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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현대시조, 자율적 정형시, 그리고 극서정시 / 이경철

문근영 2014. 2. 3. 21:29

 

 

 

현대시조, 자율적 정형시, 그리고 극서정시 / 이경철
내가 읽은 문제작 : 시조
[53호] 2011년 11월 10일 (목) 이경철 문학평론가

지금 우리 시 서정의 구심이 돼가는 현대시조

한 해가 또 간다. 해가 갈수록 한 해는 더디 가는가, 빨리 가는가. 문명과 시사(時事)의 속도감에 비춘다면 더디게 가는 사람의 한 해일 터인데 나이 들어 감인가, 내 세월은 왜 이리 빠른지. 어제 일은 먼 일 같고 먼 추억은 바로 어제 일같이 생생히 떠오르는 나이 든 해다.

 

2011년 한 해 우리 시단에서는 서정이 주류로 돌아오고 있는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났다. 지난해 연말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최동호 씨는 〈트위터 시대와 극서정시(極抒情詩)의 길〉(《유심》 2010 11/12)이란 시론을 통해 극도로 정제된 서정시인 극서정시를 제창했다. “간결하고 경쾌하며 독자들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시들이 활성화되도록 하는 것이 앞으로 시인과 비평가가 해야 할 시대적 책무”라며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그런 극서정시 창작과 운동으로 지난 연대에 주류인 양 떠오른 장황하고 난삽하며 소통 부재의 시들이 갖는 몽환적 속박으로부터 우리 시를 구하자는 것이다. 최동호 시인은 선언과 함께 극서정시의 한 전범으로 짧게 정제돼 울림이 더 큰 서정시 몇 편도 같은 지면에 발표했다.

이에 대한 화답인 양 중진 시인들은 그 무게감에 걸맞은 극서정시집을 잇달아 펴내고 있다. 젊은 시인들은 주체성을 잃고 타자화(他者化)된 자아를 찾아 현실과 세상과의 화해를 꾀하고 있다. 젊은 평론가들도 이제 그런 시에 주목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함돈균 씨는 〈‘최소(the mini-mum)―인간:모멘트(moment)’의 탄생〉(《문학과사회》 2011 가을)에서 “‘아이들’이 돌아왔다”며 신진 시인들의 시에서 작아졌지만 단단해진 주체의 귀환을 알렸다.

 

서정 본류로의 귀환을 알리는 이런 징후들 속에서 나는 우리의 정서를 우리의 리듬과 언어로 짧게 정형화해 친근하고 깊은 울림을 주는 시조가 자유시의 본류 찾기에 길잡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 예감했었다. 시 전문지 《서정시학》 2011년 가을호는 문학평론가 유성호 씨와 시조시인 홍성란 씨의 평문으로 근대문학 양식으로서의 현대시조에 대해 살피며 시조의 그러한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어 주목된다.

 

유성호 씨는 〈근대문학으로서의 시조의 가능성〉에서 “우리 시대는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근원(origin)에 대해 탐색하는 반(反)근대의 열정이 어느 때보다 두드러지고 있는 때”라고 우리 시대와 시단의 맥을 짚는다. 그러면서 “최근의 시적 흐름에 대해 현대시조가 특유의 형식적 절제를 통한 구심적 인력(引力)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양식”이라 시사했다.

 

현대시조 100년사를 개략하며 유 씨는 특히 시조를 근대문학 양식으로 혁신시킨 가람 이병기의 시조와 시조론에 주목했다. 가람은 “‘격조(格調)’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 현대시조가 말과 소리의 합치에서 발전이 가능하며 시인 자신의 감정으로 흘러나오는 리듬에서 시조가 생겨난다고 강조함으로써, 근대시 일반의 문법과 동일한 차원에서 시조 미학의 완성을 꾀했다”는 것이다.

