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론] 시, 그리고 기타 여러 것들!
이은봉
광맥: 내게는 여러 개의 시의 광맥이 있다. 여러 개의 광맥에서 동시에 시를 캐내고 있는 것이 나이다. 시의 광맥을 많이 가지려고 내가 특별히 의도한 것은 아니다. 그동안의 내 삶이 그렇게 만들었을 따름이다. 어쩌면 그것은 내 마음이 여러 개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 시에 언뜻 일관성이 없어 보이는 것도 실제로는 이에서 비롯된다. 여러 개의 광맥에서 다양한 종류의 시가 채굴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시는 모두 꼼꼼하게 연결되어 있다. 근본적으로는 말하려고 하는 것이 다 같기 때문이다.
내 시의 이들 광맥 중에는 ‘현실’이라는 것도 있다.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객관의 역사적 현실이 있을 수 있고, 주관의 사회적 현실이 있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회적으로 토로하는 현실이 있을 수 있고, 직접적으로 토로하는 현실이 있을 수 있다. 당연히 과거의 자연(농촌)이 이루는 현실이 있을 수 있고, 오늘의 자연(농촌)이 이루는 현실이 있을 수 있다. 나아가 과거의 도시(문명)로 존재하는 현실이 있을 수 있고, 오늘의 도시(문명)촌)로 존재하는 현실이 있을 수 있다.
‘현실’이라는 시의 광맥에는 미래에의 꿈이라는 시의 광맥도 들어 있다. 꿈은 비현실이라는 점에서 환상이기도 하지만 기대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희망이기도 하다. 이처럼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는 것이 내 시의 현실이라는 광맥이다. 물론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내 마음속에 ‘현실’이라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이라는 광맥에서 캐낸 시가 단순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것들에 구체적으로 이름붙이기가 복잡하다는 것이다.
내 시의 광맥 중에는 ‘현실’이라는 광맥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이라는 광맥도 있다. 본래 모든 일상(생활)은 평이해 보인다. 일상(생활)이라는 광맥에서 캐낸 시가 평이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는 물 위에 떠 있는 오리가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것과 같다. 물 위에 떠 있기 위해 오리가 물밑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발가락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자의식이라고 해도 좋고 ‘나’라고 해도 좋은 시의 광맥도 있다. 이때의 ‘나’라고 하는 시의 광맥은 마음이라고 하는 시의 광맥과 즉해 있다. ‘나’라고 하는 것은 본래 실체가 없다. 굳이 나의 실체를 찾자면 마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마음이라고 해도 실체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내게는 역사라고 부를 수 있는 시의 광맥도 있고, 시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의 광맥도 있다. 역사라는 시의 광맥과, 시간이라는 시의 광맥은 각기 다른가. 아니다. 다르면서도 같고, 같으면서도 다르다. 순환하면서도 진행하고, 진행하면서도 순환하는 것이 시간이고 역사이다. 시간이라는 말을 시대라는 말로 대신해도 좋은가. 시대는 시간의 양적인 모습이다.
내가 지니고 있는 시의 광맥 중에는 돈이라는 것, 자본이라는 것도 있다. 돈이라는 시의 광맥과 자본이라는 시의 광맥도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다. 돈, 자본만큼 나를 사로잡는 시의 광맥도 없다. 돈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자본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모두 왜 이것에 그처럼 열광하는가.
내 시의 광맥은 이밖에도 많다. 여기서 그것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무엇 하랴. 어느 것이든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같지만 이름을 붙이면 다르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존재를 분리시켜 개적인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마음: 이름을 붙이도록 하는 것은 마음속 생각 때문이다. 유동하며 생성되는 생각은 늘 상호 편차를 만들고 구분을 만든다. 넓어지는 생각이든 깊어지는 생각이든 생각이 많은 것이 문제다.
실제로는 생각이 많은 것보다 생각 자체가 문제인지도 모른다. 대부분 고통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생각은 늘 사람을 고통스럽게 한다. 생각이 없어야 고통이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본래 생각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마음속 고통이다.
생각은 마음의 작용이다. 생각은 항상 상하좌우로 움직이며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고 충돌한다. 이런 까닭에 생각이 없어져야 마음에 평화가 오는 것이다. 마음의 해방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이 해방이 되어야 부처가 된다.
