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새` 시 모음

문근영 2014. 3. 8. 11:02

새/박남수

 
1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 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다스한 체온을 나누어 가진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假飾)하지 않는다.

 
3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새에 지나지 않는다.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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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효

 


산불이 났다
불의 바다 속에는
작은 새 한 마리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새는 나무 위를 맴돌며
애타게 부르짖었다
그 곳에는 새의 둥지가 있었다
화염이 나무를 타고 오르자
새의 안타까운 날개짓은 속도를 더해갔다
마치 그 불을 끄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둥지가 불길에 휩싸이는 순간
새는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리곤 감싸 안았다
갓 부화한 둥지 속의 새끼들은
그리고는 순식간에 작은 불덩이가 되었다
품페이에는 병아리들을 날개 속에 감싸안은 닭의 화석이 있다

  


-시집 성자가 된 개 시학 2006
(『시와사상』 04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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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장석주

 


새, 어떤 규율도 따르지 않는 무리.
새, 허공의 영재(英才)들.
새, 깃털 붙인 질항아리.
새, 작고 가벼운 혈액보관함.
새, 고양이와 바람 사이의 사생아.
새, 공중을 오가는 작은 범선.
새, 지구의 중력장을 망가뜨린 난봉꾼.
새, 떠돌이 풍각쟁이.
새, 살찐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가벼운 육체.
새, 뼛속까지 비운 유목민들.
새, 똥오줌 아무 데나 싸갈기는 후레자식.
새, 국민건강의료보험 미불입자.

 

 

-시집 『절벽』(세계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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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이병률

 


새 한 마리 그려져 있다
 

마음 안이라서 지울 수 없다


며칠 되었으나 처음부터 오래였다


그래서, 그래서


좁은 줄도 모르고 날개를 키우는 새

 
날려 보낼 방도를 모르니


새 한 마리 지울 길 없다
 


-『문학. 선』 (2011.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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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이가림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이음새

 

그래서 사람들은
그 이음새를
줄여 새라 부르나 보다

 

 

-김남조, 이유경, 유재영, 정일근 選 -『좋은 시 2011 』(삶과꿈,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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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문태준

 


누이들의 발길을 따돌려 나는 성황당 지나 밤길의 긴 방죽을 오랜 세월 걸어가니
새는 내 머리맡을 돌다 깊은 산으로 사라졌다
움막으로 노파가 들어가듯
검은 밤나무 가지에 부엉이가 밤톨처럼 내려앉듯
누군가 나를 부엉이 눈 속으로 데려가리라 믿었으나
귀살쩍은 나에게 추파를 던질 뿐
어린 왜가리만 옴쭉달싹 못해 밤 이슥하도록 공중에 걸려있었다
허공에서 쩔쩔매는 저 저울질
별이 다 땅으로 내리기 전 캄캄한 풀들을 묶기도 하며
바람에 무등타고 꼭 산이 아니라도 가고 싶었던 곳
 


-시집『수런거리는 뒤란』(창비,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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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문태준

 

 

새는 날아오네
산수유 열매 붉은 둘레에


새는 오늘도 날아와 앉네
덩그러니
붉은 밥 한 그릇만 있는 추운 식탁에


고두밥을 먹느냐


목을 자주 뒤쪽으로 젖히는 새는

 

 

-시집『그늘의 발달』(문학과지성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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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강미정

 

 

  읽던 시집을 엎어두고 찬물을 얹는 사이 새 그림자가 휙, 시집에 날아들었다 새가 시집을 읽고 갔다 갇혀있던 글자를 모두 물고 갔다 그 짧은 순간 시도 한 줄 써놓고 갔다 시집 가득 눈부신 햇살이 적혀 있다
 

  새가 날아간 쪽으로 끓고 있던 단어 하나를 날려 보낸다 침묵하고 있는 단 하나를 날려 보낸다 몸은 자유로우나 영혼이 자유롭지 못했던 당신이 다녀간다 영혼이 자유로우나 몸이 자유롭지 못한 나를 다녀간다


  끓인 물이 뜸 드는 이 삼 분 깃털처럼 가벼운 그 단어를 새는 날개에 새긴다 시인은 영혼에 새긴다

  차를 우리는 동안, 새는 햇살 한 페이지 펴진 볏가리에서 꽁지깃을 까닥거린다 통통통통 경운기가 지나자 포르르포르르 떼를 지어 난다 낮게 난다 빠르게 난다 감나무 가지 사이로 쏙속 박히듯 빨려들어간다 감나무 잎이 파닥인다