 

해서 “시조가 그 안에 단호한 정격(正格)의 세계를 담아냄으로써 우리 시대에 범람하는 탈격(脫格) 지향의 흐름에 대한 일정한 미학적 저항을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조심스레 주장했다. 그렇다면 자유시단 못지않게 정격을 일탈해 확장되고 있는 현대시조의 ‘구심적 인력’은 어떻게 확보해야 할 것인가. 홍성란 씨는 〈조운 시조로 본 시조의 시적 형식〉에서 현대시조를 시조라는 전통양식을 현대시라는 오늘의 양식으로 승화시킨 ‘자율적 정형시’로 근대문학 양식 속에 자리매김한다. “양식화된 정형률에 따르되 행의 배열과 연의 구성은 내적 충동에 의한 자율성을 허용하는 시”란 것이다.

 

따라서 “4음보 4보격 3장과 종장 첫 마디는 3음절로 고정하고 둘째 마디는 2음보 결합 형태를 띠는 과음보로 실현”한 정격 위에서 “자연스러운 발화 양상에 따라 작품마다 매번 다른 창작물”을 실현해야 진정한 자율적 정형시라는 것. 이때라야 시조는 “우리 시대 극서정시의 가능성”을 보이며 작금의 우리 시단에 모범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율적 정형, 극서정의 정수

 

텃새의 메아리 쟁여 깊은 속맛 우려내다

풀벌레 여울 소리로 맑은 향을 빚어내다

여윈잠, 날로 신열 도지나

긴 묵언, 잉걸 빛이니…….
―송선영 〈저 산이 요즘―그 ‘매몰’ 이후〉 전문(《시조세계》 2011 가을)

 

 

요즘 겨울로 가는 가을 산이 이러려나. 이제 풀벌레 소리 여울 마르고 텃새 메아리 잦아들어 긴 묵언에 들어가려나. 깊이 잠들지 못해 날로 여위어 가는 몸에 신열 도져 잉걸 빛 단풍이려나. 시력(詩歷) 50여 년의 송선영 시인이 위 시를 비롯해 5편을 같은 지면에 발표했다. 날로 새로워지는 감각에서 우러나는 시의 향과 절도 있는 깊이의 풍격(風格), 과연 ‘남도 선비 시인’이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니 편편이 명편이다.

 

위 시는 형태상으로 네 행, 각 행을 연으로 독립시킨 네 연의 단시조이다. 초장, 중장을 각 한 행 한 연씩 잡고, 종장은 두 행 두 연으로 잡아 행간의 넓은 여백을 뒀다. 종장을 전반, 후반 구로 나눠 두 연으로 잡아 여백을 더 넓힌 것은 물론 시조 특유의 전환, 응축의 종장 미학을 돋보이게 하면서 활자의 더 높은 긴장과 여백의 더 큰 울림을 위한 형태일 것이다.

 

활자 부분이 충분히 응축돼 긴장돼야 넓힌 행간은 그 너비만 한 울림통으로서의 여백 구실을 할 수 있을 것. 위 시는 시인과 대상이 상호 조응하는 이미지, 특히 시인이 대상과 온몸으로 교류하는 공감각적 이미지의 응축으로 넓은 여백을 떠받칠 만한 충분한 긴장을 갖추고 있다.

 

첫 연은 텃새 소리, 즉 청각을 “깊은 속맛 우려내다”라며 맛, 즉 미각으로 잡고 있다. 둘째 연에서는 풀벌레 소리를 “맑은 향을 빚어내다”라며 후각으로 읊고 있다. 대상에 얼마나 오래 귀 기울여야 소리는 맛이 되고 향이 되나. 얼마나 가까이 가야 대상이 온몸에 스며들어 한 몸이 되나. 소리가 시인의 심신으로 들어와 서로 화답하는 메아리로 쟁여지고 여울 소리로 흘러야 서로 교감하는 맛이 되고 향이 될 것.

 

초장과 중장, 즉 시의 1, 2연에서는 청각, 시각, 미각, 후각이 중첩된 공감각으로 시인과 대상인 저 산이 교감하고 있다. “풀벌레 여울 소리” 한 구절에도 여울처럼 물빛 반짝이며 끊일 듯 이어 흐르는 풀벌레 소리를 시각과 청각으로 잡아내며 다시 그것을 후각으로 읊고 있지 않은가. 이렇듯 온몸으로 대상과 교감하며 그런 정을 읊을 수 있는 시적 깊이와 기량이 뒷받침돼야 중첩된, 자연스러운 공감각에 이를 수 있다. 그런 깊이와 기량이 못 돼 수사적 차원의 잔재주로 떨어진 공감각도 많이 봐 왔을 것이다.

