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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텅 빈 보편성의 시학 -<미네르바> 2011년 봄호, 김광기 신작소시집 <작품평>/ 오홍진(문학평론가)

문근영 2014. 2. 28. 11:36

 

-<미네르바> 2011년 봄호, 김광기 신작소시집 <작품평>


 


텅 빈 보편성의 시학 / 오홍진(문학평론가)


 


 ‘시를 왜 쓰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져 보자. 시를 쓰는 사람이 있는 한 이 질문은 사라지지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그에 대한 탁발(卓拔)한 답이 나오리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모든 사물의 근원에는 그 사물을 만들어낸 ‘무언가’가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그 기원의 대상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 그것이 인류의 현재를 만들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여전히 사람들은 기원에 집착한다.기념일에 들뜨고, 기념일을 잊으면 삶의 무언가를 잊은 듯 허전해한다. 기원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기원으로부터 더욱 멀어지는 역설. 시 쓰기에 대한 질문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기원의 역설과 마주하고 있다. 사물의 기원으로 끊임없이 올라가다 보면 그 무언가가 과연 나타날까? 아니,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물이 과연 있기나 할까?
 
  가락국수 면발 사이에
  파열된 멸치의 몸통 조각이려니 했다.
  눈빛이 반짝, 국물에 젖은
  검은 눈동자가 빛나고 있다.
  작은 눈빛의 강렬함이라니,
  남모르게 세상을 주시하는 눈들은
  그렇게 크지 않다.
  비밀에 싸인 시선이 물빛에 젖었다는 것으로
  잠시 섬뜩한 빛이었다.
  세상의 눈들이 서로를 경계하며
  안팎으로 움츠러드는 동안에
  제 3의 영역에서 깨지지 않을 정도의 질량으로
  어떤 톱니에 끼어도 부서지지 않을 정도의
  작은 부피로 세상을 가늠한다.
  블랙홀처럼 빨려들게 하는
  검은 진주의 가느다란 빛,
  숨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게 하는
  시선, 그 눈빛의 의미는 어떤 느낌으로도
  가닿지 못하는 경계 밖에 있다. 

