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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장소를 잃어버린 세계의 시 / 신진숙

문근영 2014. 2. 3. 21:29

 

장소를 잃어버린 세계의 시 / 신진숙
내가 읽은 문제작 : 시
[53호] 2011년 11월 10일 (목) 신진숙 문학평론가

   

신진숙
문학평론가

공간은 장소들로 이루어진다. 삶이 없다면 공간은 지리적인 것에 불과하다. 공간에 대한 이러저러한 기억과 경험이 공간의 두께를 만든다. 장소는 공간의 내면이자 무의식이다. 느끼고 상상하고 재현하고 또 실천함으로써 공간은 하나의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공간을 생산하는 고유한 방식은 있다. 가령 근대적 공간 기획은 효율성과 실용성의 지배를 받는다. 그 때문에 장소성의 개념에는 변화가 발생한다. 우선 공간을 손으로 만지고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전근대적 장소성이 축소된다. 공간은 경험하기도 전에 소멸되기도 한다. 이 경우 공간의 경험은 삶의 양식으로 전환되지 못한 채 감각층에만 추상적으로 머문다. 그것은 근대적 공간 경험이 관광 상품처럼 정형화된 것으로 제공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장소와 함께 구성되는 정체성에도 변화가 올 수밖에 없다. 사회적으로는 규칙적이고 기능적인 공간에 적합한 실천이 요구된다. 개인적으로는 욕망의 구조가 기능적인 방향으로 변화한다. 근대는 거의 모든 장소를 전체주의적인 동일성의 공간으로 변화시킨다.

 

반면, 아니 어쩌면 그러한 결과로, 탈근대적 공간은 더 빠르게 무장소화(無場所化)되어 간다. 이제 공간은 지구다. 지구적 소통에 비하면 특정한 장소를 매개로 하는 소통은 부수적이다. 공간은 무한히 펼쳐진 네트를 타고 끝없이 산포(散布)된다. 모든 것이 저장되지만 특정한 누군가의 기억은 무시된다. 이제 공간을 경험한다는 것은 더욱더 어렵다. 기억은 장소를 잃어버린다. 세계는 무조(無調)의 공간처럼 차갑다. 삶은 장소들을 상실한 채 부유한다. 우리의 삶은 세계로부터, 공간으로부터 유리된다. 실존의 원초적 거처를 잃어버린 까닭이다.

 

그러나 삶이 필요로 하는 것은 장소다. 지구가 아닌 하나의 구체적인 장소. 존재의 내면을 확장하고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곳. 공간적 실천이 감성적인 것과 결합하여 존재에게 삶의 근거를 부여하며, 하나의 장소가 나와 너 그리고 세계의 관계를 증명하는 그런 곳. 이 단순한 바람은 그러나 쉽지 않다. 자본주의적으로 말해 이제 장소는 가격표가 붙은 상품이다. 다국적 기업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공간들이 그렇듯, 글로벌하고 세련된 현대적 공간 경험은 공유되지만 삶의 양식으로 전유되지는 못한다. 빠르게 바뀌는 상점의 간판들처럼 장소 상실은 우리 시대의 일상적인 풍경이다. 어떤 공간도 내밀한 삶의 소리를 담아둘 수 없다. 삶이 공간으로부터 미끄러져 버린다. 그러므로 남은 것은 기억할 수 없는 무성(無聲)의 세계뿐이다.

 

그렇다면 서정은 어떻게 장소 상실을 재현하는가. 기실 근대 이후 시인들은 모두 고향을 잃어버린 자들이 아니던가. 그들은 언제나 이미 삶의 장소들을 상실한 채 시를 썼다. 때로는 삶의 무장소성을 성찰하기 위해, 때로는 지워진 장소들을 소환하기 위해, 또 더러는 전혀 새로운 장소들을 발굴하기 위해. 그것은 2000년대의 서정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서정의 장소

서정은 하나의 장소이다. ‘그 누군가’의 삶에서 출발한다. 이때 삶이 그 누군가의 것이 된다는 것은 삶을 공간 속에서 영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삶은 비인격적인 익명의 공간을 구체적인 감각의 장으로 변화시킨다. 실존재의 몸을 통해 공간이 다양한 장소들로 분화하는 과정, 그것은 하나의 삶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소는 하나의 기억이기도 하다. 기억은 언제나 이미 장소와 분리될 수 없다.

