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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장을 휘돌아나간 축축한 얼룩들 / 시집『낙법 (落法)』 - 권순진 시인

문근영 2014. 2. 14. 10:52

오장을 휘돌아나간 축축한 얼룩들
─『낙법 (落法)』(문학공원, 2011)

                                      권순진

 


   가만 따져보니 내가 정식으로 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무렵이 바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 올 때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 관심이라야 자의반타의반으로 시작된 호기심 수준이지만 이후 줄곧 나의 불편한 삶은 연속되었다. 처음 이삿짐을 부릴 때만 해도 변방이어도 확 트인 강과 공원 풍경이 한눈에 조망되는 꽤 넓은 아파트에 대한 뿌듯함이 있었다. 하지만 어찌된 심판인지 뭘 해도 되는 일없이 꼬이고 재수에도 옴이 붙어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시를 취미의 방편으로 삼는 것이 연애에 도움이 될까 막연히 기대했던 것은 크나큰 착각이었고, 당초의 느긋한 여유도 시나브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아파트 난간에서 강을 내려다보며 곰곰 생각했다. 집터를 잘 못 잡은 게 사단인지 주제넘게 시에 기웃거린 것이 패착인지를 복기했다. 대놓고 나 시인입네 그런 적 없고, 시 운동에 자발적으로 미친 상황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둘레의 사람들은 살기 바쁘고 좋은 게 널린 세상에서 고작 시 나부랭이에 붙어사느냐는 의혹과 연민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들에게 시란 터무니없는 방언이고, 시인은 고립된 정신영역 안의 광대이며 사팔뜨기였다. 멀쩡한 직장 다니다 낙향해 한다는 짓이 그 모양이니 그럴 만도 했겠다. 궁핍에 허덕여도 전혀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투였다. 좋게 봐주는 경우조차 시인은 생활과 양립할 수 없으며, 시인이 생활에 밝은 것을 곧 타락으로 여겼다.
   그러는 동안 욕망이 소멸되고 집착을 다 버렸다. 그들의 전망대로 생은 굴러갔다. 더 이상 인생을 망칠만큼 그 무엇이 남지 않았다. 생활의 욕망은 여우의 신포도가 되어 너무나 먼 거리에 있었고, 규범과 관습 따위와의 알맞은 거리 유지도 힘들었다. 오로지 마지막까지 곁에 남은 건 문학뿐이었다. 그 문학도 현실과 철저히 유리되어야만 숨통이 트일 것 같아 사람들로부터 나를 소외시켜갔다. 관계를 버리고 바깥으로부터 날아온 문자도 모두 씹었다. 삶의 재미와 윤택을 제단에 바치는 대신 영혼의 통증을 얻고, 그것이 문학을 감싸는 정신적 고귀함이라 스스로 위로했다. 그 와중에도 오랜만에 만나 아무 사정 모르는 친구들은 그저 하는 소리로 얼굴 좋다고 말한다. 나는 무늬만 그렇다고 대꾸하는 것도 힘이 들었다.

 

   회비 오만 원이 내 분수에 넘치고 부담 되어 갈까 말까 딸막딸막했던 연말모임에 최대한 본전 뽑으려 점심까지 거른 채 굳센 결심으로 참석했다 
   7년 만에 만난 친구가 얼굴 좋으네, 잘 지내지? 하는 일은 잘 되고? 안부를 묻는다 그는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하지 않는 일이 무언지 일을 하는 대신 무슨 뚱딴지를 껴안고 사는지 알지 못한다 놀고먹는지 먹고 노는지 개밥통에 밥을 말아 먹는지 알 턱이 없다
   응, 밥은 먹고 산다네 나는 진실로 거짓 없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겨우’란 수식어를 넣어 말하려다가 순간 거지같아서 관뒀다 요즘 경기 우리 나이에 그만하면 잘 나가는 거지, 그래, 어떤 사업이야? 나중에 한잔 사라!
   밥은 먹고 산다는데 잘 나가는 건 뭐고 한잔 하자도 아니고 사라는 말은 무슨 개뼈다귀 같은 수작인가 밥은 먹고 산다는 말이 결국 터무니없는 과장법이 된 셈이란 말인가
   분식회계로 장부조작이나 한 피의자처럼 낯이 뜨거웠다 2차 노래방에 가서 딱 한 곡 목청껏 ‘내 사랑 내 곁에’를 뽑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해 바뀌면 끊기로 마음을 묶은 담배의 남은 마지막 한 개비에 불을 붙여 몇 모금 힘껏 빨았다 어둠 속 가물가물한 담뱃불의 소실점이 손가락 끝에 걸렸다
                                 ―「과장법」 전문

 