 

시조의 전환부이면서 눈이랄 수 있는 종장 전반구, 3연에 와서 오감(五感) 중 앞 연에서 빠진 촉감이 드러난다. 직접 몸이 맞닿아 느끼는 그 촉감으로 인해 앞 연에서 교감하던 시인과 대상은 한몸이 되는 전환을 이룬다. “여윈 잠, 날로 신열 도지”는 몸이 저 산인가, 시인인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래 시인도 “신열 도지나”라고 묻고 있는 물아양망(物我兩忘)의 묘오(妙悟)한 경지의 전환부이기에 한 연으로 잡아도 충분한 울림을 주고 있다.

 

그러면서 물아일치의 전환부가 앞 연으로 돌아가 대상을 저 산이 아니라 시인 자신으로 보며 읽게 한다. “깊은 속맛 우려내”고, “맑은 향을 빚어내”기 위해 오늘도 우주만물과 온몸으로 만나며 시어와 시상을 쟁이고 있을 시인을 둘러보게 한다. 그런 시인이 잡아낸 저 산이란 우주와 시인과 시의 요체가 마지막 연, “긴 묵언, 잉걸 빛이니……”일 것이다.

 

검붉게 타오르다 스러져가는 잉걸불 혹은 단풍, 넓혀 보면 저 산과 우주 혹은 시인과 시의 선명한 이미지가 말줄임표의 묵언으로 끝나 되레 그 울림을 얼마나 크게 하는가. 그래 종결구 또한 한 연으로 여백을 넓게 잡았을 것이다.

 

위 시 앞 두 연은 유사한 어법과 ‘~내다’라는 같은 종결어미로 대구를 이루고 반복돼, 메아리처럼 화답하는 자연스러운 운율도 얻으며 연 갈음 되고 있다. 3장 6구 12음보의 정형에 맞추면서도 시상의 전환과 운율, 긴장 등 시 자체의 필연적인 내적 욕구에 의해 행과 연이 나뉘고 있는 것이다.

좋은 시조를 평할 때면 나는 초장, 중장, 종장 등 시조 용어와 행이나 연 등 자유시 용어를 헷갈려 쓰곤 한다. ‘자율적 정형시’로서 현대시조가 잘 정제돼 짜인 자유시와 분별 없이 보이고 읽히기 때문이다. 근기 있는 잉걸불빛으로 빛나는 온몸의 긴장된 공감각 이미지에 넓은 여백과 긴 묵언이 주는 울림의 깊이. 지금 우리 시가 지향하고 있는 극서정의 정수로 읽히지 않는가.

 


현대시의 정형 장르로 빛나는 시조의 위상

 

1.
갈바람
긴 생각 끝에
휙 지는 고추잠자리

2.
가을이 어쨌기에
화살기도 쏠 새 없이
출근길 차를 돌려서
제주행 비행기 탔나

3.
저녁마다 무심히 노을 내리는 하늘처럼
그렇게 어머니는 세상을 내린 것인데
모슬포 자리젓 냄새 가시 박힌 그리움

4.
한라산이 낳은 오름
그 오름이 낳은 봉분
생전에 못 안아본 어머니 오늘은 안고 싶었는지
뚜우 뚜 휴대폰 신호음
저 세상으로 날리던 사내

5.
지상에 피어야만 꽃이라 이르느냐

꽃아, 수평선을 퍼렇게 오므린 꽃아, 꽃아, 내 안의 마그마 같은 꽃아,
한여름 견디다 못해 땅 속에서 터진 꽃아

화산섬 가슴에 묻은
코멜리나 벵갈렌시스!
―오승철 〈가을이 어쨌기에〉 전문 (《시조시학》 2011 가을)

 

제목 바로 아래 붙은 프롤로그에서 시인은 “제주에서 발견된 닭의장풀과 코멜리나 벵갈렌시스는 땅속에서도 꽃이 핀다”고 밝혀 놓았다. 그 땅속에서도 피는 꽃을 소재로 죽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주조(主調)로 해 고향 제주 풍광과 특히 가을날의 정조를 인상적으로 읊은 짧지 않은 시이다.

