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난한 길을 가기 위해 쓰는 시
─『따뜻한 바깥』(나무아래서, 2011)
임동윤
시집 『아가리』를 펴낸 지 6년 만에 여섯 번째 시집을 펴낸다. 좀 더 참신한 언어와 새로운 형식으로 시집을 선보이고자 했으나 나의 게으름 탓인지 여의치 않았다. 다만, 자본주의 세계의 모든 소유를 초탈한 부재의 현실을 담아내고자 한 뜻이 조금이라도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근원적인 면에서 시 쓰기가 절망과의 싸움이고 허무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라면 나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내 시는 가족사의 아픔과 그로부터 빚어진 절망의 비망록, 혹은 일상의 권태와 허무에의 각서로도 충분히 읽혀진다. 그러면서도 고독과 허무, 절망과 시련으로부터 일어서서 생의 극복과 참다운 삶을 성취해내려는 희망의 한 양식으로 단단하게 뿌리는 박혀 있다. 이런 것들이 나를 붙들고 있는 시의 힘, 그 뼈대를 이루는 근본 축이라고 느껴진다.
어린 시절의 시골 기억, 홀몸의 어머니 생각, 모두 떠나 거미와 바람만 주인이 된 시골집, 내 밖의 집은 허물어지고 내 안의 집도 없는 영혼의 무숙자, 익명의 가출인 등등, 스산한 형상으로 가득한 풍경 속에서 나는 따뜻한 바깥을 그리워하게 된다. 이것을 찾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내 시는 풍경의 내면화와 내면의 풍경화가 겹쳐지는 지점에 위치한다. 풍경 속에 스며 있는 미세한 감정의 떨림은 ‘단호한 비명’이거나 ‘불안한 눈빛’으로 자주 나타난다. 상처 입은 적막감을 지니고 흔들리는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소 우울하지만 아주 슬프지는 않은 반투명의 그늘을 드리운다. 우리 삶의 주변에서 만나는 가르랑거리는 숨결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는 가급적 애정 어린 목소리로 형상화 하고자 한다.
따라서 『따뜻한 바깥』은 내가 바라보는 풍경의 내면이기도 하고 내가 소망하는 삶의 풍경화이기도 하다. 그것을 나는 ‘어두울 시간인데도 좀처럼 어두워지지 않고 번지는 물살’엔 ‘형형한 그리움’이 묻어 있다고 간절하게 믿어보는 것이다.
감자꽃이 시들면서/정수리마다 자글자글 땡볕이 쏟아졌다/장독대가 봉숭아꽃으로 알록달록 손톱물이 들고/마른 꼬투리가 제 몸을 열어/탁 타닥 뒷마당을 흔들 때, 옥수수는/길게 늘어뜨린 턱수염을 하얗게 말리면서/잠자리들은 여름의 끝에서 목말을 탔다/싸리나무울타리가 조금씩 여위면서/해바라기들이 서쪽으로 깊어지고 있었다/철 이른 고구마가 그늘 쪽으로 키를 늘이면서/작고 여린 몸도 하루가 다르게 튼실해졌다/그때까지,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옥수수 줄기처럼 빠르게 말라가던 어머니는/밤마다 옥수수 키만큼의 높이에/가장 외로운 별들을 하나씩 매달기 시작했다/그런 날 나는 하모니카가 불고 싶어졌다/문득, 아버지가 켜든 불빛이 그리워졌다/그 여름이 저물도록 어머니는/가마솥 가득 그리움을 모락모락 쪄내고 있었다/단맛의, 차진 알갱이들이 노랗게 익을 때까지
―「찰옥수수가 익는 저녁」 전문
끝없이 이어지는 길의 도정에서 나는 요즘 깊어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어쩌면 길이라는 것이 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생각이다. 모든 것이 세상을 좀 더 깊이, 폭 넓게 들여다보는 내 마음의 문제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깊어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흔히들 생각의 깊이, 시선의 깊이를 가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생각보다는 잘 안 된다. 나는 깊어지기 위해 오늘을 견디고, 깊어지기 위해 내일을 산다. 깊어진다는 것은, 저 흐르는 강물처럼 바다처럼 깊어진다는 것은 욕심을 버려야만 그 끝자락이라도 겨우 잡아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이 깊어지는 도정이 바로 또 하나의 다른 삶임을 나는 깨닫는다. 그러나 그 길은 여전히 비포장 가시밭길이고 계곡이고 벼랑일 것이다.