어떻게 하면 생각을 없앨 수 있는가. 죽지 않고, 죽음의 세계로 넘어서지 않고 생각을 없애기란 쉽지 않다. 생명이 종결될 때라야 몸은 생각, 즉 인식작용을 멈추기 때문이다. 죽음을 통과해야 해방이 가능해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 죽음을 뚫고 일어설 때 해탈이 가능해진다. 물론 죽음을 통과하는 일도 마음이 하는 일이다.
택일(擇一): 생각을 사유라는 기표로도 부른다. 사유……, 대부분의 사유는 선택과 관련되어 있다. 물론 특별히 선택적인 사유도 있기는 하다. 의도한 선택이 아니라 주어진 선택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선택은 본래 전체가 아니라 부분이다. 주어진 선택도 부분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마음 중의, 생각 중의 감정은 더욱 그렇다. 슬픔에 빠지려고 해서 빠진 슬픔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를 바 없다. 주어진 슬픔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나머지 것들을 버리고 하나를 고르는 일이 선택이기 때문이다.
선택되고 남은 것이 하나일 때 흔히 양자택일(兩者擇一)이라고 한다. 두 개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것 말이다. 하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두 개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일보다 여러 개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일이 훨씬 더 많다.
양자택일(兩者擇一)이든 다자택일(多者擇一)이든 택일은 택일이다. 따라서 택일, 즉 하나를 고르는 일은 단정적일 수밖에 없다. 단정적인 택일은 고통을 거느릴 수밖에 없다. 고통을 거느릴 수밖에 없다는 것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머지를 버리고 하나를 택하는 일은 괴로롭다. 버려진 나머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일을 잘도 해낸다.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만드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일까. 그들에게는 모든 존재가 늘 선과 악으로 대별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뜻에서 물어 보자. 선택된 것들과 선택되지 않은 것들은 다른가. 다를 수도 있지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이들이 늘 서로 공존할 수는 없을까. 판단하기 쉽지 않다. 불투명하다. 정직한 것은 본래 불투명한 것 아닌가. 선택되지 않더라도 선택되지 않은 것을 선택된 것만큼 지극하게 받들 수는 없을까.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까닭은 다자(多者)와 일자(一者)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자(一者)에 즉해서 다자(多者)가 태어나고, 다자(多者)에 즉해서 일자(一者)가 태어난다는 것을 알기는 쉽지 않다.
일즉다(一卽多)의 마음을 알고 실천하면 마음에서 동요를 거둘 수 있다. 일즉다(一卽多)의 마음이 평화와 해방을 만드는 마음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일(一)은 空이고, 다(多)는 색(色)이다. 이런 연유에서도 일즉다(一卽多)의 마음은 아직 유효하다.
각자: 내 시 속에는 내가 만든 여러 인물이 있다. 이들은 ‘각자’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장산’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드물게는 ‘모듬내’라는 이름으로도 등장한다. 이들 인물을 가리켜 나의 ‘아바타’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이들은 내 뜻을 곧바로 따르지 않는다. 물론 이들은 동일인이 아니다. 나이면서도 내가 아닌 셈이다.
‘장산’은 장백산의 줄인 말이기도 내 고향 공주군 장기면에 있는 장군산의 줄인 말이기도 하다. 도산이나 거산처럼 고향 마을의 ‘산’ 이름을 따온 것이다. 따라서 특별히 그 의미를 되물을 필요가 없다. 퇴계나 율곡 등의 이름이 갖는 객관성을 취하고 싶을 따름이다.
모듬내는 내 고향 마을의 옆으로 흐르는 시내의 이름이다. 한자로는 제천(濟川)이라고 쓴다. 지내라고도 부르는데, 제천(濟川)의 제(濟)는 건너다, 구하다, 건지다, 모으다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대체로 이들 인물은 나를 남처럼 말하고 싶을 때 태어난다. 나를 비웃을 때, 나를 미워할 때, 나를 안쓰러워할 때, 나를 대견해할 때, 기타 이와 비슷한 마음일 때 등장한다. 내가 이런 장난을 하는 까닭은 단순하다. 세상에 차마 어찌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짓이라도 하며 무료를 견디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이들 인물 중에서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각자’이다. 한글로 각자라고 쓰니 우선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혼란스러울 듯하다. 여자이면 어떻고 남자이면 어떤가. 각자는 그냥 각자이므로 성이 불분명하다. 이각자라고 부르기도 하니 이 씨가 성인 것은 분명하지만.
