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예 평론가 나민애가 뽑은 이달의 좋은 시 - 8 | ||
| □ 김규동, 「거지시인 온다」, 《실천문학》 2011. 여름. 철없는 모더니스트 시절 명동에서 내 친구들이 새까만 얼굴의 천상병이 나타나면 야, 저기 거지시인 하나 온다라고 우스갯소리 했지요 상대 나왔다는 친구가 뭐 저러냐 너 또 200원 줘라 그렇잖아도 널 알아보고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빈정댔지요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때 천상병이를 거지시인이라 놀려주던 친구들은 다 시인이 못 되고 천상병이는 시인으로 남게 되었군요 영원히. # 김규동 시인의 신작시 2편이 이번 계절《실천문학》지에 실려 있다. 여기 인용한 작품 외에 「왜 권정생인가」라는 제목의 작품이 함께 수록되었다. 「왜 권정생인가」에서 시인은 권정생이 왜 우리 모두의 시인이었고 스승이었는지에 대해 적어 놓았다. 하지만 정작 그는 ‘권정생’에 대한 기억을 풀어놓기 위해 그 작품을 쓴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보다 김규동 시인은 ‘참된 시인’에 대한 확인을 위해 권정생의 삶을 들여 왔다. ‘참된 시인’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김규동 시인을 바라보는 우리와 삶을 바라보는 김규동 시인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 되어 준다. 김규동 시인에게 ‘참된 시인’이라는 이 광막하고 모호하고 장기적인 질문은 시인의 인생 전체를 규정하는 최대이자 최후의 명제인 것이다. 여기 인용한 작품 역시 마찬가지이다. 김규동 시인은 거지시인 ‘천상병’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영원히 남을 만한 시인의 가치와 덕목이 무엇인지를 말한다. 시인은 365일과 세상과 세간이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후에도 남을 작품의 진정성으로 자신을 증명한다는 것. 이것이 인용시가 드러내려고 한 바, 원로 시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시의 기둥이다. 우리는 다시 묻는다. 시인과 시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만 했는가. 이것은 어떻게 쓰여지기 이전에 왜 쓰여져야 했는가. 이런 원론적인 문제를 담당할 수 있으며 담당하는 것이 원로 시인의 작업이라는 점을 우리는 최근의 김규동 시인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 이윤학, 「내가 당신 곁을 떠도는 영혼이었듯이」, 《시산맥》 2011. 여름. 서로의 머리에 삶은 계란을 깨먹던 시절 우리 곁에서 탱자 꽃들이 깔깔거리며 피어났고 우리도 깔깔거리며 우리의 철길을 걸었다 하늘의 거울에 담겼던 우리 거울의 하늘에 담겼던 우리 웃음이 유일한 호칭이었던 날들 우리는 거기에서 서로의 심장을 해부해 보였다 닮은꼴을 찾기 위해 서로의 실핏줄 하나까지 확인했었다 우리의 등은 납작해진 기숙사 매트리스 빈 집의 적요를 안고 수많은 만(灣)들을 누볐다 바닥의 차가움에 정박한 우리 해국(海菊)이 피어난 백사장에 도착한 우리 햇볕이 달군 백사장을 굴러다녔다 갓 피어난 해국(海菊)에게서 잊히지 않는 기억을 선물 받았다 고운 모래를 내뱉으며 깨어난 우리 날은 어둡고 빈틈없이 어둡고 발작은 멈추지 않았다 허망을 오르가즘으로 바꾼 우리 빈 집 방 한 칸 지붕이 날아간 빈 집 방 한 칸 별들을 불러 모았다 유리가루 버석거리는 소리 흩어지는 입김을 멈출 수 없었다 내가 당신 곁을 떠도는 영혼이었듯이 당신이 내 곁을 떠도는 영혼이었듯이 빙평선이 둘러쳐진 우리 곁에서 하염없이 떨고 있는 믿음 약한 영혼들 우리가 곁이라 믿었던 날들은 수많은 자갈 아래로 꺼져 내렸다 서로의 머리에 계란을 깨먹던 시절 서로의 구부러진 터널을 빠져나왔다 까마득한 눈빛을 담고 있는 철길의 왕복터널 양방향 끝을 유심히 담고 있는 볼록거울 내가 당신 곁을 떠도는 영혼이었듯이 당신이 내 곁을 떠도는 영혼이었듯이 # “서로의 머리에 계란을 깨먹던 시절”이라는 표현이 신선하고 좋다. 우리가 함께 있어 가장 좋았던 시절, 그래서 ‘실낙원’이라든가 그로인한 불행과 결핍이라든가 하는 말이 아직 가당치 않았던 시절을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음을 배운다. 누군가는 이 시절을 철없음이나 미망과 같이 부정적인 함의를 담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홀로서기를 하지 못하는 나약함이나 인간적 성숙도가 부족한 시절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약하거나 모자라면 또 어떠한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가 바로 그 미망의 유치하고 철없고 부족한 세월을 토대로 현재를 살고 있다는 점이다. 단지 과거로서 존재한다는 말이 아니다. 나와 당신이 함께 했던 시절은 현재의 ‘빙평선’을 견디게 해주는 기억과 웃음의 찬란한 경험을 선사했다. 시인은 중간의 구절에서 “믿음 약한 영혼들”이라는 말을 했다. 무신론자들에게 이 말은 인간 존엄을 훼손하는 불경이고, 유신론자들에게 이 말은 고해성사의 유죄 덕목일 테지만 그저 삶을 삶으로 바라보는 입장에 있어서는 진솔한 사실일 뿐이다. 