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정신 치유능력, 그 실제와 전망
이은봉
1. 머리말-논지의 초점
이 글에서 내게 주어진 주제는 「시의 치유 가능성과 방향」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제에 따른 논의는 지금의 내 능력으로 볼 때 아무래도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이 글의 주제를 '시의 정신 치유능력, 그 실제와 전망'으로 고쳐 몇 마디 내 생각을 얘기해보려고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단 기본적인 전제가 필요하다. 말하자면 인간에게만 고유하게 존재하는 精神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는 얘기이다. 따라서 우선은 정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그에 따른 대답이 요구되어야 마땅하다. 이러한 논의는 무엇보다 시가 육체(물질)의 산물이 아니라 정신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 정신활동을 하는 존재인 인간의 본질적 특징을 반영하는 것이 시라는 것이다.
2. 정신이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시에는 치유능력이 있다고 말한다. 시의 치유능력이라고 할 때의 치유의 대상은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이때의 치유의 대상은 육체(물질)가 아니라 精神이다. 따라서 시의 치유능력은 정신치료의 능력, 마음치료의 능력을 뜻한다.
그렇다면 먼저 인간의 마음, 곧 精神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그에 다른 대답부터 필요하지 않을 수 없다. 전통적인 차원에서 말하면 精神은 ‘精氣神’의 준말이다. 精氣神은 인간의 마음활동 일체를 가리키는 기표이다. 따라서 精氣神의 준말인 精神은 하단전으로서의 精, 중단전으로서의 氣(情), 상단전으로서의 神(理)을 가리키는 말로, 인간의 마음활동 일체를 뜻한다. 물론 인간의 마음활동 중에는 초단전으로서의 靈도 있기는 하다. 이때의 靈은 당연히 좀 더 고조되고 고양된 인간의 정신활동을 가리킨다.
精氣神이라고 할 때의 精은 精液이라고 할 때의 精, 精囊이라고 할 때의 精이다. 精은 下丹田에 기대어 태어나는 마음활동이다. 이렇게 태어나는 精으로서의 마음활동이야 말로 인간이 이루는 모든 정신활동의 토대이고 뿌리이다. 子宮이나 精囊을 바탕으로 태어나는 것이 이 영역의 마음활동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마땅히 이 영역의 정신활동은 매우 충동적이고 즉흥적이고 우발적이다.
精氣神이라고 할 때의 氣는 氣運이라고 할 때의 氣, 氣勢라고 할 때의 氣이다. 氣는 중단전에 의지해, 곧 배와 가슴에 의지해 태어나는 정신활동이다. 흔히 말하는 感情, 곧 四端七情의 七情이 이때의 氣에 해당한다. 이렇게 태어나는 氣로서의 마음활동은 心理라고 할 때의 心을 가리키기도 한다. 불가에서 말하는 一切唯心造의 心도 이때의 心과 다르지 않다. 情으로서의 마음활동, 곧 氣로서의 마음활동이야 말로 인간이 이루는 정신활동의 기본내용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氣=情=心은 인간의 마음이 갖는 변화의 영역, 곧 變數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精氣神이라고 할 때의 神은 鬼神, 神靈이라고 할 때의 神이지만 神을 그렇게만 받아들이면 다소 비의적인 마음활동으로 생각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神은 상단전에 의지해, 곧 머리, 두뇌에 의지해 태어나는 理致的인 마음활동이다. 따라서 神은 흔히 말하는 理(性), 곧 四端七情의 四端에 해당한다. 이렇게 태어나는 神으서의 마음활동은 心理라고 할 때의 理와도 다르지 않다. 理로서의 마음활동, 곧 神로서의 마음활동은 인간이 이루는 정신활동의 '주요'내용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神, 즉 理는 인간의 마음이 갖는 변하지 않는 영역, 常數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인간의 마음은 精氣神, 곧 本能(性), 感性(情), 理性이라는 세 영역으로 분할이 된다. 인간의 정신활동이 크게 精과 氣와 神, 곧 본능(성), 감성(정), 이성의 세 영역으로 분할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제1영역은 본능의 영역이고, 제2영역은 감정의 영역이며, 제3영역은 이성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영역이 누구에게나 3개의 영역으로 분할되어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혹자에게는 4개의 영역이나 5개의 영역으로 분할되어 이해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精神活動의 영역이 4개로 분할되는 것에는 하단전(精), 중단전(氣/情), 상단전(神/理), 초단전(靈)의 형식, 곧 본성(본능), 감성(감정), 이성, 영성의 형식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5개로 분할되는 것에는 본성(본능), 감성(감정), 의지, 이성, 영성의 형식이 있을 수 있다. 이는 의지를 따로 독립시켜 정신의 고유한 영역으로 편입시켜 받아들이는 경우이다.