개중에는 각자를 각자(覺者)라고 읽어 나를 기고만장한 놈이라고 아는 사람도 있다. 각자(覺者)는 어림도 없지만 그 말에 성동격서(聲東擊西)가 없지는 않다. 복선이 있는 말이라는 얘기이다.
각자라는 말과 관련해 내가 일차적으로 노리는 뜻은 각자(各自)이다. 각자(各自)라는 말에는 일단 개인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그런 점에서 각자는 자본주의적 인물형과 관련되어 있다. 물론 각자(各自)라는 말에는 각기 자율적이면서도 자유로운 사람, 자재로운 사람이라는 뜻도 들어 있다.
그렇다면 각자(各自)라는 인물이 각자(覺者)라는 인물과 무관하다고도 할 수 없다. 이에는 각자(各自)가 각자(覺者)가 되어야 ‘좋은 세상’이 오리라는 바람이 숨어 있다.
실제로는 각자(恪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각자(恪子)라는 말에는 늘 삼가는 사람이라는 겸손한 마음이 들어 있다. 동시에 공자, 맹자, 순자와 동급이라는 자기 희화(戱化)가 섞여 있다. 그러니 어찌 어느 하나의 의미를 취하고 나머지 의미를 버릴 것인가. 두루 재미있지 않은가.
이런 장난은 다 더럽고 지저분한 오늘의 이 세월을 견디기 위한 한갓 놀이에 불과할 수도 있다.
자세: 말을 데리고 놀지 못하고서는 계속해서 문학을 하기 어렵다. 문학을 하는 일이 너무 힘들고 어렵기 때문이다. 오늘의 이 자본주의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가난을 각오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 지금의 이 시대에 문학을 하는 일이다. 그렇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유일하게 저항할 수 있는 것이 문학, 특히 시이다.
그래도 자본주의라는 이 이데올로기는 저를 잘 욕하는 시인을 찾아 상을 주기도 한다. 좀 더 아름답고 예쁘게 욕을 하라는 뜻이리라.
세상에는 본말이 전도되어 있는 것이 많다. 시인이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는 것도 그 하나이다. 자본주의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사회의 중요한 특징인 불평등을 아무런 반성 없이 수락한다는 것을 뜻한다.
외부 세계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있는 섬에 불과한 것이 문단이다. 이런 문단에서 문학상을 좀 받은 시인이 저도 모르게 행하는 속류적 포오즈는 정말 싫다. 문학상을 받은 시인일수록 ‘자세’를 하고, ‘우세’를 하는 예를 많이 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격 있는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에게 ‘자세’하고 ‘우세’하는 일이야 말로 격 없는 일이 아닌가. 다른 속물들처럼 마음의 어깨를 으스대는 시인들이 너무 딱해서 하는 말이다. 그런 시인일수록 시가 下心의 산물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나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마음을 갖지 못하면 좋은 시는 찾아오지 않는다.
도시: 사람들은 이제 돈이 없는 삶을 상상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꾸는 꿈의 내용도 대부분은 돈이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돈이 없는 삶은 불행하다고! 그렇다. 오늘의 도시에서는 모든 행복이 돈에서 나온다.
언제부터 돈이 행복의 척도가 되었을까. 아마도 삶의 공간이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된 이후부터인 듯싶다. 삶의 공간이 도시에서 펼쳐지면서 출현한 것이 근대이다. 근대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도 도시의 산물이다. 도시를 기반으로 태어난 것이 산업사회 아닌가.
돈이 없으면 시장에서 물건을 소비할 수 없다. 따라서 소비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지금의 도시에서는 소비가 곧 권력이다. 그러나 돈을 벌 수 있는 정규직을 얻기는 너무도 힘들다.