   우려진 찻물같은 당국화 멀티 메일이 도착한다 햇살 소복하게 앉은 감이 발그레 익는다 새가 날아오른다 환한 햇살 속으로 나를 물고 간다 빠르게 시집을 읽고 간다 시집 위에 그림자를 두고 간다 눈부신 소실점이 된다

 


- 계간『시와사람』(2010,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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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새/황영선

 

 

내가 사랑하는 새는 나보다 창공을 더 좋아해서
나는 하늘에다 새들을 풀어놓기로 했습니다
땅 한 평 갖기도 어려운 세상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무한 창공
그러나 그 어디에도 울타리는 치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금방 갑갑해질 테니까요
내가 사랑하는 새는 나를 위해 예쁜 두 발로
살포시 착지하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새를 위해 내 집 마당에 모이를 갖다놓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녀간 뒤에 문 밖에 나가 그의 흔적인 발자국을
가져오겠습니다 아주 나중까지 그가 가물가물 멀어질 때면
그 발자국 위에 내 입술을 갖다대겠습니다
맨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내가 사랑했던 그 새
무한창공을 드나드는 그 일에 생애를 건 새
가끔씩 파도 위에 내려와 쉬었다 가는 새

 

 

-시집『우화의 시간』(2010, 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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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새의 죽음/이재무

 


아침 숲길 걷다가 푸른 죽음을 본다
벌써 굳어 선지가 되어버린 피,
송판처럼 딱딱해진 죽음 손 위에 올려놓고
경건한 눈으로 들여다본다
그가 남긴 짧지만 두꺼운 서사를 읽는 동안
수목 사이 응얼응얼 걸어오는 바람의 기도와
청량하게 흐르는 물의 독경소리
추워 가늘게 떠는 어깨를 감싼다
죽음을 살아오는 동안 새는 자유를 껴입고
즐거웠을까 아니 새장 속 먹이가 부러웠을까
사람들은 너무 쉽게 말하지만
자유 없는 비참과 양식 없는 고통
저 흔한 인습의 저울추로 잴 수는 없다
짧게 살다간 투명한 영혼들
풀잎마다 이슬로 맺혀서는
마음에 묘비명 하나 또 걸어둔다
곧 부패의 시간이 새를 다녀가리라
그는 이제 한마리 벌레 한그루 나무
한포기 풀로 몸 바꿔 또 다른 생 경영하리라
그의 때이른 죽음에 내 지나온 생과
다가올 생 포개 심고 돌아와
정결히 손 씻고 밥 한그릇 달게 비운다

 

-시집『저녁 6시』(창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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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새/김형수

 


 늘 쫓기고는 했네
가슴의 발 내릴 곳 없었지
고향은 춥고
조는 듯 깨는 듯
날다 보면 아득한 하늘 물소리
머물 수 없어 사랑도 참았네
허공 어지럽힌 발자국
바람이 쓸어갈 걸
텃새들의 땅 빌려 쓴 허물
울음까지 뿌리라 말게
커서 쓸 눈물 어릴 때 바닥났으니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서울신문, 2009, 0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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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 앉지 않는 새/이탄

 

 

우리 여름은 항상 푸르고
새들은 그 안에 가득하다.
 

새가 없던 나뭇가지 위에
새가 와서 앉고
새가 와서 앉던 자리에도 새가 와서 앉는다.


한 마리 새가 한 나뭇가지에 앉아서
한 나무가 다할 때까지 앉아 있는 새를
이따금 마음 속에서 본다.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앉지 않는 한 마리의 새
보였다 보였다 하는 새.


그 새는 이미 나뭇잎이 되어 있는 것일까.
그 새는 이마 나뭇가지일까.
그 새는 나의 언어(言語)를 모이로
아침 해를 맞으며 산다.
옮겨 앉지 않는 새가
고독의 문(門)에서 나를 보고 있다.
   


- 시집『옮겨 앉지 않는 새』(문학과예술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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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긴 새/천양희

 

 

물결이 먼저 강을 깨운다 물보라 놀라 뛰어오르고
물소리 몰래 퍼져 나간다 퍼지는 저것이 파문일까
파문 일으키듯 물떼새들 왁자지껄 날아오른다


오르고 또 올라도 하늘 밑이다
몇번이나 강 건너 하늘을 본다
하늘 끝 새를 본다
그걸 오래 바라보다
나는 그만 한 사람을 용서하고 말았다
용서한다고 강물이 거슬러 오르겠느냐
강둑에 우두커니 서 있으니 발끝이 들린다
내가 마치 외다리로 서서
몇시간 꼼짝 않는 목이 긴 새 같다
혼자서 감당하는 자의 엄격함이 저런 것일까