이들 정신영역은 늘 상호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통합되어 있다. 각기 다른 차원을 형성하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서로 침투하고, 간섭하고, 관여하는 것이 이들 정신영역이다. 따라서 이들 정신영역 가운데 어느 한 곳에 이상이 생기면 다른 한 곳도 이상이 생길 수밖에 없다.
여기서 이상이 생긴다는 것은 정신영역에 병이 생긴다는 뜻이다. 인간의 정신영역에 병이 생긴다는 것은 그 중의 한 곳에 문제가 생긴다는 얘기가 된다. 이들 중 한 부분의 정신영역이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 이른바 정신병, 정신질환이라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간의 정신영역은 여러 형태로 분할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설득력이 있고 안정감이 있는 것은 인간의 정신영역이 셋으로 분할되는 경우이다. 이렇게 셋으로 분할된 정신영역은 인간 고유의 인식능력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말하자면 인간의 인식능력, 곧 앎의 능력도 세 개의 영역으로 분할될 수 있다는 뜻이다. 본능과 관련된 제1영역에 해당하는 직관력, 감정과 관련된 제2영역에 해당하는 상상력, 이성과 관련된 제3영역에 해당하는 이해(지성)력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세 개의 정신영역은 예의 세 개의 인식능력과 함께 세 개의 정신세계를 만든다. 여기서의 세 개의 정신세계는 본능과 관련된 제1영역이 만드는 욕망(물질)의 세계, 감정과 관련된 제2영역이 만드는 예술(문학)의 세계, 이성과 관련된 제3영역이 만드는 학술(과학)의 세계가 그것이다.
이 세 정신영역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精의 영역, 곧 본능(성)의 영역, 다시 말해 하단전의 영역이다. 이는 모든 생명체들이 지니고 있는 근원적인 생명의 영역이기도 하다. 이 생명의 영역은 흔히 식욕의 부분과 성욕의 부분으로 나뉜다. 식욕은 생명의 연장과 관련되어 있고, 성욕은 종족의 보존과 관련되어 있다. 본능의 영역이기 때문에 이들 욕망이 제대로 충족되지 않으면 다른 정신영역, 즉 감정의 영역이나 이성의 영역이 억압되어 제대로 가동되지 못한다. 대부분의 정신질환은 이 부분의 정신영역이 과도하게 억압당하거나 핍박당할 때 잉태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은 자신의 원초적인 조건 때문에 근원적으로 세계와 분리되어 있다. 따라서 세계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는 인간은 예의 욕망에 플러스되어 있는 a 때문에 늘 자신의 행동에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이 a는 매번 좀 더 근원적인 결핍으로 작동하며 수시로 인간의 행동에 개입한다. 따라서 이 a는 축적되는 욕망, 저축되는 욕망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내면에 잠재되어 있다가 뒷날 불쑥불쑥 나타나 인간의 행동을 왜곡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a를 비롯한 精의 영역은 매우 섬세해 상처받기 쉽고 왜곡되기 쉽다. 충동적이면서도 즉흥적이고 우발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정신질환이 이 영역의 상처에 기원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생명체는 구체적인 발현의 양태는 다르더라도 기본적으로 精의 영역, 곧 본능의 직관적인 세계를 갖고 있다. 하지만 氣의 영역, 곧 情의 영역이나 神의 영역, 곧 理의 영역까지 갖고 있는 생명체는 많지 않다. 물론 인간은 이 세 개의 영역을 다 갖고 있지만 말이다.