도시는 아직 황폐한 사막이다. 땡볕을 피할 나무그늘도 없고, 소낙비를 피할 바위틈도 없다. 기하학적으로 쪼개져 있는 도시에서 사람들은 정처를 잃은 채 헤매고 있다. 급기야 사람들은 발가벗겨진 채 도시의 구멍 속에 팽개쳐지고 있다.
도시의 구멍은 땅속에도 있고 땅위에도 있다. 땅속에는 수많은 지하아케이드가 있고, 땅위에는 수많은 빌딩이 있다. 이들 도시의 구멍들은 모두 악의 소굴이다. 자기가 키우는 사람이라는 짐승을 매일매일 뜯어먹는 괴물이 도시의 구멍들이다. 악의 소굴인 이들 괴물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짐승은 없다.
모든 도시가 정말 다 악의 소굴인가. 환웅(桓雄)이 태백산 신단수(神壇樹) 밑에 세웠다는 신시(神市)도 그런가. 오래 전에 「神市 航行」이라는 시를 쓴 적이 있다. 이 시 속의 신시(神市)는 물론 악의 소굴이 아니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 생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신시(神市)와는 달리 오늘의 근대도시, 산업도시는 너무도 복잡하고 난해하다. 오늘의 산업도시가 만드는 삶은 늘 어렵고 힘들다. 삶이 어렵고 힘드니 시도 어렵고 힘든가. 어렵고 힘들지 않으면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지금의 산업사회인지도 모른다. 산업사회가 아니라 정보사회라고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산업사회가 지니고 있는 이런 점을 반영해 소통을 거부하는 것이 지금의 예술인가. 그럴 수도 있으리라. 이 시대의 도시예술, 이 시대의 도시시가 해독불능을 좋아하는 것도 이 때문인가. 그럴 수도 있으리라.
바로 그런 이유에서 자기 시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쓰는 시는 난해할 수밖에 없는가. 이들 난해한 시는 대부분 소통거부를 주요내용으로 삼는다. 당연히 그런 시는 좋은 시가 못된다. 오늘의 이 사회를 이해하지 못하고 쓰는 시가 좋은 시가 될 리 만무하다.
본래 자본주의 시대의 시는 자본주의 시대의 극복을 주요내용으로 할 수밖에 없다. 극복이라는 말을 부정이라는 말, 비판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좋다
예의 좋지 않은 시는 시들은 대체로 시인의 미숙한 지식이 만든다. 말을 바꾸어 이들 나뿐 시는 미처 소화하지 못한 책이 만든다고 해도 좋다. 책이 만드는 시는 아무래도 관념이 만드는 시가 될 수밖에 없다, 관념이 만드는 시는 재미없다. 삶이 만드는 시, 경험이 만드는 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시에는 형상이 들어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이야기, 이미지, 정서가 들어 있지 않다. 이런 시에는 공간도 들어 있지 않고 시간도 들어 있지 않다. 추상이 이런 시의 내용이고 형식이다. 시간은 버리더라도 공간은 지니고 있어야 시는 감각을 통해 기쁨을 나눌 수 있다. 이때의 공간은 삶의 장소를 뜻하고, 시간은 삶의 서사를 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도시는 집중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에너지가 집중되지 않고 도시가 존재하기는 어렵다. 들끓는 에너지가 충돌하는 곳이 도시이다. 오늘날 지구상에 지속적으로 생태문제가 제기되는 것도 도시가 갖는 이런 특징 때문이다. 따라서 생태문제는 도시문제이기도 하다. 도시의 삶이 불안하고 초조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불안하고 초조한 자아는 분열되고 파괴된 자아에서 비롯된다. 분열되고 파괴된 자아를 지니고 있으면 격이 있는 삶을 살기 어렵다. 한순간에 짐승으로 돌아가기 쉬운 것이 이들 자아이다.
이들 자아도 실제로는 각자(各自)이다. 이처럼 복잡하고 난해한 도시에서 각자(各自)가 각자(覺者)가 되는 것은 너무 어렵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각자(各自)는 각자(恪者)의 마음으로 각자(覺者)가 되려는 의지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럴 때 세계가 한걸음 앞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유심』(2011. 11/12)
-http://cafe.daum.net/lebzoa(이은봉- 돌과바람의 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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