 

다섯 장(章)으로 장 나눔 형식을 취한 이 시는 기실 평시조 세 수와 사설시조 한 수로 이뤄졌다. 해서 네 수로 연결된 연시조로 볼 수도 있겠으나 장 나눔을 해놓고 그것도 첫 수의 한 장을 1장으로, 나머지 두 장을 2장으로 잡아놓았고, 장마다 완결된 울림이 있으니 이 시야말로 ‘자율적 정형시’로 부를 수밖에 없겠다.


1장은 가을의 정조를 단숨에 절감하며 무릎 치게 하는 절구. 비교적 길고 복합적인 이 시를 끝까지 긴장되게 읽게 하기에 충분한 울림을 초장부터 던지고 있다. 시조로 치면 첫 수 초장이 될 것이다. 2장에서는 그런 가을 정조에 대책 없이 끌려, 가을 신에 “화살기도 쏠 새 없이” 감전돼 “제주행 비행기”, 그 가을 속으로 들어가는 비행기를 타게 한다. “휙 지는 고추잠자리”같이.

 

이 1, 2 장이 시조의 첫 수일 터인데 음보의 정형률로 살펴보면 종장이 앞으로 나온 도치(倒置)의 형국이다. “갈바람/ 긴 생각 끝에/ 휙 지는 고추잠자리”라는 1장을 보격(步格)에 따르면 ‘갈바람// 긴/ 생각 끝에// 휙 지는// 고추잠자리’로 읊어져 종장의 정형에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2장 뒤에 1장을 놓으면 종장의 전환부가 돋보이는 빼어난 시조 한 수로 자연스레 읽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종장을 위로 올린 것은 도입부부터 독자들에게 선명한 인상과 강한 충격을 주기 위한 시인의 전략적 선택이었을 것. 보라, 이 1장을.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로 날려 보내면 수신인 가슴을 온통 진동시킬 만한 그야말로 극서정 아닌가.

 

3장에서는 시인을 대책 없이 제주행 비행기를 타게 한 그리움의 정체가 드러난다. “모슬포 자리젓 냄새 가시 박힌 그리움”이란 가시지 않는 그리움을 빼어나게 형상화한 절구로 향토 제주에 대한 그리움을 배경으로 사모곡(思母曲)이 절절이 펼쳐진다. 4장에서는 어머니의 봉분을 제주 향토처럼 안고 저승까지 이어지는 그리움을 “뚜우 뚜 휴대폰 신호음”으로 날리고 있다.

 

그 그리움의 신호음이 터져 나오고 있는 대목이 5장. 프롤로그에서 설명한 코멜리나 벵갈렌시스를 빌어 봉분 땅속에 묻힌 어머니에 대한, 향토 제주에 대한, 그리고 아직도 식지 않는 시인의 가슴속 본연의 그리움을 터뜨리고 있다. 앞 장에서 섣불리 드러내지 않고 꼭꼭 쟁여둔 그리움이 5장 둘째 연에서 숨 가쁜 사설로 반복, 나열되며 터져 나오고 있다.

 

이 5장은 사설시조 한 수이면서 사설로 길게 늘어뜨린 중장 자체가 평시조 한 수로 읽힐 만큼 보격을 벗어나지 않는 정제된 울림을 갖고 있다. 토해내기에 충분한 긴장과 이미지를 시 자체에 쟁여 놓아야 이같이 사설이 터져 나와도 자연스럽고 또 긴장도 유지되는 법. 그렇지 못해 사설이 갈지자로 걷든지 맥 빠진 넋두리로 흐르는 시들도 많이 보아오지 않았던가.

