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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태주 시인과 함께 떠나는 명시여행 (1) - 봄날이 까닭 없이 슬펐어요 / 이상은

문근영 2014. 3. 21. 10:50

나태주 시인과 함께 떠나는 명시여행(1)

 

 

봄날이 까닭 없이 슬펐어요 / 이상은

 

 

덟 살 때
거울을 몰래 들여다보고
눈썹을 길게 그렸지요.

열 살 때
나물 캐러 다니는 것이 좋았어요.
연꽃 수놓은 치마를 입고.

열두 살 때
거문고를 배웠어요.
은갑(銀甲)을 손에서 놓지 않았지요.

열네 살 때
곧잘 부모님 뒤에 숨었어요.
남자들이 왜 그런지 부끄러워서.

열다섯 살 때
봄이 까닭 없이 슬펐어요.
그래서 그넷줄 잡은 채 얼굴 돌려 울었답니다.

 

 

나의 생일은 3월 17일이다. 개구리가 눈을 뜨고 만물이 소생한다는 좋은 계절 봄이다. 그런데 나는 그 봄이 싫고 생일이 들어있는 3월이 싫다. 까닭이 없는 게 아니다. 몸이 아프기 때문이다. 그렇다. 생일이 들어있는 3월만 되면 미열이 오르고 오슬오슬 몸이 아프다. 감기기운 몸살기운 같은 거 같다 그럴까. 다시 내가 세상 밖으로 나가려고 그러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곤 한다. 시인의 예민함이라면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지겠지만 말이다.

더구나 평생 일터였던 교직생활에서도 이 3월은 참으로 어설픈 을씨년스런 계절이었다. 가는 사람이 있고 오는 사람이 있다. 아이들과도 헤어짐이 있었고 새로운 만남이 준비되어 있는 달이 3월이었다. 어린 시절 이래 나는 3월이 가장 넘기기 힘든 달이었다. 그래서 일단 3월만 잘 넘기면 1년은 또다시 잘 살겠거니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3월에 문득 떠오르는 시 한편이 있다. 그것은 저 중국 당나라 시절의 시인 이상은의 시이다. 아 옛날사람 그것도 중국사람 가운데에도 이렇게 3월을 슬프게 생각한 사람이 있었구나. 그것은 하나의 발견이었고 조그만 위로였다.

이상은(李商隱 812~858)은 중국 당나라 말기인 만당(晩唐) 시절의 시인이다. 무성했던 당나라의 문물이 시들어가기 시작하는 세기말적인 시대에 태어나 기성의 질서와 가치를 부정하고 자신의 의식세계만을 중시하여 시를 쓴 표현주의 계열의 시인이다. 자는 의산(義山). 회주(懷州) 하내(河內) 출생. 어려서 영호초(令狐楚) 부자의 사랑을 받아 공부하고 진사과에 급제했으나 영호 씨의 적인 왕무원(王茂元)의 사위가 되었기 때문에 옛날 은인의 미움을 사서 출세하지 못하고 미관말직으로 세월을 보냈다. 재사(才士)였으나 당쟁에 휩싸여 불행하게 산 인물이다.

이 시를 내가 처음 읽은 것은 신춘문예에 당선되던 해인 1971년도. 이원섭 선생이 번역한 『당시』(현암사)란 책에서였다. 볼일이 있어 아버지와 함께 군산에 간 일이 있었는데 그 때 군산서점에 가서 아버지가 선물로 사주신 책이었다. 이 시는 시인의 장기라 할 연애시 가운데 한 편이다. 본래 시 제목은 무제(無題). 한 소녀의 성장과정을 따라가며 그 소녀의 생활상과 정서적 변화를 순차적으로 엮어나갔다. 나열법은 평면적인 느낌을 벗지 못하는데 이를 교묘히 극복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거울을 들여다보고 눈썹을 그리던 여덟 살. 연꽃 수놓은 치마를 입고 나물 캐러 다니던 열 살. 은갑(거문고 연주할 때 손끝에 끼우는 골무)을 끼고 거문고를 배우던 열두 살. 남정네들이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 부모님 등 뒤에 숨곤 하던 열네 살. 그러나 압권은 마지막 열다섯 살 때이다. <봄이 까닭 없이 슬펐어요./ 그래서 그넷줄 잡은 채 얼굴 돌려 울었답니다.> 제법 오래 전(1999~2000년) MBC에서 방영한「허준」이란 인기연속극의 맨 마지막 장면에서 예진아씨로 출연한 여배우(황수정)가 젊은 의녀와 대화하면서 들려준 시가 바로 이원섭 선생의 번역으로 된 위의 시였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봄이 슬픈 데에 무슨 까닭이 있었겠는가? 그냥 슬프니까 슬픈 것이다. 봄이 슬픈 줄 알게 된다면 그는 이제 성인이 된 것이요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갈 준비가 된 것이리라. 나는 또다시 봄이 되어 별다른 이유도 없이 슬프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문득 눈물이 솟아나려고도 한다. 당신도 그건 그러신가? 그렇다면 우리는 봄을 맞을 준비가 되어 올 한해도 아름답게 살아갈 자세가 된 것이다.

원시를 옮기면 아래와 같다.
팔세투조경(八世偸照鏡)/ 장미이능화(長眉已能畵)/ 십세거답청(十世去踏靑)/ 부용작군차(芙蓉作裙衩)/ 십이학탄쟁(十二學彈箏)/ 은갑부증사(銀甲不曾卸)/ 십사장육친(十四臟六親)/ 현지유미가(懸知猶未嫁)/ 십오읍춘풍(十五泣春風)/ 배면추천하(背面鞦韆下)
 

나태주 시인 약력
1945년 3월 16일 충남 서천 출생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대숲 아래서' 등단
2009년 한국시인협회상 2007년 황조근정훈장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회
공주문화원 원장

 

  민문자 문화예술관장 mjmin7@silver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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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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