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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육체가 빠져나간 집 - 최을원 시인의 근작을 읽다 / 김효선

문근영 2014. 1. 28. 11:47

 

 

육체가 빠져나간 집

- 최을원 시인의 근작을 읽다

 

 

김효선

 

 

1. 시인, 생의 사막을 건너다

 

방바닥이며 마루며, 국적 없이 날아 온 모래들을 하염없이 쓸어내고 닦아낸다. 이번 장마는 비대신 모래바람을 쉴 새 없이 퍼붓고 있다. 마치 장대비 쏟아지는 것처럼 그렇게 마른바람이 쏟아지고 있다. 이것들은 필시 중국에서 날아온 것들일 것이다. 중국의 4대 황사발생지역인 간쑤성, 모래 폭풍으로 유명한 중국 서부 간쑤성 일대에서 불어온 모래바람이 분명할 것이다. 집 밖을 나서면 모래와 바람뿐인 곳, 그래서 간쑤성 사람들에게 모래바람은 생활의 일부라고 한다.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다. 이들에게 모래바람, 사막은 곧 생활과도 연결된다. 살던 터를 떠나야 한다는 얘기다.

 

유물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황사라 불리는 모래바람은 분명 재앙의 씨앗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들의 세계에서 사막은 심오하고 철학적이다. 삶의 일부를, 혹은 전부를 거는 도박과 같다고나 할까.

최을원 시인의 시를 읽는 동안 그렇게 육체는 빠져나가고 모래바람만 황량하게 불어대는 사막을 걷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게도 인간이 만들어놓은 덫을 빠져나가는 일, 육체가 빠져나간 집은 폐허다. 그렇게 최을원 시인의 시에서 나는 아름다운 폐허를 읽는다.

 

그 어디에도 ‘사막’이란 단어는 찾아볼 수 없지만, 최을원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나는 잠시 사막에 다녀온 듯 했다. ‘누군가는 떠나고/누군가는 남아/오래 기억하고 싶은 저 맑은 햇살’(「고사목」), ‘화려할수록 어둠 속에 더 깊이 숨어, 번득이는 눈빛, /짐승처럼 은밀히 숨 고르는 소리들’(「계단은 잠들지 않는다」), ‘가장 높은 곳에 가장 빛나는 식육/공공연한 불문율, 의문은 죄악이다’//고개를 들면, 숨통에 박히는 크고 날카로운 발톱(「카니발」), ‘아무 것도 없는 데 전부 다 갇힌다는 거’(「태양의 서커스」), ‘세상 곳곳에서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텅텅 들려오고/ 깊은 山門마다 벼랑은 점점 높아만 가는데/안에서도 밖에서도 결코 열리지 않는 문’(「문(門)」)이야말로 사막에서 살고 있는,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우리네 삶은 아닐까. 최 시인에게 있어서 사막은 어떤 존재일까. 굳이 타클라마칸의 모래바람을 걸어보지 않더라도 네이멍구의 사하라사막을 횡단하지 않더라도 최 시인의 시를 읽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만 같다.

 

 

2. 문득 돌아보니 불혹(不惑)

 

한 세상 온전하게 길을, 어깨를, 뿌리까지 내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닐까. 누가 머물다 가든 상처를 내고 간다고 해도 그것은 ‘천개의 태양이 지나간 길들’ 일 뿐. 인간이 무한한 욕망을 추구하는 반면 한그루 나무는 욕망보다는 베풂 혹은 무소유적인 정신을 가졌다. 어쩌면 이것도 인간이 바라보는 관점일 뿐일지도 모른다. 나무는 그냥 거기 서 있을 뿐인데. ‘보는 것과’와 ‘보이는 것’의 차이쯤이라고 해 둘까?

 

더 이상 오를 곳은 없다/푸른 살들은 남김없이 제단에 바쳐졌다/내게 깃들던 것들은/모두 허공 속에 둥지를 틀었다/그리움마저 단단하다/그러나 나는 유년처럼 설렌다/천 개의 태양이 지나간 길들을 되짚어/나는 내 속을 돌고 있다/머릿속까지 타들어 가던 그 작열의 정점에서/불러다오, 푸르러서 서럽던 것들아/찬란하던 새벽의 불면들아//유예의 시간은 길었다/나를 지나가던 벌레 한 마리/그 작은 생의 떨림 하나까지 기록한 책장을/겨울 새떼들이 끝에서/끝으로 천천히 넘기고 있다/또 다른 길들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그래도 나는, 雪花 몇 송이로/상형문자 몇 자로/지금 버티는 중이다/누군가는 떠나고/누군가는 남아/오래 기억하고 싶은 저 맑은 햇살을/다시 찬찬히 들여다 볼 때까지, /자벌레 한 마리/신의 손등 위에, 혹은 푸른 잎사귀 위에/슬며시 놓일 때까지