 

시 자체적인 충분한 이유와 긴장과 울림을 갖고 시조 네 수를 자유시로 변주한 이 시에서 시조의 현대화, ‘자율적 정형시’의 최첨단을 보는 것 같아 눈이 확 틔었다. 무엇보다 다섯 장의 나눔과 길이를 감당할 만큼, 시조의 장과 연과 행 나눔을 자재로 바꾼 형태에 충분할 만큼 가을 정조와 그리움을 다면적으로, 선명하게, 구체적으로 드러낸 이미지들이 가슴을 치고 들어왔다.

 

 

짧고 울림이 큰 단시조로 극서정 모범 보이시길

 

꽃샘에 더친 상심
하마 또, 깊으신지요

안부가 하, 꽃이네요
살이가 다, 그러하지요

살바람
살 저미는 끝에

꽃 세우듯……
잎 세우듯……
―정수자 〈꽃답〉 전문(《유심》 2011 9/10)

 

 

하, 나도 살 저미는 꽃샘 계절, 더친 가슴에 이 시 같은 화답 안부 듣고 싶다. 뭐 별다른 설명 없이도 그대로 가슴에 낭창낭창 안기는 시이다. 우리의 정겨운 율격과 표현으로 어떤 거부반응도 없이 그대로 핏줄로 스며드는 시이다. 어떠한 해설도 구차스럽게 만들어버리는 시, 그런 시가 좋은 시 아니겠는가.

 

여덟 행 네 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평시조 단수이다. 초장은 전, 후반 구가 각 한 행씩 두 행이 한 연을 이루고 중장도 초장과 같은 형태이다. 그러다 과음보가 있는 종장에 와서 각 음보를 한 행씩 잡아 전, 후반을 연으로 가르고 있다.

 

시조의 시상 전개상 전(轉)과 결(結)의 무게가 있는 종장은 자유시 형태로 행과 연을 나눌 때 마땅히 초장과 중장보다는 형태상에도 무게를 두는 게 상례화되어 있다. 이렇게 시조를 자유시 형태로 펼칠 때 정형 자체의 내적 욕구에도 불구하고 밋밋한 종장을 관례인 양 행이나 연 나눔을 해 미천한 시재와 깊이만 더 확연히 들통 나게 하는 시들도 많이 보아왔다.

 

이 시에서 어떤 해설도 사족으로 만들 만큼 농익은 삶의 깊이와 풍격을 자연스레 풀어내고 있는 장치는 바로 운율. 시조의 율격에 맞추면서도 거기에 더해 시 전체에서 반복법으로 아주 자연스러운 운율을 낳고 있다. 읊조리다 보면 처음 귀에 들어오는 반복은 ‘~요’라는 종결어미 뒤에 붙은 보조사. 행 끝에서 세 차례 반복돼 운율을 낳으면서 대화체로 독자들을 시 속으로 융숭하게 모셔 들이는 효과도 내고 있다.

 

다음은 종장 후반 “꽃 세우듯……/ 잎 세우듯……” 두 행의 나열 반복. 여기저기 꽃과 이파리 움터지는 꽃샘 철의 이미지가 운율과 어우러지며 더 풍성하고 선명하게 살아난다. 말줄임표의 반복으로 봄 이미지의 여백을 살리며 특히 앞의 “~요”의 보조사의 경어체를 받으며 무진무진 쌓인 말 다 못하는 여성성도 강화시키고 있다.

 

다음은 쉼표(,)의 반복. 시든 산문에서든 잘 찍은 쉼표 하나가 문맥과 시상을 확 바꿔버리며 풍격을 높이는 경우를 종종 봐왔다. 이 시에서는 쉼표가 세 번 나와 고답적으로 들릴 시조의 율격에 스타카토 식으로 툭툭 부러지게 하는 효과를 낸다, 부사나 감탄사 등 별 의미 없는 허사(虛辭) 뒤에 붙어 운율의 숨통 구실을 하는 이 시에서의 쉼표는 세 번 찍는 것보단 차라리 감탄사 “하,” 뒤 한 군데에만 둬 그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 낫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살바람/ 살 저미는”에서도 ‘살’의 음향이 반복되며 살가운 촉감을 불러일으킨다. ‘살바람’이란 시어의 음상(音像)이 하도 좋아 사전을 찾아보니 ‘초봄에 부는 찬 바람’이란다. 이리 예쁜 단어를 살려내 그 뜻도 제대로 전하면서 뒤에 이어지는 “살 저미는”과 어우러지며 살가운 음상의 음상징도 제대로 드러나게 하고 있다. 모든 층위가 어우러지며 살가운 정을 주고받고 깊은 속내까지 여백으로 남겨둔 이 시, 극서정시의 한 모범으로 읽어도 좋겠다.