물새도 제 발자국 찍으며 운다
발자국, 발의 자국을 지우며 난다

 

 

-시집『너무 많은 입』(창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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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새/김진환

 


내 손금 허공 속의 길로 날아간
흔적 없는 새
서서 아득한 절망 속에서 본
그리운 새
가없는 눈물의 샘을 건너
기어이 돌아와
내 몸 아픈 가지에 앉아 우는
피 흐리는 새
제 살 제 부리로 쪼는 눈부신 새

 

 

시집『새벽의 내력』(그루,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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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 이향미

 


낡고 어두운 그림자를 제 발목에 묶고 생의 안쪽으로 타박타박 걸어들었을 테지 비에 젖은 발목을 끌며 어린 날개를 무겁게 무겁게 퍼덕였을 테지, 가느다란 목덜미를 돌아 흐르는 제 절박한 울음소리를 자꾸자꾸 밀어냈을 테지 여물지 못한 발톱을 내려다보며 새는, 저 혼자 그만 부끄러웠을 테지, 그러다 또 울먹울먹도 했을 테지


어둠이 깊었으므로
이제,
어린 새의 이야기를 해도 좋으리


나지막이 울음 잦아들던 어깨와 눈치껏 떨어내던 오래된 흉터들을 이제, 이야기해도 좋으리 잊혀가는 전설을 들려주듯,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 낯설고 차가운 이국의 신화를 들려주듯 이제, 당신에게 어린 새를 이야기해도 좋을리


새는,
따스운 생의 아랫목에
제 그림자를 누이고
푸득푸득 번지는 어둠을
쓰윽, 닦아내기도 했을 테지


새는,

 

 

―(2008년 《수주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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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병 속의 새/최광임
 

1
술병에 쓰인 약주, 락주라 생각하며 잔을 기울인다. "차게 해서 드시면 더욱 좋습니다" 아, 마음이 차가워서 너를 찾았는데 너 마저도 차갑다. "좋구나" 너와 내가 속살까지 비치는 햇살을 적시며 넘기는 낮술 한 잔 자, 나뭇가지에 앉아서 자올대는 새를 위해서 한 잔. 가만. 가만. 잔 속에 아버지가 있어. 아버지… 아버지…"네 아버진 고급 룸펜이었어. 평생 네 어머니 골수를 뽑아 술로 마셨던 한량" 평생 알려지지 않는 자아를 끌적이다 부스러진 육신을 술로 적시던 시대적응의 부진아! 그리고 유전?

 

2
그윽한 풍경화, 속없이 앉아 있는 새를 좀 봐. 갑갑함에 취하고 바깥 세상의 동경에 취한 가슴이 퉁퉁 부은 새. 대책없이 불어나는 체증으로나 삶의 부피를 감지하는 여자. 턱밑까지 자란 아이의 키를 보면서 나이를 파악하는 여자. 복숭아 빛으로 웃던 처녀를 기억 속에 가두고 우렁이 각시가 되어 가는 그림 속의 새. 갇혀 있으므로 보이지 않는 세상. 취해서 취해서 움츠린 새. 잔 하나에 담긴 세상 이젠 비워주세요. 남 모르는 아버지의 행간을 더듬으며 건져내는 넋, 파란 날개가 돋고 술병에서 푸드득거리는 소리 들린다. 새가 나는 소리.

 

- 월간『시문학』(2002년 11월)
 -계간『시향』(엘리트 시 100선, 2002,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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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있던 자리/천양희

 


잎인 줄 알았는데 새네
저런 곳에도 새가 앉을 수 있다니
새는 가벼우니까

바람 속에 쉴 수 있으니까
오늘은 눈 뜨고 있어도 하루가 어두워
새가 있는 쪽에 또 눈이 간다
프리다 갈로의 <부서진 기둥>을 보고 있을 때
내 뼈가 자꾸 부서진다
새들은 몇 번이나 바닥을 쳐야
하늘에다 발을 옮기는 것일까
비상으느 언제나 바닥에서 태어난다
나도 그런 적 있다
작은 것 탐하다 큰 것을 잃었다
한 수 앞이 아니라*
한 치 앞을 못 보았다
얼마를 더 많이 걸어야 인간이 되나
아직 덜 되어서
언젠가는 더 되려는 것
미완이나 미로 같은 것
노력하는 동안 우리모두 방황한다
나는 다시 배운다
미로 없는 길 없고 미완 없는 완성도 없다
없으므로 오늘을 눈 뜨고 있어도 하루가 어두워
새가 있는 쪽에 또 눈이 간다

