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의 현장] 솟구쳐 오르는 ‘달걀 속의 생’들 - 김승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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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여름의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현장’에 초대된 최초의 여성 시인의 강연을 듣기 위해 많은 시심(詩心)들이 유심아카데미를 채웠다. 시작에 앞서 김승희 시인의 시 〈시의 응급실에서〉와 〈솟구쳐 오르기 2〉를 최금녀 시인과 정채원 시인이 낭송해 주었다.
이 자리에 오면서 생각해보니 제가 시를 쓴 지 38년이 되었더라고요. 38년은 어마어마할 정도로 긴 시간이지만 또 다르게 생각하면 그 시간은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송구스러운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38년 동안 자기 일에 몰두해왔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그 일에서 신기(神技)나 어떤 경지에 도달해야 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시력(詩歷) 38년은 귀신과도 겨룰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는 시간이지만 아직 저는 그런 경지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무를 깎아서 38년 동안 책상을 만들거나 식탁을 만들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최고의 나무로 최고의 의자, 최고의 식탁을 만드는 장인이 됐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어떻게 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는지에 대해 답변이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라는 것은 ‘기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결코 모 TV 방송의 프로그램인 ‘생활의 달인’에 나갈 수 없죠. 우리에게 기술의 축적 같은 것이 있었다면 좋겠지만 시는 기술이 아니라 창작이기 때문에 안정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안정감이 없기 때문에 시는 태초의 카오스 상태 같습니다. 그 심연의 어둠을 어떻게 뚫고 갈 것인지, 또 무엇을 뚫고 갈 것인지 전혀 작정 없이 가는 사람이 시인 아닐까요? 시는 이처럼 기술도 없고 달인의 경지에 이르기도 어렵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습작 시인과 같은 마음으로 ‘나’의 노래를 부르는 것뿐입니다. 그것을 정현종 시인은 ‘거지의 마음’이라고 표현하고 계시군요. 시인은 ‘너’의 노래도 아니고 ‘우리’의 노래도 아닌, 또 ‘그들’의 노래도 아닌 ‘나’의 노래를 어쩔 수 없이 부르는 사람이지요.
그런 면에서 볼 때, 저는 제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자기 논리의 한계 속에서 자기 시를 바라보는 참으로 가난한 존재지요. 그래서 제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이런 가난한 느낌이 들어요. 난 항상 너무 가난했구나, 그리고 지금도 가난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런 가난의 마음의 결국 현재의 빈곤을 뚫고 나가게 해주겠지요.
오늘은 25년 만에 새로 쓰게 된 어떤 시에 대해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1989년도에 《달걀 속의 생》이라는 시집을 낸 적이 있었는데, 이 시집에는 〈달걀 속의 생〉이란 제목의 연작시 5편이 실려 있습니다. 저는 여러 지면에서 달걀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적이 있었는데, 그만큼 달걀은 제게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 시절 저는 달걀이란 사물에 온통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1985년에서 1987년쯤이 바로 그즈음일 겁니다. 한번은 포천에서 양계장을 하는 친구네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본 양계장은 정말 신비롭고 재미있었습니다. 마당에 있는 양계장을 들어가 보니 닭들이 푸드덕거리고 깃털이 가득 차 있었어요.
여기저기 놓인 횃대에서 뛰어오르는 놈, 미끄러지는 놈, 엎어지는 놈 등 닭들은 자기네끼리 아주 재밌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요. 그때 저는 닭들이 낳아 놓은 알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닭들은 바닥에 내려오지 않고 그 알들을 소중히 품고 있었습니다.
양계장의 삶은 생명이 충만해 있고 재밌어 보였습니다. 그곳에서 어미 닭이 품고 있던 달걀을 본 것이 머릿속 깊이 남게 되었습니다. 또한 살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달걀로 만드는 반찬과 요리와 친숙해지면서 냉장고 속의 달걀에 대해 큰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하지만 양계장에서 보았던 어미 닭과 인접해 있던 환유적인 달걀과는 달리 냉장고 속의 달걀을 보면 슬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미와 분리된 달걀이지요. 이런 냉장고 속의 달걀이 결국 우리 현대인의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현대’라는 거대한 냉장고 속에 있는 부화의 꿈을 포기한(?), 포기 당한(?) 달걀은 1980년대 중반의 ‘냉동’의 사회적 분위기와 연동되었습니다. 특히 1987년 6월 항쟁 시절 속에 달걀을 보면서 저는 난생설화의 꿈을 떠올렸습니다.
