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서리의 시학 | ||
| 홍일표의 좋은 시 찾아 읽기(69) | ||
| 슬픔의 진화 심보선 내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 있다 그것을 나는 어젯밤 깨달았다 내 방에는 조용한 책상이 장기 투숙하고 있다 세계여! 영원한 악천후여! 나에게 벼락같은 모서리를 선사해 다오! 설탕이 없었다면 개미는 좀더 커다란 것으로 진화했겠지 이것이 내가 밤새 고심 끝에 완성한 문장이었다 (그러고는 긴 침묵) 나는 하염없이 뚱뚱해져 간다 모서리를 잃어버린 책상처럼 이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울고 있다! 심지어 그 독하다는 전갈자리 여자조차!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슬픔에 대해 아는 바 없다 공에게 모서리를 선사한들 책상이 될 리 없듯이 그렇다면 이제 인간은 어떤 종류의 가구로 진화할 것인가? 이것이 내가 밤새 고심 끝에 완성한 질문이었다 (그러고는 영원한 침묵) # 관찰자로 바라본 현실과 주체로서 대응하는 현실은 다르다. 생의 참상은 관념이 아니라 실제이다. ‘내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 있다’고 발언하는 화자는 ‘조용한 책상’에서 존재의 실상을 발견한다. 모난 구석 하나 없이 원만하고 둥근, 긴 침묵으로 일관하는 ‘책상’은 다름 아닌 화자의 초상이다. ‘세계’는 ‘영원한 악천후’이지만 ‘나’는 그저 하나의 사물로 죽은 듯 살아 있을 뿐이다. 여기서 화자가 갈구하는 것은 ‘벼락같은 모서리’다. 늪 같은 현실을 치고 나갈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요 현실 초극의 충일한 에너지가 ‘모서리’이지만 현실은 ‘설탕’이라는 생의 미끼로 화자를 모서리 없는 둥근 책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개미’에게 필요한 것은 눈앞의 한 줌 설탕이 아니라 ‘진화’에 대한 의지이다. 그러나 눈앞의 세계는 그걸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기존의 질서와 체계에 복속하는 것만이 가장 원만한 삶의 방식이라고 가르칠 뿐이다. 고민하고 번뇌하면서 ‘모서리’를 꿈꾸지만 화자는 ‘하염없이 뚱뚱해져’ 가고, 세계는 여전히 악천후의 풍경이다. 곳곳에서 사람들은 울고 고통스러워하고 갈등하면서 오욕칠정의 아수라 속에서 허우적이며 하루하루의 삶을 연명하는 것이다. ‘조용한 책상’은 ‘개미’로, 다시 물렁물렁한 ‘공’으로 변형되고, ‘공’에게 모서리를 붙인들 ‘책상’이 될 리 없다는 비극적 인식은 ‘인간은 어떤 종류의 가구로 진화할 것인가?’라는 마지막 질문으로 이어진다. 절망과 비애의 정서가 휩싸고 도는 순간이다. 그리고 긴 침묵이다. 그러나 이 침묵은 우주의 자궁이며 무한한 에너지의 원천이다. 무한으로 확장되는 드넓은 상상의 지평이다. 이 시를 닫힌 구조가 아니라 열린 구조의 시로 파악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침묵은 폭발 직전의 고요의 순간이며 생의 변혁을 가져오는 가장 강력하고 조용한 우주의 숨결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메모 :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문명의 구원을 향한 생태적 사유 - 박선우 시집 『홍도는 리얼리스트인가, 로맨티스트인가』/ 이성혁 문학평론가 (0) | 2014.01.29 |
|---|---|
| [스크랩] 이 아침의 시 / 임윤식 - 담쟁이덩굴 (0) | 2014.01.29 |
| [스크랩] [이송희 시인의 호남의 시와 시인] 오세영 시인- 사랑은 상처 깊숙한 곳에서 성숙한다 (0) | 2014.01.29 |
| [스크랩] 육체가 빠져나간 집 - 최을원 시인의 근작을 읽다 / 김효선 (0) | 2014.01.28 |
| [스크랩] 재미있는 시평 - 다이나믹 싸인 / 권혜창 - 신광철 (0) | 2014.01.2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