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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예 평론가 나민애가 뽑은 이달의 좋은 시-10

문근영 2014. 2. 28. 11:35

 

신예 평론가 나민애가 뽑은 이달의 좋은 시-10
 
나민애
□ 오세영, 「파도는」,  『밤 하늘의 바둑판』, 서정시학, 2011.
 
간단없이 밀려드는 파도는
해안에 부딪혀 스러짐이 좋은 것이다
아무 미련 없이
산산이 무너져 제자리로 돌아가는
최후가 좋은 것이다
파도는
해안에 부딪혀 흰 포말로 돌아감이 좋은 것이다
그를 위해 소중히 지켜온
자신의 지닌 모든 것들을 후회 없이 갖다 바치는
그 최선이 좋은 것이다
파도는
해안에 부딪혀 고고하게 부르짖는 외침이 좋은 것이다
오랜 세월 가슴 품었던 한마디 말을
확실히 고백할 수 있는 그 결단의 순간이 좋은 것이다
아, 간단없이 밀려드는 파도는
거친 대양을 넘어서, 사나운 해협을 넘어서
드디어
해안에 도달하는 그 행적이 좋은 것이다
스러져 수평으로 돌아가는
그 한생이 좋은 것이다
 
* 오세영 시인은 시력 50년에 가까운 시단의 원로 시인이다. 시인은 긴 시간 동안 시를 쓰면서도 시적 감수성이 마르지 않았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시에 대한 열정을 더하고 있어 시를 쓰는 모든 이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 시인이 가장 최근에 발간한 시집 『밤 하늘의 바둑판』은 정년 퇴직 후 자연에 가까운 곳에서 은둔하면서 낳은 작품들을 모은 결과물이다.   

  우선, 시집의 제목이 의미심장한데 이것은 인공조명과 인적이 드문 곳에서 원천으로서의 자연과 조우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 중에서 인용한 시 「파도는」은 오세영 시인의 가열찬 정신력을 드러내면서도 자연물에 대한 완상의 태도를 더하고 있다. 이 시에서 특히 감동적인 부분은 “스러져 수평으로 돌아가는 / 그 한생”이라는 결구이다. 이 부분은 직전까지 몰아치던 강렬한 포에지가 극적인 절정을 다하고 아름답게 산화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파도와, 강렬함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화되는 장면의 만남이 감동을 넘어 사뭇 아름답다.
 
 
□ 이시영, 「어머니 생각」, 《현대시학》 2011. 7.
 
어머니 앓아누워 도로 아기 되셨을 때
우리 부부 외출할 때나 출근할 때
문간방 안쪽 문고리에 어머니 손목 묶어두고 나갔네
우리 어머니 빈집에 갇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돌아와 문 앞에서 쓸어내렸던 수많은 가슴들이여
아가 아가 우리 아가 자장자장 우리 아가
나 자장가 불러드리며 손목에 묶인 매듭 풀어드리면
장난감처럼 엎질러진 밥그릇이며 국그릇 앞에서
풀린 손 내미시며 방싯방싯 좋아하시던 어머니
하루 종일 이 세상을 혼자 견딘 손목이 빨갛게 부어 있었네
 
* 예전에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는 책이 있었다. 대학갓 들어온 사람들은 공감하지 못할 말이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공부보다 어려운 사회적 책무들을 겪으면서 이 말은 공감을 얻는다. 밑으로는 아이를 키우고, 위로는 부모를 모시고, 옆으로는 사람들을 챙기고 살아야 하는 사람의 생활. 이것은 공부에 비할 수 없이 어려운 일이다.

  병들고 늙은 부모 수발은 마음도 어렵고 몸도 어려운 일에 속하지 않을까. 이시영 시인은 이중(二重)의 어려움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풀어내고 있다. 예전에 가난한 부모가 밭일 나갈 때 아이 허리에 노끈을 매어 문고리나 나무 둥치에 감아두고 갔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아기 된 어머니를 묶어놓고 아들은 출타를 한다. 하지만 나가서도 아들의 발걸음은 ‘섬그늘’의 엄마처럼 늘상 집으로 향해 있을 것이다. 매일같이 마음이 안쓰러울 것이다. 
 