그 당시 저는 단독주택에서 살았는데, 단독주택은 지붕이 높으니까 불을 켜지 않고 부엌에 들어가면 매우 어둡고 그로테스크한 느낌들이 가득했지요. 한밤중에 캄캄한 부엌에 들어가 냉장고를 열면 신비하게도 환한 빛이 새나왔습니다. 그 깨끗한 불빛 아래서 달걀들이 마치 대화를 나누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어떤 때는 불을 켜지 않고 냉장고 속의 달걀의 음성을 듣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고 한참 동안 달걀을 들여다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오히려 달걀들이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느낌을 받기도 했었어요. 일종의 영적인 파워랄까, 저는 그런 냉장고 속의 달걀을 보며 대화를 나누곤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달걀 속의 생 1〉을 잠깐 읽어보겠습니다.
〈달걀 속의 생 2〉는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병실에서 아버지의 병원비를 의논하는 형제들에 대해 쓴 시입니다.
제가 난생설화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달걀 속의 생 3〉을 쓸 때였습니다. 계속 연약하고 무기력한 면으로 달걀을 생각하다가 〈달걀 속의 생 3〉에서는 한국 신화 속에서 많이 등장하는 난생설화가 떠올랐습니다. 고주몽 설화, 수로왕, 박혁거세, 알영부인, 탈해왕 등 알에서 태어나 건국 영웅, 난생의 신적 인물들이 바로 그들이지요. 여기서 알영부인만 빼면 거의 다 남성인물입니다. 당시의 저는 달걀을 보며 특별한 젠더 의식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단지 1980년대 중반의 시대적 분위기와 어울려서 난생설화 속에서 태어나는 초자연적인 신적 인물을 생각했습니다. 〈달걀 속의 생 3〉에서는 그런 난생설화에 대해 썼고 〈달걀 속의 생 4〉는 달걀들의 부화에 대해 썼습니다. 껍데기라는 절대적인 조건을 탈각하고 병아리들이 뛰쳐나왔을 때 펼쳐지는 아름다운 신시(神市),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꿈꿔 보았을 사랑과 평화가 있고 모든 것이 평등한 아름다운 금빛 햇살이 내리는 그러한 신시를 마중하려 뛰어나가는 노란 병아리 떼에 대한 얘기를 그렸지요.
하지만 〈달걀 속의 생 5〉에서 저는 희망적인 난생설화에 대한 꿈이나 기다림 등을 더 강력하게 밀고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저는 여러 번 〈달걀 속의 생〉이란 제목의 연작시를 더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시를 쓰다 보면 한 가지 주제에 대해 계속 시를 쓰고 싶은 열망이 생기곤 하는데, 그것이 제게는 〈달걀 속의 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올여름에 〈달걀 속의 생 6〉을 쓸 수 있었습니다. 이 시는 《문예중앙》 가을호에 실렸습니다. 〈달걀 속의 생〉 1~5의 연작시를 발표한 후 25년 동안 제가 어떤 생각을 했으며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는 구체적으로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많은 사회적 경험과 개인적 체험들을 통해 여성의 문제와 젠더에 얽힌 여러 가지 경험을 시에 담고 싶었습니다. ‘장자연 사건’을 보면서 저는 인간이 여러 가지 드라마적 국면에 처할 수 있지만, 남성으로서 삶과 여성으로서의 삶 사이에는 매우 많은 차이가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지요. 그 순간 저는 달걀이 ‘젠더로서의 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 전 저희 집의 오래된 냉장고가 고장이 났습니다. 제게 냉장고는 항상 밝고 깨끗한 빛이 나오는 장소로, 우리의 울퉁불퉁하고 질척질척한 삶을 깨끗하게 보관시켜 줄 것 같은 공간이었는데 어느 날 냉장고 문을 여니 그런 밝은 빛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냉장고가 고장 났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밝은 빛이 없는 냉장고를 보며 크게 절망했습니다. 어두운 냉장고 속에서는 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지요. 그것을 보며 저는 ‘어떻게 냉장고에서 이렇게 물시계와 같은 물이 떨어지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러면서 달걀을 보게 되었는데, 그 순간 저는 시간의 연옥을 느꼈습니다. 그 시간의 연옥 속에서 달걀엔 눈물이 흐르고 채소는 우거지가 되고 모든 것들이 부패하려는 장면들은 제게 강력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냉장고와 달걀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25년 동안 달걀에 대해 꾸준히 생각했지만 고장 난 냉장고 속에 있는 달걀과 또 새롭게 산 냉장고 속에 놓인 밝고 환한 달걀을 보면서, 저는 제 개인적인 체험들이 갑자기 달걀에 투사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성능을 알아보기 위해 일부러 세게 튼 새 냉장고 속에서 하얀 서리가 어린 달걀 껍데기를 보며 저는 허난설헌을 떠올렸지요. 난생설화 속에서 달걀은 여성이나 남성이라는 성별이 없었는데 달걀 껍데기 위에 하얀 서리가 어린 달걀은 허난설헌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그 하얀 서리가 어려 있는 달걀 속에서 한없이 시 안에 숨 쉬고 있는 난설헌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허난설헌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여성 시인이지요. 그녀의 작품은 크게 두 가지 계열로 나뉘는데, 그중 하나는 〈규원가(閨怨歌)〉 계열로 봉건과의 불화를 그린 작품들입니다. 난설헌의 남편은 과거 시험을 공부한답시고 다른 곳에 방을 얻어 놓고 기생집을 드나들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난설헌이 왜 공부를 하지 않고 기생집을 돌아다니느냐는 시를 남편에게 썼는데, 그것을 시어머니가 보고 내용이 음란하다고 심한 핍박을 주었다고 합니다. 또한 아이를 둘이나 잃었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상했을까요? 와중에 친정의 비참한 몰락을 겪었습니다. 또 다른 계열로는 신선 사상을 토대로 도교적인 꿈을 그린 작품들이 있습니다.