이제는 氣의 영역, 곧 感情의 영역과 관련해 인간의 정신영역을 살펴보기로 하자. 무수한 역사 속에서 인간은 질적인 전환을 통해 몇몇 온혈동물들과 함께 감정의 영역, 즉 중단전의 영역, 다시 말해 氣의 영역을 갖게 된 바 있다. 이러한 질적인 전환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진화의 증거인 동시에 창조의 증거이기도 하다. 감정의 영역, 곧 氣의 영역은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정신능력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시 말해 온혈동물들도 지니고 있는 정신능력이라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본능의 영역, 곧 精의 영역에 가깝다. 氣(感情)의 영역이 그만큼 안정감이 없고 변화가 심한 정신영역이라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정신질환의 증세는 대부분 이 氣의 영역을 통해 드러난다. 그렇다. 광기를 보인다든지, 발광을 한다든지 하는 것은 본능의 영역에서 감정의 영역에 걸쳐 일어나는 파괴된 정신활동이다.
精氣神에서 神의 영역, 곧 理性의 영역, 知性의 영역은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인간 고유의 특별한 정신영역이다. 물론 개중에는 제대로 된 神의 영역, 곧 理性의 영역, 知性의 영역이 크게 약화되어 있는 인간도 많다. 본능과 감정에 쫓겨 자신의 삶을 함부로 휘둘리는 인간도 많다는 뜻이다. 인간의 마음활동이 갖고 있는 神의 영역, 곧 理性의 영역, 知性의 영역은 자기 견제의 영역, 자기 인내의 영역이기도 하다. 자신의 본능과 감정을 통제하고 절제하고 조절하는 정신영역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영역 중에서는 의지의 영역이 특히 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따라서 오늘의 주제인 시 치료와 관련해 가장 주의를 집중해야 할 정신영역은 神(理) 영역이기보다는 精의 영역과 氣의 영역의 영역, 다시 말해 본능의 영역과 감정의 영역이라고 해야 옳다. 이들 정신영역은 곧바로 시의 영역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오늘의 주제인 시 치료와 관련해 좀 더 주의를 요한다.
3. 정신은 자아의 실재다.
精(본능)의 영역이든, 氣(감정)의 영역이든, 神(이성)의 영역이든 인간이라는 주체가 정신활동을 하는 바탕을 개념화시켜 흔히 자아라고 한다. 정신활동을 하는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자아’라는 것이다. 주체의 정신이라는 말이 주체의 자아라는 말이 되기도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이때의 자아라는 말이 프로이트 식의 이드(id)로부터 비롯되는 에고(ego)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이때의 자아는 ‘소아’가가 아니라 ‘대아’인 셈이다.
精의 영역, 氣의 영역, 神의 영역은 결국 자아의 정신영역을 셋으로 나누어 구체화하는 셈이다. 자아의 정신영역을 셋으로 나누어 구체화하는 까닭은 무엇보다 그렇게 할 때 인간의 정신상황이 좀 더 확연히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아의 정신영역을 셋으로 나누어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늘 상호 침투하는 가운데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들 자아의 정신영역은 본래 현실과 교섭하고 관계하는 가운데 형성되고 전개되기 마련이다. 현실의 축적이 역사이니 만큼 현실과 교섭하고 관계하는 자아는 역사 속에서 일정하게 변화되지 않을 수 없다. 변화하는 역사로 볼 때 개인의 자아, 곧 주체의 정신영역이 보편적으로 형성되고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자본주의적 근대 이후라는 것이 통설이다. 대부분 인간들의 경우 자본주의적 근대 이전에는 주체적인 자아를 갖고 있지 못했다는 얘기이다. 신이나 왕, 주인이나 가부장 등에 깊이 종속되어 있었던 것이 당시 인간들의 일반적인 자아였다는 것이다. 이들 절대적인 존재들에 대한 종속성은 남성들보다 여성들에게 훨씬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女必從夫라는 말이 있었던 것만 보더라도 이는 잘 알 수 있다.
