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하, 「세상의 모든 비밀」평설 / 조강석
세상의 모든 비밀
이민하
나는 옆집 아이의 태생의 비밀을 알고 있다
그애 아빠의 정치적인 비밀을 알고 있다
왜 그들은 내게 입막음을 안 하나
하루아침에 미용실 여자가 미인이 된 까닭을,
편의점 남자가 시인이 된 까닭을, 그들이 손잡고 구청에 간 까닭을,
석 달 후 남자 혼자 구청에 간 까닭을 나는 알고 있는데
여자의 머리색이 남자의 정치색과 어울려
신발 속에 감춰진 짝짝이 양말처럼 아무도 모르게
호들갑을 피우는 오후
선박처럼 무거운 귀를 잠시 멈추고 잠이 오는 의자에 앉아
문맹인 나는 머리색을 바꾸고
색맹인 애인은 이별의 편지를 바꾸고
내 귀를 타고 밀입국한 사람들은
어떻게 빠져나온 것일까 반대편 귀를 향하여
얼굴을 뒤집고
지하철 남자의 의족이 지상의 물결 위로 떠오를 때
인어공주가 되는 이야기
아름다운 두 다리의 침묵에 대하여
진위 논란으로 시끄러운 세상에 대하여
칼의 입맞춤 대신 물거품이 되어 바다에 녹아 버린
성전환자의 슬픈 동화 속에서
목소리를 가로챈 마녀의 기술처럼
목사의 안수기도에 섞이는 어떤 성분들
이를테면, 앞 못 보는 어둠의 눈을 번쩍 후려치는
어떤 선언들
늙은 소녀들은 아직 사랑이 넘치고
구걸하는 남자들은 눈물이 넘쳐서
기울지도 침몰하지도 않는
어떤 세계에서
흩어진 나의 비밀들은 어느 귀를 타고 흘러가는가
내가 같은 남자와 백 번째 헤어진 날에 대해
당신은 지금 내 비밀 하나를 보관 중이다
혀처럼 얇게 저며진 물결 하나가 귓속으로 들어갔다
의도하지 않아도
언젠가 귀를 기울이는 쪽에서
당신도 모르게 식은땀이 흐를 것이다
《세계의 문학》 201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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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운동과 구조
아마도 이민하를 일군의 시인들과 함께 분류하려는 어떤 시도도 성공적이지 못할 것이다. 이민하는 유파나 운동보다 가볍고 유행이나 대세보다 무겁다. 그의 시는 쉽게 풀리지 않는 말들보다 천진하고 안일한 진술보다 호기롭다. 이민하의 시를 환상에 묶으려는 시도는 왕왕 그의 시가 가진 즉물적 직핍성에 의해 좌절되고 구태여 알레고리 쪽으로 구인하려는 시도는 집합적으로 계통화되지 않는 이미지들에 의해 머쓱해진다. 그러니까, 이민하는 지금까지의 시작을 통해 이미 그 자신이 하나의 이민하로 기억되는 데 성공한 시인이다.
첫 시집 『환상수족』이 기억할 만한 이미지의 환유적 운동을 보여줬다면, 두번째 시집 『음악처럼 스캔들처럼』은 구조와 징후를 보여줬다. 그리고 이렇듯 두 시집에 걸쳐 선보인 운동과 구조의 절합을 통해 우리는 그의 시어가 단순히 표상들의 유희에 그치는 개인 방언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 시집을 함께 읽음으로써 우리는 시와 대중 사이의 소통이나 이미지와 세계의 지시 관계의 문제와는 전연 다른 각도에서 당대의 시에 새로운 기운이 생겨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와 대중, 이미지와 세계 사이의 소통과 지시에 대한 강박이 아니라 자신이 발표한 두 시집 간의 고집스러운 내접을 통해 그는 한사코 지시 대상을 확정하려는 수사 의지들을 가볍게 제치면서 스스로의 운동과 구조가 길항할 때 시의 내적 실재라는 대륙이 생성될 수 있고 또 그것은 충분히 탐사할 만한 가치를 지닌 것임을 실연해 보였다.
지금 일군의 좋은 시들은 지시 대상으로서의 세계를 일방적으로 상정하는 대신 자신 안의 운동과 구조의 길항을 통해 저마다 고유한 내적 실재를 생성시킨다. 이민하는 운동을 통해, 시의 내부에서 솟는 내적 실재라는 대륙이 얼마나 활달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징후와 구조를 통해 그것이 단순한 이미지의 별천지가 아니라 한 시대의 심리적 사실관계를 드러내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이후 그의 모색이 궁금해지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어떤 시인들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렇게 표지가 되기 때문이다.