 

기억은 하나의 공간과 더불어 각인된다. 이때 공간에서의 다양한 감각들 역시 함께 저장된다. 느낌과 분위기, 향기와 소리 등 공감각적인 것이 기록된다. 서정은 바로 이러한 기억의 저장소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서정은 기억과 동일하지 않다. 서정은 망실되었거나 심연으로 가라앉아 인식할 수 없는 기억들까지 내포한다. 따라서 서정이 하나의 장소라는 것은 사실적 공간 지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서정의 기억은 직접적인 경험 이상의 것을 기록하고 전달한다.

 

그러므로 신용목의 시 〈늙은 산들의 마을〉을 읽는 동안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장소의 기억이다. 장소 그 자체는 아니다. 장소가 하나의 기억이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 이름을 불러주었다 어디든 거기가 고향이므로

여행자는 한 번도 떠나본 적 없는 자라고, 집시의 영혼 속에 튼튼한 기둥을 세우고
버리고 온 시의 나라,
푸른 지붕 위에서 별들을 만졌네

다시 어디쯤 집을 지을까? 무덤들,
늙은 산들 위에서 다리를 모으고.

우산을 한쪽 팔에 걸어놓았어
구름의 모퉁이 방울이 울리면, 길 건너 중국 식당까지는 아직도 멀고 황급한 목소리 뒤에서
바빌론 그릇 조각들이 떨어져내렸다,
수천년 전 주인의 손에서

그렇게 모두 사라질 것이다, 눈금으로 새기는 발굴의 도면 위에 낯선 문자로 씌어지는 유적으로
먼 대륙의 낯선 후손들에게, 오래된 영혼의 폐허를 깨진 시의 조각들로 고백하며
―신용목 〈늙은 산들의 마을〉 부분(《시인수첩》 2011 가을)

 

 

그러나 어떤 장소들은 사라지지만 진정으로 말소되지는 않는다. 그곳을 공유했던 존재들의 기억 속에 살아남는다. 때로는 물리적인 공간성을 잃어버린 후 그 자신의 본질을 획득하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장소가 지닌 시간적 두께를 경험한다. “푸른 지붕 위에서 별들을” 만질 때처럼 하나의 장소 속에서 고대와 현재가 조우하는 것을 경험한다. 사라진 세계가 지금 여기와 대면하고, 집과 무덤이 연결된다. 하여 중국 식당 모퉁이에서 바빌론의 문자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장소란 “낯선 문자로 씌어지는 유적”과도 같다. 그것을 기억하는 이가 존재하는 한 장소는 존재한다.

 

그럴 때 시란 무엇인가. 어쩌면 시는 “오래된 영혼의 폐허”를 해독하는 과정 자체이다. 시인은 “수천년 전 주인의 손에서” 떨어져 내려온 언어의 조각들을 맞추는 존재이리라. 따라서 시인에게는 국적이 무의미하다. 그는 현존하는 장소들 속에 기억의 장소들을 겹쳐놓음으로써 장소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동시에 실험한다.

 

한편 주병율의 시 〈머위〉는 하나의 사물을 내밀하게 관찰함으로써 지워진 시간과 장소들을 복기한다.

 

 

마당에 머위를 키우기 시작한 지도 삼 년이 지났다
무엇을 키우고 기르며 산다는 세월이란
헝클어진 솜털뭉치와 같아서
내가 사연 많은 그의 시간이 된다는 것인데
가끔씩 황호색비단벌레가 울음을 우는 밤이면
한 뼘 머위대의 가는 허리가 더 휘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때마다 그의 눈빛은 주검을 바라볼 때처럼 깊어서
성긴 울음의 빈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곤 하였다

그로부터 시간은 비늘처럼 생긴 포(苞)들에 싸인 꽃대 위에서
하나하나의 꽃처럼 보이기 시작하고
한때는 꽃의 부드러운 손에 밀렸던 밀서 같은 비밀에 기대어 나도
장식의 말발굽 아래 새긴 헛된 요령을 흔들며
저 울음의 내력을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라는 말도 모른 채
내 마른 기침의 내력을 용서하기만 하였다
―주병율 〈머위〉 부분(《유심》 2011 9/10)