거개의 인간의 자아가 저 스스로를 발견하고 주체를 실현하기 시작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자본주의적 근대가 출현된 이후이다. 우선은 먼저 자본주의적 근대에 이르러 사회적 주체로 자립하게 된 부르주아 계급 안에서 자아의 발견과 자아의 실현이 이루어지게 된다. 자아의 발견과 자아의 실현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개인의 자아가 당대의 현실 안에서 정신활동을 하는 주체로, 곧 주인으로 정립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와 관련해 기억해야 할 것은 자본주의적 근대가 진행되는 과정에 삶의 일상이 거듭 일그러지고 찌그러지자 그 대안으로 사회주의적 근대 이후가 논의되는 과정에 노동자들도 저 자신의 자아를 발견하게 되고 실현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자본가들만이 아니라 노동자들 자신도 자신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싸움에 나서게 되는데, 싸움에 나서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자아를 발견하고 자아를 실현하는 과정이라는 점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여성들에게도 경제적인 자유를 갖도록 하는데, 그것은 곧바로 여성들도 저 자신을 발견하게 하고 저 자신을 실현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경제적인 지위가 향상되는 과정에 여성들도 저 자신을 자각하게 되고, 그러한 가운데 여성들도 저 자신을 바로 세우게 되거니와, 실제로는 이러한 노력 자체가 자아를 발견하고 실현하는 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의 차이를 떠나 모든 존재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내가 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저 자신의 인권을 발견하고 실현할 수 있는 토대를 갖게 된다는 점에서 인간정신의 대단한 발전이고 승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누구나 다 역사의 현실 속에서 저 자신의 위상과 역할을 자각하고 구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저 자신의 위상과 역할을 자각하고 구현하는 과정, 즉 저 자신의 자아를 발견하고 실현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피나는 투쟁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개인의 자아가 저 자신의 자유를 자각하고 실현하는 것 자체를 끊임없이 가로막는 것이 자본주의적 근대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자본주의적 근대라는 현실은 그 자체로 욕망의 늪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이때의 욕망 중에는 당연히 자본주의적 근대라는 현실을 살아가는 개인의 자아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자본주의적 근대사회에서는 자아 자신의 욕망 또한 끊임없이 부추겨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끊임없이 부추겨지고 있는 저 자신의 욕망과 함께 하게 되면 자아의 정신영역은 아무래도 분열되거나 파괴되거나 응축되거나 도착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욕망과 함께 하면서 분열되거나 파괴되거나 응축되거나 도착되는 자아의 정신영역은 늘 精(본능)과 氣(감정)에 걸쳐 있을 수밖에 없다. 분열되거나 파괴되거나 응축되거나 도착된 精(본능)과 氣(감정)에는 온전한 神(理性), 곧 올바른 의지가 작동되기 힘들다. 이때의 精과 氣에는 이미 神, 곧 이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늘 유의해야 한다.
따라서 이때의 자아에게는 주체라는 이름을 붙이기가 어렵다. 비주체로서 이때의 자아를 가리켜 사람들은 흔히 정신질환자라고 부른다. 이들 정신질환자가 지니고 있는 자아의 精과 氣가 찢어지고 으깨진 상태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자리가 바뀌거나 한 곳에 뭉쳐 있는 것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존재하는 자아의 현존은 다양한 멜랑콜리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精보다는 氣의 형태로 드러나기 쉽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그것은 자아의 뒤얽힌 욕망이 분열되고 파괴되면서, 응축되고 도착되면서, 억압되고 왜곡되면서 비롯되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때의 욕망은 氣보다 精에 더 가까울 수밖에 없다. 본래 욕망은 氣보다는 精에서 비롯되기 마련이다. 늘 충동적이고 즉흥적이고 우발적인 것이 精(본능)이라는 욕망의 실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神(이성)이라는 常數의 정신작용이 가장 통제하고 절제하기 힘든 것이 精(본능)에서 분출하는 욕망이다.
4. 자본주의적 근대라는 현실이 정신질환을 만든다.