 

- 「고사목」 전문

 

화자는 ‘푸르러서 서럽던 것들’에게 안녕을 고하고 있지만 실은 ‘작은 생의 떨림 하나까지 기록한 책장을’ 이제사 펼쳐보는 것이다. 하여 그 고요함은 죄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온 길을 되짚어 보는 회한의 역사다. 이 시대의 불혹(不惑)의 역사가 그러하지 않을까. 시인은 한 그루의 고사목에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본다. ‘새벽의 불면-유예의 시간-나를 지나가던 벌레 한 마리-또 다른 길들이 오는 소리-기억하고 싶은 저 맑은 햇살’ 고사목이 걸어온 길이 곧 시인이 걸어온 길이기도 할 것이다. 흔히 나무의 삶을 인간의 삶과 비유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 나무의 성장과정이나 꽃을 피우는 과정이 인간의 숙명적이고도 고통스런 삶과 닮아있기 때문이리라. 그럴 것이라는 ‘가정’ 하에 인간과 가장 가까운 이는 나무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여러 단계의 성장과정을 거치는 것처럼 나무 또한 꽃을 피우기까지 수많은 인내와 고통을 감수해 낸다. 그러기에 제물로 바쳐진 채 까맣게 타버린 순간에도 ‘유년처럼 설렌다’는 불교의 윤회설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리라. 그러기에 고사목은 죽어서도 슬프지 않다. 그렇게 生은 부지불식간에 날아드는 비보(悲報)를 읽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여 시인은 오늘도 ‘돌아보면 곤한 잠들 한마디씩 건네’는 ‘중년의 들판을 달린다’

 

 

떠나간 것들을 하나씩 세워 놓으며/밤기차는 중년의 들판을 달린다/밀려날 때마다 더 빨리 멀어지던 것들/여자의 사랑도 그렇게 멀어지는 중일까/돌아보면 곤한 잠들 한 마디씩 건네고 있는데/하모니카를 불고 간 맹인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깜박 깜박, 먼 곳의 집 한 채 이제는 잠들었을까/눈이 와요, 소설 속 목소리에 내다본 창 밖/맨발의 여자가 밤길을 간다/저 희고 시린 발처럼 밤기차는/또 어딘가에 가 닿을 것이다

 

- 「부석사」 부분

 

 

신경숙의 소설 「부석사」를 모티프로 한 듯싶은 이 시는 중년의 한 여자가, 어쩌면 사랑을 잃어버린 한 여자가, 밤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고 있는 장면에서 시상(詩想)을 떠올린 것이 아닐까. 그러기에 이 시는 소설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밤기차를 타고 떠나가는 여자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그려진다. 불혹(不惑)의 빛깔이 이런 느낌일까. ‘하모니카를 불고 간 맹인’처럼 쓸쓸하다 못해 ‘또 어딘가에 가 닿을 것’이라는 황량하고 푸석한 모래 바람을 날리고 있는.

 

이러고 보니, 「고사목」과 「부석사」는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중년이 돼 버린 한 남자의 혹은 한 여자의 모습이 중첩돼 있다. 그렇다고 중년의 쓸쓸함만을, 벼랑 끝으로 몰린 삶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수많은 아픔을 통과하고 난 뒤에 오는 해탈과 통찰로 인해 또 다른 삶, 혹은 ‘또 다른 길들이 오는 소리’를 듣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 시대는 가진 것이 없는 자들에게는 가혹한 형벌인 동시에 너무 많은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3. 계단, 잠들지 않는 복선

 

깊은 새벽 누군가 또각또각 계단을 밟고 오르는 소리는 섬뜩하다. 조명등이 꺼져버린 칠흑 같은 계단이라면, 그것도 깊은 밤 시간 오가는 이 없는 텅 빈 계단의 공명(共鳴)으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뒤를 따른다면 우리는 더 이상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에 자유로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늘 계단을 밟고 오르는 행위를 통해 시인은 씁쓸한 우리시대의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사회면마다 계단이 물어뜯은 흔적들, 고시원의/계단엔 주인 잃은 신발들이 지천이다’처럼 양행걸침으로 표현된 이 시행은 ‘사회면마다 계단이 물어뜯은 고시원’으로 읽혀, 계단은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다.