 

시인은 지금 빈 곳을 보고 있다. 그곳은 이제 곧 “황호색비단벌레”가 울다 사라질 곳이다. 그러나 그곳은 모든 존재의 처소이기도 하다. 살아 있는 존재들이 언젠가는 돌아갈 자리. 시인은 이 빈 곳을 통해 존재의 또 다른 장소인 부재를 읽어낸다. 시인은 “머위”가 내포한 시간의 깊이와 향기를 복기하면서 존재의 본질에 다가선다. 그리고 마침내 존재하는 것의 본질이 공성(空性)에 있음을 성찰한다.

 

즉, 삶의 “빈 자리”에서 본다면, 살아 있음은 존재하면서 부재하는 것이다. 존재와 부재는 분별할 수 없다. 부재는 존재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이기 때문이다. 유한함 속에 무한한 공성이 자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공성은 모든 생명존재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 이것이 바로 주병율 시인이 빈 곳에서 발견하는 “밀서”의 의미다. 이처럼 서정은 관조를 통해 가시적인 것 너머의 본질에 다가선다. 존재 내부의 “내력”을 읽는 동시에 개별자 안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생명의 순환을 본다. 서정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장소의 결핍을 봉합한다.

 

현대의 시인들은 운명적으로 장소 상실을 경험한다. 장소성이 결여된 근대 이후의 삶으로부터 다른 삶으로 넘어가고자 한다. 그럴 때 시인들은 기억과 현실, 장소와 비장소 사이에서 편향된 아름다움을 추출하기도 한다. 현대세계가 기획하는 무감하고 비정한 무장소(無長所) 안에 주관적이고 아름다운 심미적 장소들을 발굴해 나아간다.

 



장소 없는 사유들

한편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의 감각 속에 자리한 무장소성에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경험하는 공간은 무한히 확장된다. 공간은 감각적인 것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들은 장소 상실을 결핍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장소 상실은 일상성 자체이다. 그것은 장소 상실을 직접적인 고향 상실로 경험했던 근대적 풍경과도 사뭇 다르다. 장소 없는 탈경계적 관계성이 장소와 결합된 근대적 자의식보다 앞선다. 그러므로 그들은 장소를 갈망하지 않는다.

 

장소감의 결여를 고통으로 인식하지도 않는다.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의 공간을 지구로 재현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민족과 국경으로부터도 비교적 자유롭다.


서효인의 시 〈토마토와의 인사〉에서 보듯, 장소 상실은 어떤 종류의 심리적 외상도 동반하지 않는다. 탈근대적 의미에서 공간은 물질 공간이라기보다는 비물질 공간에 가깝다. 즉, 공간은 장소의 한계를 넘어선다. 물론 그것은 우리 시대의 일면이다. 공간의 무한한 확장은 역설적으로 존재와 공간이 불연속하고 공간과 장소의 관계성이 약화되는 현실을 반증한다.

 

 

이곳이 지구입니까?

괴물로 가득한 행성의 표면을 보고 토마토는 놀란 표정으로 묻는다. 그들이 처음부터 괴물은 아니었단다. 그들은 먹느라 바쁘다. 튀느라 바쁘고 바쁘다는 사실을 숨기느라 바쁘다. 너무나 바쁜 이들은 숨이 가쁘고, 괴물이 되기도 쉽다.

그러나 여기서 잠깐 기다리자.
토마토가 익어간다.

괴물과 괴물 사이, 시멘트의 더운 틈에서 기어코 올라오는 여름들, 빨간 토마토처럼 이토록 뜨거운 열기를 차마 손에 쥐지 못하고 우리는, 활짝 편 손을 들어 흔든다. 흔들리는 손이 전하는 인사.

그러니까, 지구 바깥에서 당신은 지금 잘 계십니까? 안녕하십니까? 대답이 들리지 않는다. 우린 더 가까이로 가야겠다.

