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홍일표의 좋은 시 찾아 읽기(55) - 대상과의 교유

문근영 2014. 2. 28. 11:37

 

대상과의 교유
홍일표의 좋은 시 찾아 읽기(55)
 
홍일표
처마 아래
 
권혁웅
 
겨울비가 손가락을 짚어가며 숫자를 센다
더딘 저녁, 누군가를 오래 세워둔 적이 있었다
여러 번 머뭇거린 뒤꿈치가 만든
뭉개진 자리가 나란하다 창밖을 서성대던
들쑥날쑥한 머리통들 가운데 몇몇이
어느 새 방안에까지 들어와 있었다
검게 엉킨 실타래들을 풀지 못했나
나 간다 이번엔 정말 간다고
카운트다운을 하는 겨울비, 반에서
반의 반으로 다시 반의 반의 반으로
끊임없이 숫자를 줄여가는 저 겨울비
 
 
# 바람수족을 태생적으로 지니고 태어난 사람들은 저녁의 무늬, 그 세세한 속살을 읽어내는 별과 달의 불우한 후예들입니다. 김수영, 김종삼, 박용래가 그러했고, 무지개를 잡아 공작새를 만들던 신현정이 또한 그러했습니다.

 이 시의 화자 역시 크고 슬픈 귀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겨울비의 중얼거림을 듣느라 예민한 귀를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손가락을 짚어가며 숫자를 세는 겨울비의 외로운 뒷모습이 보입니다. 창밖을 서성이는 발걸음, 이제 돌아서야 하는데 돌아서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처마 아래서」가슴 에이며 마음을 접고 쓸쓸히 돌아서야 했던 무겁고 어두운 기억들. 여러 번 머뭇거리고 망설인 과거를 떠올릴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 시에서 겨울비는 이미 이승에 없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낮고 음울한 음조가 죽은 이의 웅얼거림으로 들리는 까닭은 무엇인지요?

 모든 게 ‘검게 엉킨 실타래들’ 때문입니다. 실타래는 풀리지 않고 눈앞은 어둡고 비관적입니다. ‘나 간다 이번엔 정말 간다고’ 말하면서 ‘끊임없이 숫자를 줄여가는 저 겨울비’가 읽는 이의 가슴을 저리게 합니다. 한 호흡씩 끊어가며 내뱉는 다짐이 비극적 정황을 고조시키면서 비장미마저 느끼게 합니다.  

 죽은 이는 아직 생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지 못했는지 여전히 문밖에 서 있습니다. 비 오는 날, 처마 아래로 이끈 한 편의 시 때문에 가슴은 어느덧 먹먹한 밤입니다. 눈 감지 못한 자작나무의 백야는 지금 어디에서 밀봉되고 있는지, 어둠을 뜯어내며 새벽의 우체부는 어느 방향에서 걸어오고 있는지?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창밖으로 보이는 수월봉은 묵묵부답입니다.
 

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문화저널21'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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