 

계단은 늘 허기진다 겹겹이 접었던 각진 살의를 반쯤 펼친 채/누군가의 발목을 노리는 저 많은 이빨들/오르가즘을 달려 오르는 가속의 덩어리, 옥상을 지나/난간을 넘어 허공에 던져버리는 거, 던져지는 거/누군가는 순식간에 발목이 잘렸다/언젠가는 한 가족이 몽땅 실려 갔다/사회면마다 계단이 물어뜯은 흔적들, 고시원의/계단엔 주인 잃은 신발들이 지천이다/계단은 어느 곳에도 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깊은 山門에도, 웅장한 교회당에도 계단은 자란다 룸살롱/여자의 젖가슴 사이를 지나간다 하여/계단은 아름답다 경건하다 계단을 잃어버린 자들이/복권 판매소 앞이나 경마장 같은 광장 주변을 서성일 때/보험사들의 빌딩은 나날이 키를 키운다/절대의 성실함으로, 무자비한 집요함으로/추락의 마지막 순간까지를 사정의 쾌감으로 바꿔 버리는/그것, 폭식의 밤은 깊다/먹잇감들은 바쁘게 몰려들고, 지친 사람들이/자신의 해골을 들고 아득한 계단을 오르는 취몽에 들 때도/도시의 곳곳/화려할수록 어둠 속에 더 깊이 숨어, 번득이는 눈빛,/짐승처럼 은밀히 숨 고르는 소리들

 

- 「계단은 잠들지 않는다」 전문

 

그러기에 이 시에서는 ‘계단’으로 은유되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시에서 계단은 하나의 범죄도구가 된다. 수많은 사건․사고가 계단을 타고 이어진다. 그렇게 계단은 상승과 하강의 통로가 되지만, 이 시에서는 소통의 통로가 아닌 사회의 음침한 뒷골목일 뿐이다. 또한 현대사회에서 범죄 도구는 진화를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이 얼마나 조용하고 ‘화려할수록 어둠 속에 더 깊이 숨어, 번득이는 눈빛’인가. 마치 복선을 깔아놓은 것처럼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계단의 또 다른 모습. 허기진 계단이 오늘도 ‘짐승처럼 은밀히 숨고르’며 당신의 발목을 노리는 행위를 통해 긴장감은 더욱 고조된다. 계단을 통해 범죄의 사슬을 풀어내는 시인의 통찰력을 읽으며, 사물이 지닌 또 다른 면을 발견해 내는 문학의 기능을 다시 새겨본다.

그러나 계단의 의미 진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남루한 외투의 남녀가 오르는 살얼음 깔린 돌계단/몇 겁의 인연들 폐지처럼 밟히고/한 계단 오를 때마다 한 계단씩 지워진다/빚 문서처럼 쫓아온 어린 길들이 연신 발목에 감기자/한 사람 뒤돌아서서 펴 보이는 손바닥엔/벌겋게 녹슨 대못이 박혀있다 부디,/용서하지 말아라, 마침표 하나 그 위에 떨어진다/이곳까지 오기 위해 밤은 그리 깊었고/가난한 인연은 수시로 가출했었던가//(중략) 중년의 언덕에 놓인 그 계단은/낮고도 가파른데/손 잡아줄 것 하나 없는 인연의 허공/떨어지다 잠시 스친 낙엽들/흔들리고, 흔들리면서, 공중의 길 가고 있다

 

- 「계단 위의 사람들」 부분

 

계단은 또 다시 위태롭다. ‘살얼음 깔린 돌계단’을 통해 남녀의 삶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그로 인해 헤어질 수밖에 없는 매개체로 작용하고 있다. 가파르고 굴곡진 중년의 언덕, 가난은 이제 가족해체를 낳고 있다.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가족해체는 ‘마침표 하나 그 위로 떨어’지는 삶으로 마감되기도 한다. 이제 계단은 부를 상징하기에는 낡은 사물이다. 초고층 빌딩을 순식간에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가 자리 잡고 있는 세상이다. 아마 시인은 종일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집으로, 직장에서 수없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중년의 무게를 실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계단은 현대사회에 또 다른 병폐로 비유되고 있다.