精(본능)에서 분출되는 특징을 갖는 욕망은 오늘의 현실, 곧 자본주의적 근대라는 현실과 기본적으로 충돌하고 길항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적 근대라는 현실에 포섭되어 있을 때 자아의 욕망은 높은 차원의 정신경지보다는 낮은 차원의 물질이나 富를 추구하기 쉽기 때문이다. 물론 물질이나 富를 추구하는 것 자체는 인류의 오랜 역사와 함께 해온 보편적인 특징이라고도 할 수도 있다.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것 자체는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오랜 운명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 자본주의적 근대라는 현실에 이르러 추구되고 있는 물질이나 富는 그 본질로부터 너무도 멀리 벗어나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함께 나누고 함께 쓰는 차원으로부터 너무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에서 분열되고 파괴된 자아가 추구하는 자본의 실제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왜곡된 자아 자신의 욕망만을 위해 추구되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적 근대라는 현실과 함께 하고 있는 자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본을 독점자본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이러한 뜻에서의 물질이나 富, 이러한 뜻에서의 자본을 욕망하는 자아가 나날의 삶에서 항상 떳떳할 리는 만무하다. 따라서 정작 알아야 할 것은 이처럼 왜곡된 물질이나 富, 곧 어긋난 자본을 욕망하는 자아가 그런 저 자신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다는 점이다. 물질이나 富를 욕망의 자아, 다시 말해 저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자아, 별로 긍정하지 않는 자아가 온전한 주체, 평화로운 주체를 형성하기는 힘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개인이라는 주체와 함께 하기는 하더라도 자아의 정신영역은 본래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는 끊임없이 당대의 현실이라는 객체와 상호 교섭하고 관계하는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 자아의 정신영역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근대를 살아가는 자아의 정신영역이 결코 저 혼자 존재할 수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현대인의 자아, 곧 현대인의 정신영역이 크던 작던 다양한 질병을 앓게 되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때로는 자본주의적 근대라는 현실 자체가 정신질환을 확산시키고 심화시키는 바이러스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분열되고 파괴되고 응축되고 도착된 나날의 현실은 분열되고 파괴되고 응축되고 도착된 자아를 낳기 마련이다. 자아의 정신영역 중에서 좀 더 심하게 분열되고 파괴되고 응축되고 도착된 부분은 아무래도 氣(감정)의 영역보다 精(본능)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 精의 영역이 지나치게 분열되고 파괴되고 응축되고 도착되기 때문에 충동적이고 즉흥적이고 비약적이고 우발적인 행동이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들 충동적이고 즉흥적이고 비약적이고 우발적인 행동을 가리켜 정신질환이라고 하거니와,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일단 精의 영역과 함께 하는 氣의 영역부터 잘 알아야 한다.
분열되고 파괴되고 응축되고 도착된 자본주의적 현실에서 비롯된 분열되고 파괴되고 응축되고 도착된 자아가 이루는 氣는 과거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자본주의적 근대에 이르러 자아의 氣는 원형을 잃고 엄청나게 변질되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주지하다시피 자아의 氣가 이루는 원형은 喜怒哀樂愛惡欲이다. 이와 관련해 필자는 이미 다른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인간의 마음 가운데 感情, 氣, 七情, 喜怒哀樂愛惡欲은 본래 변화하는 것, 즉 變數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간의 감정(감성), 즉 喜怒哀樂愛惡欲은 이미 자본주의적 근대 이전에 명명된 이름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七情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감정의 원형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원적이고 근원적인 감정이 다름 아닌 七情, 곧 맹자가 말하는 喜怒哀樂愛惡欲이라는 뜻이다.
감정의 원형인 喜怒哀樂愛惡欲은 크게 플러스의 정서와 마이너스의 정서로 나누어진다. 플러스 정서는 생명의 정서이고, 마이너스 정서는 죽음의 정서이다. 생명의 정서는 통합의 정서이고, 죽음의 정서는 분리의 정서이다. 통합의 정서, 생명의 정서, 플러스의 정서는 喜, 樂, 愛이고, 분리의 정서, 마이너스의 정서, 죽음의 정서는 怒, 哀, 惡이다. 그러면 欲은? 欲은 플러스 정서(생명의 정서, 통합의 정서)도 아니고, 마이너스 정서(죽음의 정서, 분리의 정서)도 아니다. 欲은 중도의 정서라고 할 수 있다.