인용된 시는 이민하의 최상의 시는 아닐 것이나 그의 시가 운동과 구조를 동시에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 시는 말들의 운동과 흐름을 다루고 있다. 세상의 말들이 운동하듯 이 시의 이미지 역시 운동한다. 말들이 개개인의 소소한 사정을 비밀과 음모로 재생산하고 유통하는 구조를 지니듯, 이 시 역시 부속 이미지들을 파생시키는, 흐름과 정박의 기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시를 보자.
세상엔 얼마나 많은 말들이 있는가? 요즘처럼 유통이 용이한 시대에 말들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면목도 체면도 없이 흘러 다니는가? 자신이 만든 유머가 자신의 귀에 들어오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을 실감해본 이들은 안다, 말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치는지.’ 그래도 유머라면 웃어넘기면 그만이지만, 선의와 악의의 구분도 없이 한 귀로 들어와 한 귀로 흘러 나가는 말들 중 많은 것들은 얼마나 자주 흐름 위에서 가시들을 자가 생산하는지. 이 시는 바로 그런 말들에 대한 것이다. 시를 잘 읽어보면 그 중심에 말의 흐름과 흐름 위를 넘나드는 선박의 이미지가 있음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말들은 흐른다. 말들은 한쪽 귀로 밀려와서 다른 쪽 귀로 빠져나간다. 우리는 말들이 밀려와 뱃전을 때리고 다시 멀어지는 사이에서 때론 미동을, 때론 격동을 느끼며 중심잡이를 한다. 옆집 아이의 태생의 비밀, 미용실 여자와 편의점 남자의 사연 등 수많은 말들이 의도와 상관없이 수시로 귀를 넘나든다. 눈은 닫으면 그만이지만 귀는 그처럼 단호하게 닫을 수 없다. 그러니, 말에 실려오는 사람들은 허락없이 승선을 감행하는 이들과 같다.
“내 귀를 타고 밀입국한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얼마나 직핍한가. 허가 없이, 때도 장소도 모르고 제멋대로 찾아오는 말들의 주인공들, 그야말로 귀를 타고 밀입국한 사람들의 사정이 때론 종교적으로, 때론 정치적으로 그리고 더러는 미학적으로 윤색된다. “지하철 남자의 의족”은 물결 위로 떠올라 “인어공주”의 “아름다운 두 다리”로 윤색되고 “성전환자”의 사연은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가로챈 이들의 연출대로 각색된다. 그리고 이런 소문들은 단어에 주술을 불어넣는 안수기도 목사의 일갈처럼 때로 정신을 퍼뜩 들게 하며 달팽이관에 도달한다.
이처럼 말들은 세계에 차고 넘치지만 말들로 말들을 보충하는 세계는 “기울지도 침몰하지도 않는”다. 한 개인의 심리에 대해 말들이 만드는 정서적 음영은 개별적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흐름은 자신의 작용과 효과를 성찰하지 않는다. 질량보존의 법칙이나 엔트로피의 법칙에서와 같이 말은 형태를 달리하고 흐를 뿐 총량에 있어 기울지 않는다. 세계는 개체라는 선박을 경유하는 말들로 인해 기울거나 침몰하지 않는다.
“의도하지 않아도” 내 귀에 밀려왔다 음영을 만들고 밀려가는 말들처럼 나의 사정은 ‘같은 남자와 백 번이나 헤어지는 이’의 이야기로, 때론 비밀이나 음모처럼 윤색되어 또 다른 귓속으로 흘러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이 흐름을 멈추려 하지 않고 멈출 수 없다는 점에서 어쩌면 사정은 공평한지 모른다. 내 사정이 비밀이 되어 돌고 돌아 다시 내 귓전을 때리는 날 흐르는 식은땀을 감수할 수만 있다면 아무런 불평 없이 우리는 “세상의 모든 비밀”들과 더불어 살 수 있다.
————
조강석 / 문학평론가. 200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저서로 『아포리아의 별자리들』 『경험주의자의 시계』 『비화해적 가상의 두 양태』 등이 있음. 계간 『문예중앙』 편집위원. 현재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HK교수로 재직 중.
—《웹진문지》2011.11.22 주간문학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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