오늘, 그 험난한 길을 가기 위해 나는 깊어지려 한다. 그러나 깊어진다는 대명제 앞에서 그저 막막해져 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나의 시가 한껏 깊어져서 마지막에는 한 큰 울림의 근원이 되기를 기다려 보는 것이다.
눈 내린 들판에 가서 보아라/여린 풀들이 쓰러지면서 말들어낸/예쁘고 조브장한 짐들을 만나 보아라/모진 바람에 몸 꺽고 피 말리면서도/바닥과 허공사이에 납작하게 지은 집/거기, 꽁지 짧아 추운 새들이 몰려와/둥지 틀고 일가를 이루며 산다/마른풀과 새들이 나누는 은밀한 교감/꽁꽁 언 벌판의 눈시울이 깊이 젖는다/보아라, 가장 연약하고 낮은 것들이/서로 모여 빚어내는 이 은빛 화음을/눈 덮여 더욱 환해지는 작은 집들을/이제 풀들은 죽어서도 든든한 집이다/허공 사이에 지은 눈곱만한 집들/아, 그것을 사랑이라 불러도 좋으리/구절초, 쑥부쟁이, 환삼덩굴이/쓰러지면서 만들어낸 작디작은 공간/저 예쁘고 조브장한 풀집들을/이 겨울 들판에 가서 지켜보아라
―「겨울연가」 전문
나는 사물에 대한 되도록 따뜻하고 밝은 눈을 가지고 싶다. 사물과 자아 사이의 오랜 친화에 온 힘을 쏟아 붓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풍경 혹은 환경에 현란한 수사 없이 그 존재가치를 짚어보고 그 대상으로부터 낮은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이다. 작고 버려진 것들은 많은 시인들이 누구나 즐겨 노래하는 영원한 소재다. 그런데 내 손 끝에서 그들이 힘을 얻고 살아서 이 세상에서 모반을 꿈꾸기를 나는 갈망한다. 봄날 길바닥에 무수히 피어나는 들마꽃들, 구둣발에 짓밟히고 납작해진 그 들마꽃을 일으켜 세워 하늘까지 가슴에 품을 수 있도록 나는 만들고 싶다.
나는 어둠 속에서 빛을 보고 빛 속에서 어둠을 보기를 원한다. 모든 것이 잠든 밤에는 더욱 고요한 어둠을 본다. 이렇듯 나의 응시는 정지된 시간의 응시가 아니라 계속 흘러가는 시간 속의 응시다. 그러므로 내 눈은 유년에서 지금까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내 응시가 고통스런 시간의 끝을 향해서 간다고 본다면 분명 내 눈은 나에겐 깊은 아픔일 수 있다. 자연 속에서도 내가 바라보는 어둠과 빛, 자연에 통하여 길을 찾는 나는 순수 존재로서의 한 시인의 모습으로 남고 싶다. 그것이 비록 남 보기에는 그 만큼 처연해 보일지라도.
이제 내 시가 얼마나 무거워지고 더욱 깊어질지는 나 자신도 모른다. 다만 내가 사유하는 그 부피 혹은 그 무게만큼 절정의 순간을 향해서 더욱 빠르게 숨죽이며 달려갈 것만은 분명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그 아픔의 흔적들을 빛으로 승화시키는 나의 작업이 어떤 빛깔, 어떤 깊이로 나타날지는 신만이 알 것이다. 다만 지켜보고 보듬고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일이 나에겐 지금 소중할 뿐이다.
─『시에』(2011. 가을)
임동윤
경북 울진 출생.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연어의 말』, 『나무아래서』, 『아가리』 등.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윤종남의 시읽기 80> 전정희 시인의 “물에도 때가 있다” (0) | 2014.02.15 |
|---|---|
| [스크랩] <윤종남의 시읽기 81> 김강호 시인의 “아버지” (0) | 2014.02.15 |
| [스크랩] 일하는 시(詩)의 미래 / 시집『귀뚜라미 생포 작전』- 정원도 시인 (0) | 2014.02.15 |
| [스크랩] 오장을 휘돌아나간 축축한 얼룩들 / 시집『낙법 (落法)』 - 권순진 시인 (0) | 2014.02.14 |
| [스크랩] <윤종남의 시읽기 63> 장지성 시인의 "가을 과수원" (0) | 2014.0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