 

 

4. 문명, 그 거대한 발톱

 

문명은 이미 이기적인 구조로 흐른 지 오래됐다. 그러기에 이기적인 사람들이 사는 세상엔 빈틈이 없다. 거대 조직에 의해 ‘세탁소 열쇠가게 지물포 분식집 치킨집 문방구’는 하룻저녁의 식사에 불과하다. ‘공공연한 불문율’에 의해 뉴타운 개발이나 용산사태가 벌어지더라고 ‘의문은 죄악이다’ 그렇게 사회적 약자는 ‘숨통에 박히는 크고 날카로운 발톱’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낡은 건물 하나 폭삭 주저앉더니 타워크레인이 섰다/세탁소 열쇠가게 지물포 분식집 치킨집 문방구, 오밀조밀한 것들/몽땅 끌려 올라갔다 달랑달랑 걸려 있다/ 갈고리에 내걸린 붉은 살코기들//(중략) /가장 높은 곳에 가장 빛나는 식욕/공공연한 불문율, 의문은 죄악이다/어느 날 문득 한 평 잠 위에 끈적한 타액이 늘어지고/고개를 들면, 숨통에 박히는 크고 날카로운 발톱/人肉의 카니발/아름다운 식사

 

- 「카니발」 부분

 

카니발은 원래 카톨릭 축제로 사순절이 시작되기 3일 전 고기를 마음껏 즐기며 가장행렬 등 쾌락적인 행사를 펼친 데서 유래됐다. 더 아래로 거슬러 올라가면 원시시대에 전쟁에서 이긴 상대편의 인육을 먹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즉, 이 시는 점점 비대해져가는 사회가 인간을 먹어치우는, 문명의 노예로 늙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이빨 긴 짐승 한 마리 키우게 된 거다/짐승이 짐승을 불러 모자 속에 함께 갇힌 거다/뱀 두 마리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 뜯어 먹는 거/어느 소실점에서의 無化, 이빨만 남아 깨무는 흉내를 내는 거/아무 것도 없는 데 전부 다 갇힌다는 거’「태양의 서커스」도시는 그런 것이다. 또한 ‘아무나 손을 잡으면 피가 묻어’나는 잔인함은 현대인의 자화상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5. 알전구 빛으로 흔들리는 여자라는 이름

 

매 맞는 여성에 대해 우리사회가 입을 연 것은 불과 몇 년이 되지 않았다. 그것들은 어둠 속에 부유하며 떠도는 빗물 같은 것이었고 공공연한 불문율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끝내 ‘돌아서서는 안 되는 길, 허공에서 떨리는 첫걸음’ 을 통해 비극의 결말을 암시하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모텔에서 밤을 보내야 하는 여자. 밤에 내리는 비는 상처투성이인 여자가 흐느껴 울기에, 집을 뛰쳐나오기에 딱 좋은 조건을 가졌다.

 

그녀가 상처 많은 몸의 지퍼를 연다 급히 뛰쳐나오느라고 뒤죽박죽되었다 돌려보낼 것들과 돌려받아야할 것들을 가지런히 챙긴다//간절히 먹고, 사납게 먹던 입들, 걷는 벽, 공중 부양 밥상, 사회면을 대신하던 현관문, 고해성사 끊임없는 화장실의 물방울소리, 너무 큰 손바닥, 온갖 것이 품은 예각들, 벽에서 흘러내리던 것들의 가늘고 긴 무늬의 속도, 빨래집게에 거꾸로 매달린 정오, 딱딱한 식탁보, 下門 속에 취한 멧돼지, 급하게 꺾이는 골목들, 가로등 불빛에 갇혀 파르르 떨던 새벽 2시의 작은 날개들// 보풀거리는 봄 햇살, 벤치 위의 소년과 소녀, 아주 조금씩 다가가던 소년의 엉덩이, 그 접점에서 피어나던 사과나무 무지개, (중략)//모텔 유리창에 도시의 불빛들이, 나뭇잎들이, 빗방울들이 바글거린다 하늘의 끈을 찾아 건너가고 있다 비로소 시작되고 있다 돌아서서는 안 되는 길, 허공에서 떨리는 첫걸음, 피멍든 눈동자가 주루룩 웃는다

 

- 「밤비」 전문

 