〈유선사(遊仙詞)〉 계열이 여기에 해당하지요. 〈유선사〉 87수 속에는 지상에서 자신이 누리지 못한 꿈들이 담겨 있습니다. 신선과 연애를 하고 자유롭게 편지도 주고받고 여성도 관직에 오르는 문서를 받고 여성들이 서로 친화하며 즐겁게 놀이도 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졌는데, 그게 바로 난설헌이 지상에서 누리지 못하게 금지되었던, 지상의 삶을 반대로 드러내는 선계(仙界)의 내러티브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이중적인 〈규원가〉의 난설헌과 〈유선사〉의 난설헌이 서리가 어린 냉장고 속의 시리다 못해 차디찬 달걀을 통해 제게 다가왔습니다. 난설헌은 27세에 죽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어린 나이였지요.
〈유선사〉를 보면 투구놀이나 활쏘기 등 매우 놀기 좋아하는 어린 난설헌의 품성이 드러납니다. 신선세계를 꿈꾸었던 어린 난설헌의 역동적이고 발랄한 움직임이 냉장고 속의 달걀 속에서 환하게 보였습니다. 〈규원가〉의 난설헌이 규방에서 한을 품고 달걀 껍데기 안에 앉아 있었다면, 달걀 껍데기를 깨고 신선세계의 역동적인 파노라마를 따라 반짝이는 것이 〈유선사〉의 난설헌이었습니다. 결국 이런 냉장고를 떠메고 가는 것이 한을 뚫고 나오는 ‘노래’가 아닐까 합니다. 이와 관련된 〈달걀 속의 생 6〉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지난여름 저는 나의 ‘노래’가 나의 냉장고를 메고 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신, 혹은 그녀의 노래가 나의 삶을 떠메고 갈 수도, 나의 노래가 당신, 혹은 그녀의 삶을 떠메고 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문학의 치유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냉장고가 고장 난 사건으로 인해 〈달걀 속의 생〉 연작시를 다시 쓸 수 있었습니다.
새 냉장고를 사기 위해 갔던 매장에 진열된 요즘 냉장고들은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반짝이는 루비를 뿌려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무늬를 지닌 것도 있었지요. 어떤 냉장고를 살까 고민하다가 저는 30년 전 샀던 그 회사의 냉장고를 다시 사게 되었습니다. 회사 이름을 시에서 직접 밝힐 수는 없어서 시에서는 “삼송 냉장고”로 이름을 수정했지요. 저의 시대에 냉장고는 모더니티의 상징이자 모더니티의 기호였지요. 근대를 우리에게 주었던 기구, 근대성의 기호이면서 자본의 기호, 또한 동시에 권력의 기호가 바로 그 회사 냉장고였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지금 우리는 신자유주의 속에서 먹이처럼 내던져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한국에 있지만 뉴욕 월가의 조종에 의해서 금방 먹이가 될 수 있는 시대에 놓여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지배 아래 국가는 더 이상 개인을 보호해주지 못합니다.
자본의 권력이 마음껏 사냥할 수 있는 돈의 놀이터에서, 이런 시대 속에 사는 삶은 바로 ‘냉장고 속의 달걀’ 같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 삶 속에서 모든 것은 자본과 권력의 냉장고 속으로 들어가고 이제는 더 이상 부화를 꿈꾼다든지 냉장고 속에 민들레 홀씨들이 냉장고 밖을 나와서 야생의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생각 속에 〈달걀 속의 생 7〉을 썼습니다.