  - <제 3의 눈> 전문
 
김광기 시인은 멸치의 눈빛을 말하고 있다. 살아 있는 멸치의 눈빛이 아니라, 가락국수 면발 사이에 낀 멸치의 눈빛이다. 죽은 자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나고 있다. 비밀에 싸인 시선은 잠시 섬뜩한 빛을 내뿜기까지 한다. 죽었지만 죽지 않은 멸치의 눈빛은 ‘산 죽음’(지젝)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것을 ‘유령’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다. 유령은 죽어서 이 세상을 떠도는 존재이다. 그냥 떠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상징계의 틈새로 갑작스럽게 들어와 상징계에 익숙한 주체들을 공포에 떨게 한다. 죽은 멸치의 눈빛에 놀라는 시인처럼, 상징적 주체들은 “세상의 눈들이 서로를 경계하며 / 안팎으로 움츠러드는” 관계에 익숙해 있다. 그 눈빛이 그 눈빛이므로, 강렬한 눈빛도 없고 섬뜩하게 느낄만한 눈빛도 없다.
‘제 3의 눈’이라는 시어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일상적인 현실(가락국수를 먹는 것은 일상이다)로부터 갑작스럽게 현시되는 실재의 기습에 시인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그 혼란은 죽은 아버지가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 것과 맞먹는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죽은 자의 눈빛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그 눈빛을 보는 존재 역시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 3의 눈’은 따라서 죽은 자의 현시를 의미화하려는 시적 주체의 열망을 표현한다. 멸치의 눈빛은 “작은 부피로 세상을 가늠하고 / 블랙홀처럼  빠져들게 하는 / 검은 진주의 가느다란 빛,”이다. 정확히 말하면, 시적 주체는 결코 멸치의 눈빛에서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의미화가 불가능하다는 시적 전언을 내포한다. 멸치의 눈빛을 제 3의 영역에 두고, 그곳을 “가닿지 못하는 경계 밖에” 둠으로써 시적 주체는 ‘산 죽음’의 세계와는 다른 일상 세계로 복귀한다.    
시 쓰기의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제기된다. 시인은 일상적인 감각으로는 포섭할 수 없는 멸치의 눈빛을 포착한다. 멸치의 눈빛은 ‘산 죽음’이라는 역설적 존재의 눈빛이며, 따라서 일상적인 현실 속에서는 공존할 수 없는 사물, 요컨대 ‘대상a’(라캉)와 다르지 않다. 대상a와 조우한 시적 주체는 그것이 발산하는 강렬한 빛에 현혹되어 있다. 일상의 빛과는 갈라지는 이 장소에서 사물의 기원을 사유하는 시인의 시선이 생성된다. 멸치의 눈빛을 보면서 시인은 일상의 견고한 구조가 깨지는 상황을 경험한다. 시인이라면 그것은 상당히 행복한 경험이다.
그런데, 그러한 행복은 곧바로 시인을 딜레마에 빠뜨린다. 죽은 자의 눈빛에 매혹되는 순간, 시인은 죽은 자의 현실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니, 죽은 자의 너머를 시인이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락국수를 먹는 시인이 있고, 그 시인을 매혹시킨 멸치의 눈빛이 있다. 시의 형식은 한없이 먼 두 세계(현실)를 하나의 공간속에 표현한다. 멸치의 눈빛이 시의 공간으로 들어오면서, 그것은 일상적인 시선은 미칠 수 없는 ‘제 3의 눈’으로 의미화 된다. 멸치의 눈빛은 제 3의 눈이고, 제 3의 눈은 상징적 주체가 가닿지 못하는 경계의 밖에 있다. 사물에 시적 의미가 부여되면서, 사물의 의미를 벗어나는 ‘무언가’가 시의 공간에 동시적으로 현시된다. 사물이되 사물이 아니고, 보이되 보이지 않는 역설은 ‘텅 빈’ 보편성의 자리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나’라는 원관념이
  ‘너’라는
  보조관념으로
  뒤죽박죽 섞이는
  거리를 보면서
  내가 너에게로 가는
  생명을 부르며
  때로는 질질 끌고라도 가야하는
  길 위에서
  퓨전으로 섞인 문명과
  문화라는 코드들을
  일일이 들춰내서
  펼쳐내는 것,
  거기 문득
  낯설게 서 있는
  그 너머에
  또 어떤 것이 있는지, 

  - <벽> 전문
 
개별적인 상황을 묶어내는 보편성의 힘은 그 힘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 낯선 것들을 보편성의 외부로 배제해 버린다. 보편성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여기서 발생하지만, 그럼에도 보편성은 여전히 이 세상을 사유하는 근본적 개념으로 남아 있다. 문명(보편성)의 이름으로는 환원할 수 없는 ‘그 너머’를 사유하는 위 시에서, 시인은 뒤죽박죽 섞여 있는 문명의 코드를 풀어내서 그것을 일일이 펼쳐내려고 한다. 이 세상을 끌고 가는 수많은 코드들을 풀어내면 그 코드들은 하나의 보편적 코드로 묶일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보편적인 것은 낯선 것을 배제하는 것이다. 낯선 것이 있으면 충만한 보편성의 세계는 이루어질 수 없다. 충만한 보편성의 세계를 갈망할수록 그만큼 많은 것들이 그 세계로부터 배제되어야 한다.     시인은 이러한 상황을 “거기 문득 / 낯설게 서 있는 / 그 너머에 / 또 어떤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문득’이라는 시어에 드러나는 바, 낯선 것은 일상적(보편적이라는 말과 같다)인 것이 아니라 그 일상성을 깨뜨리는 대상a이다. ‘나’라는 원관념이 ‘너’라는 보조관념으로 뒤죽박죽 섞이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나’라는 정체성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그것은 고통스런 자기 확인이지만, ‘나’라는 정체성에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보편성의 감옥으로부터 인간(주체)을 구출한다. 저 먼 곳에 있는 ‘낯선 것’에 대한 시적 선망(羨望)은 인간의 이러한 탈출 욕망을 정확히 표현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욕망이 현실(언어)의 벽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이에 대하여>라는 시를 참조한다면, 사람과 달 사이에는 빌딩이 있고, 그 빌딩숲에서 달은 다만 “애드벌룬처럼 떠 있”을 뿐이다. 달빛은 더 이상 인간을 꿈꾸게 할 수 없다. 달이 뜨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빌딩숲의 불들이 달빛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로 가득 채워져 있지만,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서 시인으로 꿈을 꾼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땅에 묻혀 소멸될 것들이 아니라면
  이리저리 바람에 쓸리다가
  바람보다 더 가벼워진다.
  미세한 것들의 혼들이 이리저리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불고 있다.
  바람이 된다는 것은
  생의 끝에서 마지막으로 선택된 것이거나
  그냥 스치는 것처럼 지상에
  아무런 의미도 없이 버려진다는 것이다.
  바람이 되지 못한 것들은
  어제처럼 바람의 길을 묻고 있다.
  바람이 된다는 것은
  다 채워진 것을 마침내 비워놓는 일이거나
  끝까지 가지 못했던 아쉬움을
  한 순간에 날려버리는 일,
  그 길을 묻는다는 것은
  끝끝내 바람처럼은 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바람이 분다.
  하늘을 쓸고 있는 버드나무 길을 따라
  스스럼없이 바람이 된 것들과
  끝까지 바람이 되지 않겠다는 것들이
  뒤섞이면서 바람으로 날고 있다.