이를 테면 사나운 입을 피해 벽으로 몰려다니는 것을 ‘걷는 벽’이라든지 밥상이 날아가는 장면을 ‘공중부양 밥상’이라고 벽에 짓이겨진 채 흘러내린 핏자국을 ‘벽에서 흘러내리던 것들의 가늘고 긴 무늬의 속도’라는 표현을 통해 잔인하고 폭력적인 현장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은 폭력적인 장면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아이러니한 비유적 표현을 쓰고 있다. 장면 하나하나를 섬세한 이미지로 형상화 시킨 것이다. 드러내지 않으면서 드러내기. 시인은 고도의 수법으로 독자들을 시 속으로 끌어들인다. 여자가 집을 나서게 된 것부터 - 집을 나오게 된 배경 - 그리고 집을 나와서 모텔로 가기까지, 하나의 파노라마처럼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과거의 기억 ‘보풀거리는 봄 햇살, 벤치 위의 소년과 소녀, 아주 조금씩 다가가던 소년의 엉덩이, 그 접점에서 피어나던 사과나무 무지개,’를 통해 여자의 과거까지 보여주는 세심함을 엿볼 수 있는 시다.

 

자정의 눈 내리는 육교 위/그녀는 地上의 가장 먼 마을에서 달려온 따뜻한 불빛들이/자신의 다리 밑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저, 흘러가는 것들/캐롤도 흘러가고, 온 몸에 추억처럼 알전구 감은 가로수들도/흘러가고, 술 취한 빌딩들도 흘러가고//...쪽방, 화장대, 한강 유람선, 월미도, 만화가게, 공중 목욕탕...//달력의 붉은 동그라미 속에 웅크린 태아처럼 갇혀 있던 사흘간의 시간들이/하나, 둘 떨어져 내렸다//좁고 가파른 계단은 무너지고 무너졌다/수술대가 뗏목처럼 너울너울 떠가자 둥근 형광등들이 한꺼번에 팍, 터졌다/핑-, 현기증이 난간을 움켜잡았다//도시 전체가 어디론가 바삐 가고 있었다/눈발이 그들의 발자국들을 빠르게 지워 갔다//가야하는데/가야하는데//기억을 빼곡이 채워 가는 눈발 속/육교 하나만 갈 곳 모른 채/그렇게 오랫동안 서 있는 것이었다

 

- 「육교」 전문

 

깊은 밤 눈 내리는 육교 위에 서 있는 여자 또한 얼마나 위태로운가. 그녀의 생활은 이미 ‘쪽방, 화장대, 한강 유람선, 월미도, 만화가게, 공중목욕탕..’ 을 통해 얼마나 누추한 삶인지 드러나 있다. 벗어나고 싶지만 끊임없이 ‘가야하는데’를 외쳐보지만 여자는 자정의 육교처럼 서 있다. 고단한 삶이 반복된다. 무너지고 무너져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을만큼 치명적이다. ‘수술대가 뗏목처럼 너울너울 떠가자 둥근 형광등들이 한꺼번에 팍, 터졌다/핑-, 현기증이 난간을 움켜잡았다’ 희망도 가능성도 1%도 존재하지 않는 삶. 가난의 불행은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아무리 발버둥 쳐 봐도 헤어날 수 없는 여자. 육교 위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여자의 삶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현실이다. 여자는 ‘온 몸에 추억처럼 알전구 감은’ 채 육교 위에서 여전히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6. 폐허, 그 쓸쓸한 부재(不在)

 

늙은 오토바이는 이 시대의 또 다른 폐허다. 더 이상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열리지 않는 문. 낡은 오토바이가 아닌 늙은 오토바이는 젊은 세대와의 소통 부재를 넌지시 던져놓고 있다.

 

오토바이가 대문을 받는다 후진해서 다시 받는다/견고한 철대문은 열리지 않는다/화도 내지 않는다 전신투지로 천천히 받고, 받고,/그럴 뿐이다 그럴수록 집의 어둠은 깊고/대문은 절벽처럼 키를 키운다 저 늙은 오토바이를/누가 저 곳에 세워 놓았나 대문 안에는 아무도 없다/모든 것이 있고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오토바이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관성의 막바지에/대문이 있는 것뿐이라고 믿고 싶은데/아직도 업보가 남은 것일까, 엎어졌는데도/바퀴는 돌아간다 숱한 윤회가 바퀴 위에서 돌아간다/태양이 수미산을 넘어 화엄에 들고 있었다/지친 새들이 삐걱삐걱 산정으로 가고 있었다/그만 놀고 가야지, 하늘어머니의 말씀에/온갖 짐승들 서둘러 집으로 갔는데 오토바이는/여전히 대문 앞에 서있다/세상 곳곳에서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텅텅 들려오고/깊은 山門마다 벼랑은 점점 높아만 가는데/안에서도 밖에서도 결코 열리지 않는 문/오토바이는 저 집의 주인이다, 벌써 몇 번째나 주인이다