   그렇게 청춘은 가고 내 사랑도 가고 방종의 기회마저 사라지니 한손에 만지작거릴 추억만 고스란히 남겨졌다. 부러 시를 빙자한 탈선을 감행할 필요 없이 나의 노선은 비딱해져갔고, 고꾸라지는 데는 이골이 났다. 맥없이 시간은 흘러갔고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했다. 엉성한 낙법이나마 배워두지 않았더라면 그냥 골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나 어느새 시가 내 낙법의 한 기술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일상의 낭자한 얼룩을 덮는 담요가 되고, 넘어진 자리에서 새로 핀 싹을 덮어주는 보온 덮개로 기능했던 것이다. 축축하고 외롭고 가난하고 쓸쓸한 일상들이 다 시의 질료가 되었다.
   비단 나만의 누추함만이 아니었다. 가끔 내 밀실을 개방했고 누군가의 밀실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서로 연민하고 위로역이 되었다. 시는 경험의 누적에 비례하지 않으며, 시간의 축적과 비례하지 않는다. 시는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불길한 징조이긴 하지만 머리를 쥐어뜯거나 정신적 고통을 많이 겪는다 해서 그쪽으로 몰아주지도 않는다. 물론 상투적으로 살아가는 착한 시인에게 우선적으로 공급되는 것도 아니다. 살면서 문득 만나는 전율 눈물 황당 모독 따위가 시로 환치되는 일이 많았다. 특히 아무렇게나 살아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은 분노와 비감이 온몸을 휘감을 때 시답지 않지만 시가 쓰였다.

 

   내 가게서 일하는 병길이의 주량은 소주 일곱 병이다 스스로는 타고난 주량이라지만 아무래도 곡절과 이력이 있어 보인다 돌부처 조각하는 석공인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는 뭐 하시느냐고 물었을 때 서슴없이 무속인 이라고 대답한 병길이의 피가 예사 성분일 수는 없겠다
   그 애비와 어미는 만나서 사랑하고 또 결혼하면서 파란과 이별은 허술한 영화의 예고편처럼 이미 들통난 줄거리였던 것이다 방방곡곡 절집 떠돌며 술과 여자를 끼고 사는 남정네에게 온전한 혼인의 관계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병길이의 주량」 부분

 

   시만 걷어차 버리면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고 여길 때가 길게 있었지만 지금은 도무지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시를 씀으로써 얻는 환희 보다는 시를 읽으며 얻는 즐거움 때문이다. 그러면서 다른 이에게 시의 효용을 이야기했다. 실패한 삶의 바닥은 내 시가 자랄 대지이며 토양임이 분명하지만, 사람들에겐 시를 읽지 않으면 큰 봉변이나 당할 것처럼 말하고 시와 친해질 것을 권유했다. 앞으로 내 목숨을 어떤 방식으로 소모하든지 간에 그 영혼이 머무는 곳은 늘 맨 아래쪽일 것이나, 그곳에서 시를 수습하고 추출 가공하여 지상의 그들을 위해 유통시키려할 것이다.
   시인은 잠수함의 토끼처럼 예언의 종을 치는 사람이고, 마지막으로 구원을 외칠 목청을 가진 사람이라 믿고 싶다. 사치스러운 정신의 귀족이 아니라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독한 몽상가요, 무욕과 무소유 가운데서 자기 존재증명이 가능한 모순의 정신적 착란자일지도 모른다. 어느 시인의 ‘시는 희망이요 절망이다. 희망의 번개요 절망의 천둥이다. 그리하여 조화요 혼돈이고, 혼돈이면서 조화’라는 시에 대한 아포리즘은 타당하게 읽힌다. 얼핏 복잡해지고 미궁에 빠지는 듯하지만 시는 우리 삶의 한 국면을 환기하고 회복케 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러기 위해 시가 논리적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시적 긴장이 사람들에게 아무런 정서적인 효과를 주지 못한다면 그 끈을 살며시 놓아주어도 좋으리라.
   나는 앞으로도 아플 것이고 충돌할 것이며 하강할 것이고 표류할 것이다. 그런 가운데도 파동과 전율이 멈추지 않기를. 발칙한 상상력이 시시때때로 불거져 나오기를. 정신적 감각이 나태하지 아니하되 주변의 속도에 빠르게 반응하지 않기를. 엄숙하지 않은 표정의 시치미를 자주 떼기를. 세상에 패배한 자의 세상을 향한 복수의 변증법이기를. 물질적 결핍에 대한 최소한의 정신적 보상이기를. 내 시가 감동 없는 수다가 되지 않기를.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글감이 샘솟기를. 아니 샘솟지 말기를 소망하고 기도하리라.

 

   꽃의 총체적 모습이기 보다는
   꼬부라진 암술이거나 수술의 꽃밥입니다
   무지개와 구름과 비에 머무는 시선만이 아니라
   무지렁이와 함께 섞여있는 한 줌 진흙입니다
   잉잉거리는 바람과 봉창을 두드리는 빗소리에도
   밥이 넘어가지 않고 복받치는 울음입니다
   사막을 걷는 자의 수통에 남은 마지막 물 한 방울이며
   오염에 더욱 선명한 저 강 물비늘의 표정입니다
                               ―「시인은 언제나」 전문

 

 

              ─『시에』 (2011. 가을)

 

 

권순진
대구 출생. 2001년 『문학시대』로 등단. 시집 『낙법』. 시해설서 『맛있게 읽는 시 1』.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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