다시 토마토가 묻는다. 정녕 이곳은 어느 별입니까. 저기 손을 흔들며 걸어오는 사람들의 별이다. 그러니까 지구가 맞습니까. 지구는 우리에게서 가장 가까운 별이고, 저들은 토마토처럼 처음과 끝이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손을 흔든다.
토마토 색 바람이 분다.
당신이 살아야 할 지구별에서.
―서효인 〈토마토와의 인사〉 전문(《현대시》 2011. 9)

 

 

지구와 지구의 바깥(지구의 내부)이라고 하는 추상적 공간개념이 지극히 사실적인 공간, 즉 현실공간으로 인식된다. “토마토”라는 별에서 본다면 지구인은 “괴물”이다. 그들은 생존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하여 바쁘다. 그리고 그들은 생존 때문에 자신의 환경을 파괴하는 유일한 종이기도 하다. 이 부분에서 주목할 것은 “토마토”라는 별이다. 그것은 지구의 바깥이면서 내부이다.

 

토마토의 지구와 인간의 지구 사이에 시차(視差)가 존재하며 그것은 거의 우주만큼의 거리를 두고 있다. 이는 시적으로 인간중심적인 상상력을 탈피할 수 있다는 효과를 지닌다. 그런데 이러한 상상력의 기원은 역설적으로 장소 상실이라는 탈근대적 경험과 연관된다. 이 경우 감각의 무장소화는 긍정적 의미에서 근대적 삶의 영토들을 반성하는 근거로 작용한다. 그것은 근대적 장소 상실과도 현격한 차이를 지닌다. 따라서 이러한 공간경험을 중견 시인과 젊은 시인들을 구별하는 하나의 특이성으로 보는 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김현의 시 〈어린 병사에게〉에 내재한 무장소성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참호에 들어가 계십니까

숲은 무사합니다
촛불의 문을 열고 잠드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어제는 먼 시간을 돌아 숲으로 든 한 명의 밤이 있었습니다
그 밤과 박하 잎 띄운 나으나으를 나누어 마셨습니다
웅크린 밤의 폐에 한 그루 숨결을 심어주었습니다

기억합니다
당신의 키스 당신의 숨결 당신의 나뭇가지가 빗장뼈의 숲을 우수수 흔들던 계절을

전갈좌의 독이 밝아지는 우기
밤은 젖은 흙을 향해 소총을 내려놓고 내려앉았습니다
밤의 낡은 군화를 벗기고 찢어진 군복을 말아 올렸습니다
목이 긴 물병으로 밤의 종아릴 문질러주었습니다
하르르 하르르 숲의 정령이 돌리는 물레 소리를 들었습니다
별들의 차도르가 바람에 펄럭였습니다

그 참호는 얼마나
컴컴합니까
―김현 〈어린 병사에게〉 부분(《시와문화》 2011 가을)

 

 

“참호”는 장소인가 아닌가. 참호는 특정한 맥락 속에 자리한 공간일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존재들의 일정한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장소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참호가 지닌 장소성은 전쟁이라는 정황 속에서만 이해된다. 그리고 대개의 전쟁은 시작과 끝이 있다. 또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폭력적인 일회성을 띤다. 따라서 참호는 삶의 장소가 될 수 없다. 참호가 삶의 장소가 된다는 것은 참호에서의 삶이 지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전쟁이 일상적인 것으로 전환되었음 의미한다. 참호 속에서 어린 병사들은 포격 없는 밤을 상상하며, “나으나으”를 나누어 마시고, 숲의 정령들을 상상한다. 다시 말해 참호는 어린 병사들에게 주어진 삶의 공간이다.

 

참호라는 하나의 공간이 그들의 삶을 조종한다. 참호는 어린 병사의 삶의 세부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무엇을 상상할 것인가 하는 욕망의 구조를 파생시킨다. 테러리즘이 일상이 된 세계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다. 참호의 장소성에 대한 사유는 폭력적이고 냉혹한 지구적 생명정치와 그 시스템에 대한 시적 윤리의 표명이다. 우리가 발견하고자 하는 장소 없는 사유의 진정한 가능성이기도 하다.