25년 만에 제가 〈달걀 속의 생〉의 연작시를 다시 쓴 것처럼 앞으로도 이 시편의 연작을 계속 쓰고 싶습니다. 하지만 어떤 방향으로 이 연작시가 갈 것인지는 아직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답답한 상황 속에서 달걀의 생이 펼쳐질 것인지, 활짝 펼쳐진 황금벌판을 날아다니는 달걀이나 부활절의 빛나는 약속 같은 달걀의 세계가 펼쳐질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하지만 시는 결국 저의 체험과 더불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저의 삶과 관련된 〈달걀 속의 생〉을 쓰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한 말을 정리하자면, 〈달걀 속의 생〉 1~5는 보편적 인간의 의인화로서의 달걀이라면, 〈달걀 속의 생〉 6, 7의 달걀은 여성의 문제, 자본과 권력의 문제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연작시는 삶의 도약이 그려지는 알레고리로서 달걀, 꿈과 이상이 펼치는 드라마로서 달걀 이야기로 펼쳐졌으면 합니다. 아까 치열한 시를 써달라는 정채원 시인의 말이 있었는데요, 사실 치열하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올여름 저는 치열하지 않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젊을 때는 정말 개성적이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달라집니다. 젊었을 때는 피닉스(phoenix)처럼 스스로 불타고 불탄 재가 다시 새가 되는, 끊임없이 불새가 불새를 낳는 치열한 불의 힘의 연쇄를 느꼈지만 나이가 들면서 어떤 보편적 힘에 도달하고 싶은 갈구를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까 제가 잠시 아리랑에 대해서 말했는데요, 아리랑은 익명의 노래입니다. 젊은 때의 개성이 폭발하는 것보다는 자기 이름을 익명의 바다에 버려도 좋을 것 같은 노래죠. 저는 허난설헌을 읽다가 아리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황진이 같은 삶을 꿈꾸었지만 치열하게 살면서 중년의 고비를 넘어 생각해보니 어느새 허난설헌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아리랑과 같은 개성의 죽음, 익명의 바다와는 같은 민중성의 의미가 다가오면서 치열성도 아름답지만 나의 서명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익명의 서정의 바다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물론 그 속에서도 각기 다른 시인의 목소리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러한 몰개성의 경지가 보편성에 다가간다고 생각하고 그런 익명의 노래 속에서 행복하게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감사합니다.
▲ 과찬의 말씀이세요(웃음). 격려 감사합니다. 연작시를 묶는 시집은 좀 더 고민해 보겠습니다.
―남의 집에서 자기 문화의 좋은 점을 잘 느끼신 것 같아요. 제 생각엔 요즘 김승희 시인의 생각은 아마도 미국 교환교수 시절의 영향이신 것 같네요. 제주도에 가면 알터가 있는데 이런 알의 우주의 본체는 모성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모성성은 가장 영원한 귀착점이라고 할 수 있죠. 우리 민족의 특이성은 바로 이런 달걀에 있습니다. 우리 쪽으로 돌아오는 것이 독자성이고 보편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 강연하신 허난설헌과 관련해 몇 가지 덧붙이면, 허난설헌은 이달(李達)과도 교류했던 시인입니다. 이달은 서출 출신으로 머리가 뛰어났는데 난설헌이 매우 좋아했던 사람입니다. 아마도 이달이 없었다면 난설헌도 없었을 거예요. 이것도 좀 더 찾아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 흥미로운 지적이시네요. 난설헌과 알에 대한 선생님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저도 그것에 대해 더 깊이 찾아봐야 할 것 같네요.
―앞으로 저의 살길에 공감이 가는 강의였습니다. 선생님의 강연을 들으며 저만의 알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알을 낳았을 뿐 저만의 알을 아직 부화시키지는 못한 것 같아요. 선생님의 연작시를 읽으며 앞으로 제가 살길을 이 알의 문제와 관련해 고민하기로 했습니다.
▲ 알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죽느냐 사느냐’라는 햄릿적인 질문은 바로 ‘알’의 질문인 것 같습니다. 산다는 게 중요하고 통과제의도 중요합니다. ‘알’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새롭게 살고자 하는 갈구이자 새로운 자아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에 그 의미는 뜨거운 것 같습니다. 그런 실존적 고민이 바로 ‘알’의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열심히 경청해 주시고 또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 / 한세정(시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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