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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송희 시인의 호남의 시와 시인] 윤금초 - 해남 땅끝에서 보내는 `육자배기` 시조

문근영 2014. 1. 29. 17:41

 

 

 

[이송희 시인의 호남의 시와 시인] 해남 땅끝에서 보내는 '육자배기' 시조

[50] 윤금초

 

윤금초(尹今初·1942년생) 시인은 '금초'라는 필명을 쓰게 된 계기를 들려주며 말문을 열었다.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 출석을 부를 때 '호'자를 갈겨 써놓은 것을 '초'로 잘못 읽어 '금초'라고 부른 것이 계기가 됐다. 그 이후 '금초'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불리게 되었고, 필명으로까지 사용하게 된 것이다. 처음 한자 표기는 '尹今艸'였는데, 김상옥 시인이 "이름의 이미지가 너무 여리여리해 보이고 섬약해 보이니 옆구리에 칼을 하나 차라"고 하며 '初'로 고쳐 준 것이다.

과연 이름 때문일까? 시인은 올해로 44년째 우리 고유의 문학 장르인 시조문학을 건강하게 지켜왔다. 선대에서 물려받은 시조의 정신을 현대적 감각으로 변용하면서 늘 변화를 꾀했던 그의 창작 열정은 자신이 운영하는 시조 창작 교육기관 《민족시사관학교》 수강생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는 시조가 '몸 낮출수록 우람하게 다가서는 저 산빛'('중원, 시간여행')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시조의 자수를 따지기보다는 그 안에 담는 내용이나 가락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내재율'이라는 작품을 쓰기도 했다. 그는 시조문학이 외형에 제약을 받는 닫힌 문학이 아닌 열린 문학이기를 바란다.

사실 그는 처음엔 소설을 썼다. 고등학교 때 전국고교생 문예콩쿠르에서 단편소설로 가작을 한 계기로 대학에서도 계속 소설을 썼다. 그런데 하루는 박목월 선생께서 자신의 시 습작 원고를 보면서 "자네는 시조 쪽에 호흡이 가까우니 시조를 한 번 써보게"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고산 윤선도 후예라는 각성과 함께 그에 대한 동경 혹은 일종의 의무감에 시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윤 시인이 자란 해남 화산면 갑길리에는 가끔 사색을 하던 언덕바지, 동백나무에 올라가 동백 꿀을 온종일 빨아먹고, 서리도 하던 풍경이 그대로 남아 있다. 고향은 시인을 문학의 길로 인도해준 자양분이다.

실로, 그는 해남과 주변 이미지를 많이 그려왔다. 위의 시 '해남 나들이' 역시 '그 옛날 유형의 땅 남도 끄트머리'인 해남에 생명의 기운이 번지는 봄 풍경을 노래하고 있다. 한때 '겨우내 움츠린 목숨', '풀꽃 같은 백성들'이 살아 온 외진 골짝에도 봄 기별은 오고, 비릿한 해조음과 산동백의 향기가 시인을 반긴다. 적막이 감돌던 땅끝에 육자배기 신명나는 봄의 가락이 진동하는 것이다.

또한 해남 우항리의 공룡 발자국 화석을 소재로 한 '백악기 기행', 어렸을 때 배고픈 기억을 떠올리며 쓴 '아직은 보리누름 아니 오고', 한여름 밤 대흥사 피안교 밑 개울가로 놀러 나온 아낙들이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멱을 감는 모습을 곁눈질하던 느티나무가 벌거숭이 여인네들 속살 보기가 송구하여 가슴을 천년토록 쓸어내리다 저렇게 텅 빈 나무가 되었다는 상상을 하며 쓴 '대흥사 속 빈 느티나무' 등 숱하게 많다.

그는 바닥에 엎드려서 두 팔로 상체를 지탱하며 글을 쓰는 습관이 있다. 이런 습관 때문에 양쪽 팔꿈치에 옹이가 박히고, 글 쓸 때 입는 셔츠 양쪽 팔꿈치는 다 해졌다고 한다. 컴퓨터가 보편화되었지만, 그래도 그는 엎드려서 백지 위에 초안을 쓴 다음 컴퓨터에 옮기고 몇 차례나 퇴고한다.

글감이 바닥이 나면 소재 발굴을 위해 책을 읽으면서 이른바 '우물 파기 작업'을 한다. 시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금광(金鑛)을 찾아 시추 작업에 나서는 것이다. 오늘도 땅끝 같은 방바닥에 엎드려 깊은 시심에 빠져 있을 그를 떠올려 본다.

- [조선일보]  2011.02.06 22:20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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