니체처럼 강인한 사람만이 사람인가. 베드로처럼 강인한 순교만이 삶인가. 홀로서기를 하지 못해도 좋다. “내가 당신 곁을 떠도는 영혼이었듯이, 당신이 내 곁을 떠도는 영혼이었듯이” 함께 해야 겨우 살아가는 것도 우리의 삶이다. □ 홍종화, 「오래된 생불(生佛)」, 《유심》 2011. 5/6. 어미개가 새끼를 11마리 낳았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고 털은 까칠했다 어미개가 탯줄을 잘라 먹고 새끼 똥을 먹어 치웠다 황금 꽃똥을 먹었는데 시꺼먼 설사를 해댔다 어미개가 새끼를 핥아 주었다 양수를 머금었던 강아지들의 털이 녹차밭 같았다 어미개는 배가 홀쭉해도 젖을 먹였다 젖에선 피가 났지만 두 눈만 껌뻑거렸다 장마 지나 개집에 곰팡이가 들이쳐도 어미개는 늘어진 젖을 드러내고 보살처럼 앉아 있었다 그렇게 오는 생불(生佛)은 아무도 몰랐다 # 지난 겨울부터 동물에 대한 비감어린, 그리고 죄스러운 시선을 담은 작품들이 다수 발표되었다. 대부분 구제역 파동과 그로 인한 살처분이라는 사회적 사건에 대해 문학적 반응을 보여준 작품들이었다. 구제역 이전에도 연평도 사태에 대해 작품을 발표한 시인들이 있었다. 더 전에는 촛불 집회에 대한 작품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거시적으로 보면 사회적 사건과 함께하는 시편들이 점차 잦은 빈도로, 더 많은 편수로 등장하는 셈이다. 안타깝께도 사회 현실을 생각해보면 이런 변화를 서정의 기능과 영역이 확대된 증거라 기뻐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구제역에 관한 작품들은 비판, 분노, 속죄, 자책의 직접적인 감정들을 언급한다. 여기서 해당 작품들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겠지만, 대신 홍종화 시인의 시편처럼 동물을 인간으로, 아니 인간 이상으로 우러르는 시선(視線)을 선택했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비판하고, 분노하고, 속죄하고, 자책해야 할 보다 근원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 작품에서 11마리 강아지의 엄마개를 관찰하고 있다. 강아지에게 충실한 모습을 보면서는 사람과 비슷하다는 동일시의 이해 수준에 도달하고, 제 몸을 덜어내는 모습을 통해 대견함과 기특함이 증폭되면서는 사람보다 낫다는 경외감에 도달하게 된다. 이 시는 어미개를 존경한다는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시인은 보다 중요한 것을 전제삼는다. 즉 생불(生佛)이 되는데 사람과 동물의 차이가 없다는 점. 동물이 되고 부처가 되고 사람이 되는 것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행위의 의미에 있다는 점 말이다. 이 시 앞에서 우리는 생불(生佛)은 커녕, 사람이라도 되고 싶다. □ 이사라, 「낙조」, 《시산맥》 2011. 여름. 당신을 떠나올 때 불그스레 웃었던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다행스러웠다 떠나올 때처럼 다시 당신에게 갈 수 있을까 나는 다시 갈 줄 정말 몰랐던 것일까 사람은 사람에게 매달리고 구름은 하늘에 매달리고 싶어한다 사과밭에서 사과나무는 사과를 꽃 피우고 그리고 사과상자 속의 사과가 되어 붉은 얼굴로 나는 다시 당신에게 간다 마치 오천년 전의 은팔찌 하나가 박물관 속 낙조 같은 조명 속에서 오늘을 껴안는 것처럼 # 세상에 하나의 대상 A가 있다고 하자. 물론 이 대상 A는 라깡의 이론과는 무관한, 돌이나 나무나 하늘과 같은 실재하는 자연물이라고 하자. 시인에게 인기가 많은 대상, 이를테면 달이라든가 바다, 또는 하늘이라든가 별 같은 것들은 여러 번-심지어 여러 나라의 여러 시기의 여러 시인들에 의해- 시로 만들어진다. 나는 같은 대상-그것이 개념화된 대상일지라도-을 노래하는 여러 시편들이란, 대상에 대한 낱낱의 페이지를 만들어가는 여러 개의 주석이라고 생각한다. 공자님의 말씀 한 구절에 각 학파의 유학자들이 각주를 달아놓듯이, 조물주의 말씀으로 성립된 대상 A에 대해 여러 시인들이 제각기의 해석과 주석을 달아 놓는다. 윤동주의 별이 이상의 별과 다르고 육사의 별과 다른 것처럼 말이다. 여러 각주 덕분에 우리는 별을 헤면서도 여러 각주들을 짚어가며 노니는 풍성한 행복을 즐기게 된다. 이사라 시인의 「낙조」를 통해서는 노을지는 지평선에 대한 또 하나의 각주를 얻어 듣게 되었다. 새로운 해석을 통해 각주를 늘리는 이 즐거움이야말로 시를 읽는 비평가의 첫 번째 이득이 아닌가 싶다. 이 시인에게 있어 낙조는 오늘 하루 마감을 책임지는 노을이 아니라 1) 박물관 조명이고 2)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웃는 홍조이다. 그래서 낙조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사랑의 증거를 달무리처럼 감싸 안는다. 노을은 하강하는 것이고 이별의 예고여서 일반적으로 슬픔이나 낙심과 같은 의미가 새겨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기존 의미에 사랑의 이별과 기다림의 행복을 덧칠하자 낙조의 처연함이 예쁘게 피어난다.
나민애 편집위원
-'문화저널21'에서 |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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