장소의 발굴

시인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새로운 장소들을 발굴하기도 한다. 새로운 장소들은 익숙한 공간으로부터 탈구한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온 세계와 처음부터 불화한다. 이질적이고 저항적이며, 지극히 논쟁적이다. 아직 어떤 식으로든 명명할 수 없는 장소들, 명명할 수 없는 주체들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곳은 현대세계가 분배한 장소와 감각체계 내에서는 식별되지 않는다. 비식별적인, 계산될 수 없는 존재들과 관계가 실재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그것은 우리 시대의 시인들이 상상하는 혁명적 공간이다. 기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부터 모든 공간이 자본주의와 또 다른 자본주의의 전쟁터로 변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자본주의적 관계 안에 포섭할 수 없는 차이들이 태어난다는 것을.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 내부에서 태어나 체제를 불편하게 만들면서 끊임없이 떠돌아다닌다. 그리고 포착할 수 없지만 분명히 작동하는 저항의 장소들을 만들어낸다. 그곳에서는 세계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장소 없는 존재들이 태어나기도 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해적판’이다.

 

 

어느 한때에 운을 몰아주지 않는 건
그걸 골고루 나누기 때문이라고
믿을 수 없었지만
박한 공은 다시 우리에게 넘어왔다
공이 주인공이 아닌 공놀이
우리는 여직 그 변두리 팀을 응원한다

오후 네시의 싸이렌
깃발을 옮겨다닐 뿐 시합의 끝은 아니었다
승리도 패배도 무의미해질 때까지 무작정 오래 끄는 것
승리가 패배를 빌 때까지
무한정 순수한 파울

여전히 우리는 오늘이 붙박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우리도 모르게 돌고 있는 해적판인지
소리 죽여 돌고 있는 해적판인지
오후 네시의 싸이렌
우리의 동작은 바뀌지 않았다
동작을 비집고 오늘로 착지하는 자세들
잊지 않고 오늘을 해적판으로 들을 거라는 것
―김성대 〈시민 해적판〉 부분(《창작과 비평》 2011 가을)

 

 

김성대 시인은 “시민 해적판”을 “변두리”로, 어떤 “운”도 기대할 수 없는 운명 속에서 떠돌아다니는 존재들의 장소를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한다. 그들은 시민사회에 포함되지만 배제된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중성 때문에 그들은 일상세계 내부에서 체제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특별한 전략이나 주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무작정 오래 끄는 것” 이외에 어떤 체계적인 전술도 세우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자신에 대해서도, 미래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주체화할 수 없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무지는 그들의 힘이다. 무지하므로, 전략이 없으므로, 조직이 없으므로 그들을 식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들은 미래에 도래할 세계의 계산에서 포함되지만 궁극적으로는 배제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영원히 미래가 없는 “오늘”의 존재이다. 내일은 없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자본이 없다. 미래를 위해 투자할 어떤 가능성도, 조건도 없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약속하는 유토피아적 비전도, 공간도 배당받지 못한다. 그러나 해적판이 그렇듯, 그들의 존재를 부인할 수는 있지만 근절시킬 수는 없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지울 수 없는 ‘증상’이 된다. 오늘의 자본을 미래에 투자할 수 없으므로 어떤 지분도 이 땅에서 주장할 수 없는 그들은 기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존재들이다. 이 점에서 그들은 오늘과 내일 사이, 즉 “오후 네시의 싸이렌”과 같다. 그들은 벌거벗은 삶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인지는 불명료하다. 식별할 수 없는 주체들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자본주의 안에서 새로운 장소들이 태어날 가능성을 그들에게서 찾는다.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시가 드러내는 장소성에 대한 사유는 정치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 그리고 심미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이 겹쳐진 자리에서 발생한다. 장소를 기억하고, 발굴하고, 창조하는 모든 시적 행위는 보편과 구체, 현실과 기억, 존재와 부재 사이에 형성되는 수많은 충격과 함께한다. 미적 충돌은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보편적인 미적 본질이기도 하다. 따라서 현대의 시는 어떤 모호성 속에 자리 잡는다. 그것은 시적 장소가 세계의 무장소성과 충돌함으로써 유발되는 논쟁을 생각하게 한다. 시는 그 자체로 언제나 이미 자본주의의 증상이자 저항이다.

 

신진숙 | 문학평론가. 2005년 《유심》으로 등단. 저서로 《윤리적인 유혹, 아름다움의 윤리》가 있음. 현재 국제지역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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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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