欲에는 이들 두 정서가 착종되어 있다. 그러니 만큼 欲은 상황과 조건에 따라 생명의 정서(플러스 정서, 통합의 정서)로 발현될 수도 있고, 죽음의 정서(마이너스 정서, 분리의 정서)로 발현될 수도 있다. 欲이 생명의 정서(플러스 정서, 통합의 정서), 즉 밝은 품성에 바탕을 둘 때 喜, 樂, 愛은 활기를 얻는다. 구체적인 삶에서 생명의 정서(플러스 정서, 통합의 정서)를 살기 위해서는 怒, 哀, 惡의 정서보다는 喜, 樂, 愛의 정서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생명의 정서는 삶을 들어 올리고, 죽음의 정서는 삶을 주저앉힌다. 생명의 정서는 삶을 심화, 확장시키고, 죽음의 정서는 삶을 소외, 폐쇄시킨다. 생명의 정서는 삶을 업시키고, 죽음의 정서는 삶을 다운시킨다. 그렇다. 생명의 정서는 밝고 환한 빛의 氣인데 비해, 죽음의 정서는 어둡고 탁한 빛의 氣이다.(「죽음의 정서들 밖으로 내는 쬐그만 창」, 《시와인식》 2008년 여름호)
오늘의 현실에 이르러 되돌아보면 자본주의적 근대 이전에 명명된 원형의 氣(감정)인 喜怒哀樂愛惡欲은 지나칠 정도로 간단하고 소박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喜怒哀樂愛惡欲이라는 감정의 원형과 관련해 이처럼 단순하고 순박한 느낌을 갖는 것은 그것이 이미 훨씬 미세하게 분화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본주의 근대에 이르면서 훨씬 더 섬세하게 분화되고 확장된 것이 이들 감정의 원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좀 더 혼몽하고 몽롱하게 마구 뒤엉킨 채로 존재하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자아의 氣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적 근대의 출현 이후 자아의 氣가 매우 혼몽하고 몽롱한 모습으로 복잡하고 다기하게 분열되고 해체되어 있다는 것은 익히 주지하는 바이다.
喜怒哀樂愛惡欲 중에서도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怒, 哀, 惡라는 이름의 마이너스 氣이다. 怒, 哀, 惡라는 이름의 부정의 氣는 분열되고 해체된 氣, 곧 자본주의적 근대에 이르러 좀 더 불거진 죽음의 氣가 뿌리를 두고 있는 곳이다. 여기서 말하는 분열되고 해체된 氣, 곧 심화되고 확장된 죽음의 氣는 당연히 정신의 플러스보다는 정신의 마이너스에 기여한다. 정신의 마이너스와 함께 하는 氣는 당연히 정신질환과 함께 할 수밖에 없다.
이들 정신질환과 함께 하는 氣가 마음껏 분출되어 있는 공간이 시이다. 시 창작이 정신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기본적인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5. 맺음말-정신의 영역과 시의 영역은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적 근대의 삶이 분출하는 氣(감정)에도 통합의 氣, 생명의 氣, 플러스의 氣가 있고, 분리의 氣, 죽음의 氣, 마이너스의 氣가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근대를 풍미하고 있는 氣는 통합의 氣, 생명의 氣, 플러스의 氣보다는 분리의 氣, 죽음의 氣, 마이너스의 氣라고 해야 옳다. 오늘의 삶과 좀 더 함께 하고 있는 氣는 기본적으로 긍정의 氣가 아니라 부정의 氣라는 것이다.
정신의 플러스에 기여한다는 것은 상승하는 생명의식에 기여한다는 것이고, 정신의 마이너스에 기여한다는 것은 하강하는 죽음의식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자본주의 현실에서 주조를 이루고 있는 氣는 대부분 분리의 氣, 죽음의 氣, 마이너스의 氣로, 하강하는 죽음의식에 기여하고 있다고 해야 마땅하다. 물론 인간의 氣가 하강하는 죽음의식에 기여하는 까닭은 그것이 본래 생명의 氣가 아니라 죽음의 氣이기 때문이다.