  - <풍장> 전문
 
풍장(風葬)은 바람에 ‘죽은 몸’을 맡기는 것이다. 죽은 이를 땅에 놓고 그 위에 돌을 얹으면 바람과 공기의 작용으로 살은 썩고 뼈만 남는다. 뼈를 거둬 땅에 묻으면 풍장은 끝난다. 물론 시인은 풍장 자체를 그리고 있지는 않다. “스스럼없이 바람이 된 것들과 / 끝까지 바람은 되지 않겠다는 것들”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이 된다는 것은 채워진 것을 비워놓는 일이라고 시인은 이야기한다. 살면서 채웠던 욕망의 덩어리들이 죽어서 바람에 날아간다. 바람이 된다는 것은 그러므로 “아무런 의미도 없이 버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미는 인간의 용어이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는 말처럼, 자연은 사물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죽을 때가 되면 죽어야 하고, 태어날 때가 되면 태어나야 한다. 인(仁)이라는 인간의 윤리로는 포섭할 수 없는 자연의 현상은 인간의 윤리를 뛰어넘는 세계로 시인을 인도한다고 하겠다.
“바람이 되지 못한 것들은 / 어제처럼 바람의 길을 묻고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어제의 질문이 오늘 또 반복된다는 것은 묻는 사람이 여전히 바람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람에게는 길이 없다. 아니, 길이 없는 것이 길이다. 정확히 바람이 가는 곳에 길이 생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바람에게 길은 묻는 것은 “끝끝내 바람처럼은 되지 않겠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그 의미는 인간의 의미일 뿐이다. 바람은 그 의미와 상관없이 자기의 길을 가기 때문이다(“그리하여 바람은 분다.”는 시구에 주목하자). 시인에게 시 쓰기는 어떻게 보면, 바람의 이러한 역설을 따르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바람의 기원을 밝혀낼 수 있을까? 바람에게 보편성의 자리를 부여할 수 있을까? 바람은 텅 비어 있다. 텅 비어 있기에 어디로든 길을 낼 수 있는 것이 바람이라면, 김광기의 시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비어 있음’의 시학과 맞물려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 ‘비어 있음’의 시학이 시적 포즈가 아닌지를 새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산 죽음들’이 제 자리를 못 찾고 여기저기 부유하는 세상에서, 비어 있는 바람의 길은 그 자체 비어 있는 상태로 끝나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타자의 눈에 새겨진 ‘제 3의 눈’은 과연 경계의 밖에만 있는 것일까? 시적 주체는 다만 경계 밖의 사물과 단절된 채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일까? ‘산 죽음’은 타자의 미래가 아니라, 시를 쓰는 사람의 미래는 아닐 것인가. “‘나’라는 원관념이 / ‘너’라는 / 보조관념으로 / 뒤죽박죽 섞이는 / 거리”가 바로 시 쓰기의 근원적 장소는 아닐까. 시인이 밖이라고 말한 그곳이 바로 안은 아닐까. 두서없이 물어본다.
 
 
-오홍진,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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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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