 

“시멘트도 삼십 년쯤 피붙인 양 안다 보면/ 곁 주고 그늘 주고 노래도 얹다 보면/ 덜커덕 한 몸이 되는/ 나무들의 체위라니!// 남의 살을 품는 것은 체액일까 체념일까/ 쇠기둥도 끌어안고 종내는 하나 되는/ 나무들 푸른 팔짓은 저를 거기 스미는 짓// 눈물 콧물 안고 섬겨 진주처럼 키우는 짓/ 오늘도 제 팔 끼고 밤을 넘는 딴 몸들아/ 뻘짓이 곧 꽃짓이란 듯/ 나무들 또 팔을 뻗네”

 

정수자 시인이 같은 지면에 발표한 〈나무의 체위〉 전문이다. 평시조 3수로 된 연시조이다. 한 수를 한 연으로 잡은 형태에서나 딱 맞춘 정형율로 누가 보아도 시조로 읽힐 시이다. 시력 삼십 년쯤에 이른 시인의 신작시여서 자신의 시에 대한 생각을 나무의 체위에 빗대 시화한 작품으로 보인다. “덜커덕 한 몸이 되는/ 나무들의 체위라니!”라는 첫 수 종장에서 이제 시와 한 몸이 돼가는 시인을 직감할 수 있다. 아, 그러나 어쩌랴! 뒤 수들이 제대로 받쳐주고 있지 못하니. 시상의 구체화나 진전도 없고 첫 수의 부연 사설에 불과하게 보이니. 그래 둘째 수 종장에서는 행 갈음할 어떤 전환도 없어 한 행 처리한 시인의 고통스러운 솔직함만 드러나고 있으니.

 

무엇보다 연시조로 길게 나가다 보니 시조의 정형률이 너무 고답적으로 노출된 것이 문제이다. 정형률에 변주를 주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시상 전개가 “뻘짓이 곧 꽃짓”이란 체험에서 우러난 삶의 진실의 아름다운 형상화를 그저 ‘뻘짓’으로 묻혀버리고 만다.

우리 시조단 중견으로서 빼어난 시인의 이 시를 보니 시조 현대화, 그리하여 자율적 정형시로서의 현대시로 자리매김하기의 지난함을 알 수 있겠다. 같은 지면에 실린 〈오랜 새로움의 가능성〉이란 짧고 인상적인 시론에서 정 시인도 “형식의 계승 속에서 찾는 새로운 시조 미학은 난제 중의 난제다”고 괴롭게 고백하고 있으니.

 

그럼에도 정 시인은 물론 많은 좋은 시인들이 앞서 살펴본 시들처럼 현대시로 보아서도 자유시를 압도하는 시들을 많이 써내고 있지 않은가. 서정의 본류가 돌아오고 주목받고 있는 이때 그런 좋은 시조들이 많이많이 나와 우리 시단의 서정의 구심적 인력으로 작용했으면 한다. 짧은 서정, 극서정을 외치고 있는 이때 우리 시조단도 짧은 길이, 단시조 콤플렉스를 부디 떨치시길 바란다.



이경철 | 문학평론가·시인. 동국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와 문화부장, 문화전문기자, 《문예중앙》 주간으로 일하며 다수의 현장비평적인 평론과 산문을 발표했다. 저서로는 《천상병, 박용래 시 연구》와 공저 《대중문학과 대중문화》 《천상병을 말하다》 편저 《한국 현대시 100년 기념 명시》와 명화 100선 시화집 《꽃필 차례가 그대 앞에 있다》 《시가 있는 아침》 등이 있다. 현재 동국대 문창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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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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