 

어디에나 나를 지켜보는 새의 눈이 있다
 

 

* 밥 딜런의 노래에서 인용

 


- 강은교 최동호 엮음 『드므에 담긴 삽』(서정시학,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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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의 새/장석남

 


노란 꽃 피어
산수유나무가 새가 되어 날아갔다
산수유나무 새가 되어 날아가도
남은 산수유나무만으로도 충분히
산수유나무


너는 가고
가고 나는 이것만으로도 너무 많은
너를
달리 무엇이라고 부르나


길 모퉁이에 박힌 돌에 앉아서
돌에 감도는
이 냉기마저도 어떻게 나누어 가져볼 궁리를 하는 것도
새롭게 새롭게 돋은 어떤 새살肉)인 모양인데


이 돌멩이 속에 목이 너처럼이나 긴
새가 한 마리 날아간다
날아가긴 해도 그 자리에서만 날아가고 있다

 

 

-시집『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창작과비평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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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낳는 새/유하

 

 

찌르레게 한 마리 날아와
나무에 키스했을 때
나무는 새의 입 속에
산수유 열매를 넣어주었습니다


달콤한 과육의 시절이 끝나고
어느 날 허공을 날던 새는
최후의 추락을 맞이하였습니다
바람이, 새의 육신을 거두어 가는 동안
그의 몸 안에 남아 있던 산수유 씨앗들은
싹을 틔워 잎새 무성한 나무가 되었습니다


나무는 그렇듯
새가 낳은 자식이기도 합니다


새떼가 날아갑니다
울창한 숲의 내세(來世)가 날아갑니다

 

 

-격월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08, 3∼4월호. 나무의 노래 - 테마로 읽는 현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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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와 나무/김남조

 

 

아주 가녀린 새 하나
아주 가녀린 나뭇가지 위에
미동 없이 앉아 있다
얼음처럼 깨질 듯한 냉기를
뼈 속까지 견디며
서로가 측은하여 함께 있자 했는가


모처럼
세상이 진실로 가득해진
그 중심에
이들의 착한 화목이
으스름한 가락지를 두르고 있다

 

 

-계간『현대시』(2008,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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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새/김왕노

 

 

제 털을 다 뽑아 자식 둥지 다 만들어주어 헐벗고 추운 겨울 새 한 마리 가고 있다. 리어카에 폐휴지며 빈 박스 가득 싣고 길을 역주행하고 있다. 동행하는 것은 빈 박스로 잠깐 포장된 새벽, 리어카에 가득 실린 폐휴지의 미미한 온기, 그리고 호구지책인 녹슨 리어카, 역주행하는 저 아찔한 순간들, 늙은 새의 희미한 그림자, 제 털을 다 뽑아주어 살이 다 들어난, 뼈가 앙상한 새 한 마리, 날지 못하는 새 한 마리 길을 역주행 중이다. 마주쳐오는 차가 급 브레이크를 밟으며, 뜨거운 욕설을 쏟아놓지만 김 오르는 밥 한 그릇이 진수성찬이고, 밥 한 그릇 눈부신 아침이 천국의 시간이므로 그 곳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다. 사업실패로 어디로 간지 모르는 아들, 집 나간 며느리, 뿔불이 흩어져간 손자, 근심 걱정 없다는 저승으로 먼저 간 남편의 생각이 밤마다 가슴 깊이 얼음으로 파고들지만 저렇게 살아 있다가 기적 같이 다시 털이 자라면, 또 아낌없이 뽑아주어야겠다고 마음 다지는 늙은 새 한 마리, 제 생을 끌고 길을 역주행하고 있다. 털 없는 늙은 새 한 마리 가고 있다.


이 세상 모든 어머니가 그렇게 홀로 가고 있다.

 

 

-월간『현대시학』(2006, 1)
<가져온 곳 : 한국디지털도서관>
http://mylib.kll.co.kr/gen/main_jung.html?kkk=4&sss=1&id=kwn&no=164024&p=11&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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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울고 간다/문태준

 

 

밤새 잘그랑거리다
눈이 그쳤다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넝쿨에
작은 새
가슴이 붉은 새
와서 운다
와서 울고 간다


이름도 못불러 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울음은
빛처럼
문풍지로 들어온
겨울빛처럼
여리고 여려


누가
내 귀에서
그 소릴 꺼내 펴나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가슴속으로
붉게
번지고 스며
이제는
누구도 끄집어 낼 수 없는

 
(『가재미』.문학과지성사. 2006)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흐르는 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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