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탄한 사유와 통찰의 시 | ||
| 홍일표의 좋은 시 찾아 읽기(25) | ||
| 시멘트 최원준 벽은 벽돌로 환원될 수 없다 벽돌과 벽돌이 만나 하나의 벽을 이룰 때 시멘트는 벽돌들 사이의 이루어지지 않는 약속, 커다란 벽을 세우기 위한 접착력 강한 거짓말이다 벽은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벽돌 없이 완성될 수 없지만 시멘트는 거꾸로 벽돌의 가치를 결정짓는다 벽돌은 정해진 규격에 따라 일정한 크기와 무게를 지녀야 하고 규칙을 벗어나는 벽돌은 벽의 일부가 될 수 없다 일단 벽이 세워지면 시멘트는 벽 속에 숨어 혹시나 있을지 모를 벽돌들의 이탈에 대비해 단단하게 굳기 시작한다 당신이 하얗게 질려 있건, 체념한 회색이건, 붉게 달아오르건 벽 밖으로 뛰어내리지 않는 한 시멘트는 당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일부 시인이나 평론가들은 ‘하나’의 가치를 주장하면서 ‘모든’ 시의 가치여야 함을 강변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교묘한 현학적 수사로 위장한 논리는 얼핏 상당한 객관성을 확보한 듯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스스로의 작위적 언술에 도취한 자가당착의 논리만 돌올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이 시를 쓴 시인은 등단한 지 얼마 안 된 신인이지만 근래의 젊은 시들과는 지향점이 다르다. 서정시의 일반적인 문법에 기초하면서 기존의 서정적 감각과는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사유의 깊이와 남다른 개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점이 ‘하나’의 가치에 매달려 가볍게 부유하는 여타의 시들과 구별 짓는 요소이기도 하다. 벽과 벽돌, 그 사이에 시멘트라는 질료가 있다. 시멘트는 ‘접착력 강한 거짓말’이요 ‘벽돌의 가치를 결정짓는’ 사물이다. 즉 시멘트는 근대적 사유의 상징이며 사회의 제도적 폭력이나 획일화된 이데올로기이다. 달리 말하면 생명을 죽음으로 이끄는 실체이고 반생명의 구체적 사물이다. 벽돌은 시멘트에 의해 그 가치가 결정되는 대상일 뿐이다. ‘정해진 규격에 따라 일정한 크기와 무게’를 지녀야 하고, ‘규칙을 벗어나는 벽돌’은 제도권의 구성원이 될 수 없다.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도와 구조에 적응해야 하고, 그것을 거부할 때는 생존의 토대를 잃어버리게 된다. 공포와 체념, 불안과 분노로 들끓으면서도 벽돌은 벽의 일부가 되어간다. 시멘트는 벽돌의 이탈을 막기 위해 서서히 굳기 시작하고, 마침내 벽은 거대한 구조물이 된다. 벽은 너와 나를 가로막는 장벽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절망이며 반생명이다. ‘벽 밖으로 뛰어내리지 않는 한’ 벽돌은 차가운 주검이요 피가 흐르지 않는 관념의 덩어리일 뿐이다. 결국 생명의 실체로 살아 숨쉬기 위해서는 벽을 깨고 이탈하는 수밖에 없지만 현실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으며 획일화된 질서와 제도에 구속되어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쓸쓸한 초상이다. 그 때 가래침을 칵 뱉으며 흰 눈 위를 성큼성큼 걸어가는 한 시인이 있다. 그의 이름을 사람들은 김/수/영이라고 부른다. 어느새 우리들 곁에서 잊혀져가는 이름이지만, 일부 젊은 시인들 중에는 김수영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도 있지만.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
-'문화저널21'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우가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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