怒, 哀, 惡의 氣를 연원으로 두고 있는 죽음의 氣, 자본주의적 근대에 들어 심화되고 확장된 마아너스 氣를 정리해 말하면 고독, 소외, 상실, 환멸, 염증, 피곤, 절망, 불안, 초조, 공포, 설움, 우울, 침통, 싫증, 짜증, 권태, 나태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이들 氣는 비정상적인 氣, 곧 정신질환과 함께 하는 氣이다. 나날의 삶이 이들 氣와 함께 할 때 온전하고 무구하고 순수한 삶을 살아가기는 어렵다.
하지만 일상에서 마주하는 현대시의 주조를 이루는 氣는 대부분 이들 죽음의 氣, 즉 고독, 소외, 상실, 환멸, 염증, 피곤, 절망, 불안, 초조, 공포, 설움, 우울, 침통, 싫증, 짜증, 권태, 나태 등이다. 시에 이들 氣가 깊이 감염되어 있고 침투되어 있다는 것은 시인의 정신영역의 실제가 그렇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인이 자신과 다른 화자, 곧 탈을 쓴 화자를 내세운다고 하더라도 화자의 심리에는 시인의 자아가 반영되기 마련인 만큼 화자의 氣와 시인의 氣가 항상 뒤얽힐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인은 본래 창작의 과정에 저 자신의 복합심리를 뒤섞어 토로하기 마련이다. 저 자신의 복합심리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적 근대에 들어 보편화된 고독, 소외, 상실, 환멸, 염증, 피곤, 절망, 불안, 초조, 공포, 설움, 우울, 침통, 싫증, 짜증, 권태, 나태 등으로 구체화되는 죽음의 氣를 가리킨다. 이들 죽음의 氣를 토로하는 과정은 이들 죽음의 氣를 객관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물론 이들 죽음의 氣는 시인 자신의 일부라고 해도 좋다. 그러한 점에서 이들 죽음의 氣를 객관화하는 과정은 시인이 저 자신의 일부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들 죽음의 氣를 토로하는 과정은 이들 죽음의 氣를 씻어내는 과정이 된다. 물론 이들 죽음의 氣를 씻어내는 과정은 이들 죽음의 氣에 감염되어 있는 자아를 치유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시 창작 과정이 창작자의 정신질환을 치유하는 과정이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다양한 모습을 갖는 죽음의 氣에 감염되어 있는 자아를 치유하는 것은 독서의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시인이 시에 드러낸 죽음의 氣와 통전의 체험을 하는 과정에 독자가 저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 곧 자기 자신의 오염된 정신영역을 씻어낼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독서의 과정에 인류의 전 역사에서 오늘의 인간, 자본주의적 근대의 인간이 처해 있는 氣의 현존, 곧 죽음의 氣가 이루고 있는 현존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이해는 논리적인 추이를 통해서보다는 순간적인 깨달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시가 독자에게 주는 정신적인 효과, 곧 심리적인 효과는 문득, 별안간, 갑자기, 퍼뜩 찾아오는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자각인 예가 대부분이다. 이처럼 시는 감각에 기초한 비약, 나아가 본능에 의지한 직관의 방식으로 독자의 병든 氣를 문득, 별안간, 갑자기, 퍼뜩 건강한 氣로 변화시킨다. 실제로는 그것 자체가 이미 병든 氣를 치유하는 고유한 방식이지만 말이다.
-『시로 여는 세상』(2011. 가을)
- http://cafe.daum.net/lebzoa(이은봉- 돌과바람의 詩)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창작체험에서 얻은 생의 통찰* - 김완하 (0) | 2014.02.01 |
|---|---|
| [스크랩] [시인의 시론] 시, 그리고 기타 여러 것들! - 이은봉 시인 (0) | 2014.02.01 |
| [스크랩] <윤종남의 시읽기 104> 양점숙 시인의 “할머니의 가로등” (0) | 2014.02.01 |
| [스크랩] 감자탕 드시면 소주 한 병 공짜란다, 이래도 되나 - 임희구 시집 <소주 한 병이 공짜> (0) | 2014.02.01 |
| [스크랩]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52) 이경임 〈바람 한 줄기〉 (0) | 2014.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