 

- 「문(門)」 전문

   

폐허가 된 집의 주인은 오토바이다. 오토바이도 타는 주체에 따라 그 비유가 달라진다. 이 시의 오토바이는 나이가 지긋한 늙은 오토바이다. 밭에 일하러 가거나 혹은 마실 나갈 때 읍내 병원을 다녀오는 교통수단으로 읽힌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모두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오토바이는 이제 애물단지로 전락해 있다. 아무도 들여보내줄 사람이 없는데도 오토바이는 저 혼자 ‘관성의 막바지’ 힘까지 내어 대문 안으로 들어서려 하고 있다. 실로 대문 안으로 들어선다고 해도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다/ 모든 것이 있고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통해 존재의 부재, 소통의 부재를 알린다.

오토바이와 함께 자전거 또한 오래된 不在(부재)를 알린다. 그건 어쩌면 인간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기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버려진 자전거에 나팔꽃이 칭칭 감겨 있었다/자전거의 의지다/그렇게 목 졸리고 싶었던 거다//(중략)누구나 목을 내민 적이 있다 내밀어야 할 때가 있다/그리고 죽는다 한 번 죽은 자들은/누구도 영원을 말하지 않는다/당신도 나도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행단보도 건너편까지가 영원이다// 그 여자를 데려다 주고 고시원으로 돌아가는 길/부축하던 팔에 얹히던 왼쪽 젖가슴의 무게/세상엔 딱 그 정도의 무게로 남는 것이 있다/자전거도 녹슬고 나팔꽃도 말라죽었지만/무게는 남아/오랫동안 남아//자전거가 풀이 될 때까지/풀이 자전거가 될 때까지

 

- 「목을 내민다는 거」 부분

 

  오랫동안 버려진 자전거에 나팔꽃대가 칭칭 올라와 있다. 시인은 그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자전거와 나팔꽃, 여자의 모습은 모두 폐허다. 정지된 화면이다. 시인은 나팔꽃이 자전거를 휘감은 것이 아니라 자전거가 ‘그렇게 목 졸리고 싶었던’ 거라고 쓰고 있다. 목을 조른다는 행위와 목을 내미는 행위에서 어떤 살의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건 어쩌면 ‘부축하던 팔에 얹히던 왼쪽 젖가슴의 무게’ 때문이다. 오랫동안 시인을 지배해오던 그 무게를 이렇게라도 세상에 내려놓고 싶은 것이다. ‘자전거도 녹슬고 나팔꽃도 말라죽’을 만큼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 무게는 남아있다. 오래 전에 죽은 이들까지 무게로 얹혀온다. 중년의 무게는 목을 내밀고 싶을 만큼 절실하다. 그 연한 나팔꽃줄기만 봐도 목을 휘감고 싶을 만큼 외곽으로 밀려난 중년의 삶이 버겁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7. 그곳에 사막이 있다

 

최을원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화자는 대부분 오래된 사물들이다. 고사목과 계단이고 육교며 오토바이며 자전거다. 이쪽과 저쪽, 혹은 길을 건너는 일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시인은 그렇게 힘겹게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이미 소통하기를 포기했다. 낡은 것, 오래된 것, 가난한 것, 그들이 대접받을 수 없는 세상이다. 홀로서기에 타워크레인은 너무 높다. 산 넘어 산 또 산이라면 넘어갈 수 없다.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 그곳이 곧 사막이다.

 

가도 가도 끝없는 모래바람뿐, 소통의 고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 그곳이 곧 우리가 서 있는 도시의 사막이다. 이제 우리는 사막에 길들여지고 사막을 사는 데에 익숙하다. ‘누군가는 떠나고 / 누군가는 남아’ ‘떠나간 것들을 하나씩 세워놓으며’ ‘가장 높은 곳의 가장 빛나는 식욕’으로 ‘세상엔 딱 그 정도의 무게로 남는 것이 있다’

바로 당신, 그리고 나, 그 곳에 살고 있는 저 따뜻한 불빛들이 흘러가는 도시의 그림자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ngelica72&logNo=130093378187 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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