 
□ 정신재, 「문상問喪」,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11. 7/8.
 
딸아이의 병아리가 봄날의 햇살을 쪼던 오후
아프지 마세요란 딸의 말이 이마를 간질이는데
통풍과 오십견과 고혈압지방간이 어깨동무하고 오더니
바람 엄지 발가락을 찌르고
세월이 어깨에 주사를 놓는데
모래 바람으로 흩어질 몸에
생명의 진액을 흘려 보냈던 청춘이 손 흔들며 지나가고
꽃잎을 엮었던 대궁이가 여행을 떠나려는지
머리채를 잡아 흔드는 황혼의 빈혈 앞에
엊그제 악수했던 묵객이 떠났다는 비보
허겁지겁 달려가는 발걸음에 매인 사연
눈물이 말을 하고 공허가 모이를 쪼는데
새싹처럼 일어서는 봄날의 하소연에도
당신의 사연은 영원으로 가는 흔적
마지막 웃음을 항아리에 담으려고
영혼의 집 열쇠를 가슴에 담아가는
우리들 행보는 바위를 닮나 봅니다
 
* “모래 바람으로 흩어질 몸에 /생명의 진액을 흘려 보냈던 청춘이 손 흔들며 지나가고” 라는 구절이 좋다. 많은 사람들은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모르면서도 하루하루 몸이 바스러질 정도로 일을 하면서 시간을 넘긴다. 가끔 허리가 휘청할 정도로 힘들 때가 있고, ‘나는 아직은 젊으니까’라는 생각으로 겨우 버텨나갈 때가 있다. 그러면서 숨이 턱에 닿는 이 일상의 반복을 애써 묵인한다. 그런데 시인의 말을 듣고 보니, 이 청춘의 달리기란 내일을 위한 성실한 저축이 아니라 생명의 진액을 조금씩 방출하는 일이었구나 싶어 허무하다. 나는 이 달리기의 끝에 가면 풍요롭고 한가롭게 앉아 인생과 생명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고역을 견뎠으나 착각이었다. 달리기의 끝에는 진액 다 빠진 껍데기만, 묘비 밑에 누워있을 것 같아 오늘의 인내가 더 두렵다. 
 
 
□ 함민복, 「달」, 《현대문학》 2011. 7.
 
보름달 보면 맘 금세 둥그러지고
그믐달과 상담하면 움푹 비워진다
 
달은
마음의 숫돌
 
모난 맘
환하고 서럽게 다스려주는
 

 
그림자 내가 만난
서정성이 가장 짙은 거울
 
* 함민복 시인의 시집 『말랑말랑한 힘』에도 이런 촌철살인적 작품들이 여럿 담겨 있다. 짧고, 간결하고, 담백하고, 그러면서도 따뜻하고 정확한 대상의 포착. 이것은 이제 그의 장기이자 특색으로 자리매김 했다.

 「달」 시편도 그렇다. 아마 시인은 달을 보며 거칠고 상한 마음을 달랜 기억이 있는가 보다. 울적하고 낙심되고 화가 나는 심정일 때 유전(流轉)하면서도 자리를 지키는 달을 보면서 마음을 달랜다. 달의 기울고 차는 것을 마음에 품어 작고 사소한 일들을 극복할 수 있기를 시인은 기도한다. 이런 시를 쓴 것을 보니 이 시인은 매일 밤 달을 보면서 배우기도하는 자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를 보면서 우리도 삶을 지탱하는 한 가지 방법을 배울 수 있다.  

 
나민애 : 1979년 충남 공주 출생, 2007년 7월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으로 등단, 현재 계간 《시와시》편집위원, kaist 강사. 서울대학교 강사. 주요 평론으로는 ‘무성성의 사랑과 병증의 치유법-김남조론’, ‘여윈 신화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여성 시학의 갈래화를 위하여’ 등.

- '문화저널21'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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