액으로 복원되야 마땅할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상이 제정돼 시행되는 데도 미당 이름의 추모사업은 여전히 험난하기만 했다. 특히 1주기 추모행사 때의 그 아프고 따뜻했던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기일을 앞둔 2001년 12월 23일 문인들은 고창 미당 묘역에서 조촐하게 추모제를 가졌다. 눈이 펄펄 내리는 가운데 ‘문학 하는 사람치고 그분한테 밥 한 끼 술 한 잔 얻어먹지 않은 사람 없는데 세상인심 참 야박하다’는 말들을 해가며 묵묵히 찬술만 건넸다.

이후로도 추모행사 때마다 방해가 심했다. 아예 찻길을 막고 고창 미당문학관 행사장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미당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조용조용히 지하공간에 모인 시낭송회에서는 불현듯 마치 초기 기독교 신도들이 로마의 카타콤베에서 몰래 예배드리는 듯한 풍경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래 올 10주기를 맞아 지난 1월 27일에야 문인 1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공식적으로 미당서정주기념사업회가 첫 발을 뗄 수 있었다. “반만년 민족의 정한과 풍류와 신명을 모국어로 가장 아름답게 풀어낸 미당시를 기념하는 사업을 국민과 함께 펼치겠다”며.

가장 미당다운 시, 가장 시다운 시가 대접받아야

나뭇잎은 물든다 나뭇잎은 왜 떨어질까?
군불 때며 돌아보니 제 집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꾸물대는 닭들

윽박질린 달이여

달이 떠서 어느 집을 쳐부수는 것을 보았다
주소를 적어 접시에 담아 선반에 올려놓고

불을 때고 등을 지지고
배를 지지고 걸게 혼잣말하며
어둠을 지졌다

장마 때 쌓은 국방색 모래자루들
우두커니 삭고
모래는 두리번대며 흘러나온다
모래여
모래여
게으른 평화여
말벌들 잉잉대던 유리창에 낮은 자고
대신 뭇 별자리들 잉잉대는데

횃대에서 푸드덕이다 떨어지는 닭,
다시 올라갈 수 있을까?
나뭇잎은 물든다
―장석남 〈가을 저녁의 말〉 전문

제10회 미당문학상 수상작인 장석남 시인의 〈가을 저녁의 말〉 전문이다. 수상작을 발표한 기사는 “장석남은 역시 시인이다.”(유종호) “미당에 너무 부합하는 게 걱정일 정도로 적절한 수상 아닌가 싶다.”(남진우) “본심에 오른 10명 중 가장 편차가 없고 가장 미당적인 시인이다.”(천양희)라는 본심에서 나온 이야기까지 전하고 있다. 장석남 시인을 가장 잘 드러낸 이 촌평들 가운데 ‘미당에게 너무 부합하는 게 걱정’이라는 말이 지난 10년간 미당문학상의 저간을 말하는 것 같아 폐부에 와 닿는다.

부처님의 품은, 그늘은 넓다고 했는가. 미당문학상의 포괄성을 위하여 그동안 미당시와는 전혀 다른 경향의 수상작도 내 왔었다. 그때마다 수난당하면서도 미당시를 사랑하는 다수 시인의 속내는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역차별에, 배신감에 끓어오른 속내가 터지기 직전에 가장 미당다운 시인의 수상을 알렸으니 ‘걱정’이 아니라 ‘다행’일 것. 이를 계기로 이제 내놓고 미당다운 시, 아니 시다운 시가 시 대접을 제대로 받았으면 좋겠다. 언제까지 한참 아랫것들인 지성과 사회과학, 실험에 주박당하는 모진 세월을 시가, 시인이 견뎌낼 수 있겠는가.

물맛을 차차 알아간다
영원으로 이어지는
맨발인,
다 싫고 냉수나 한 사발 마시고 싶은 때
잦다

오르막 끝나 땀 훔치고 이제
내리닫이, 그 언덕 보리밭 바람 같은,

손뼉 치며 감탄할 것 없이 그저
속에서 훤칠하게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그 걸음걸이

내 것으로도 몰래 익혀서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랑에도 죽음에도
써먹어야 할
훤칠한
물맛

-장석남, 〈물맛〉 전문(《유심》 5, 6월호)

이 시에 대해 나는 그다음 호 본란을 통해 ‘어쩜 냉수 맛을 이리 자연스럽고 훤칠하게 형상화했을까, 과연 장석남 시인이군’이란 탄성을 절로 지르며 “보리밭 밟고 가는 푸른 바람 같이 맨발로 영원으로 이어지는 토종 샘물 한 바가지 오랜만에 마셔본 느낌”이라 적었다. 이 시가 후보작으로 다시 신문 지면에 발표됐을 때 참 반가웠는데 수상작을 다른 시로 내건 것은 맹물 맛같이 너무 밍밍해서인가.

어쨌든 수상 소식에 고창 미당문학제에 참석해 청중 앞에서 상기된 채 시를 낭송하던 장석남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미당의 시 세계와 어법마저 본뜨려 했던 시인, 그러다 마침내는 물활론적 세계를 스스로 열어 가는 언어에 도달해 영원까지 가는 시인. 이 젊은 시인이 이제는 이 상을 타 미당도 부활하고 한국시 전반에 대한 평가의 잣대도 역사나 연구나 실험 쪽보다 시 자체와 독자 쪽으로 기울어졌으면 아주 좋겠다.      

 

이경철 
문학평론가, 동국대 문창과 겸임교수. 동국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와 문화부장, 문화전문기자, 《문예중앙》 주간으로 일하며 다수의 현장비평적인 평론과 산문을 발표했다. 저서로는 《천상병, 박용래 시 연구》와 공저 《대중문학과 대중문화》 《천상병을 말하다》, 편저 《한국 현대시 100년 기념 명시》, 명화 100선 시화집 《꽃필 차례가 그대 앞에 있다》 《시가 있는 아침》 등이 있다.

 

<가져온 곳: 유심 홈 >

http://www.yousim.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26

 

출처 : 시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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