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재미있는 시평 - 다이나믹 싸인 / 권혜창 - 신광철

문근영 2014. 1. 28. 11:44

<재미있는 시평>

 

 

 

신광철

 

다이나믹 싸인  

 

                                                            

권혜창

 

지진이 났을 때 마른 깃털을 생각하고

탱크가 전진할 때 새끼토끼를 생각하고

고목이 쓰러질 때 민들레 씨앗을 생각하고

 

꽃 안에서 얼음을 꺼내고

나비 날개에서 폭풍을 꺼내고

창살 속에서 감옥을 꺼내고

 

나는 즐거이 생의 잣나무를 켜리

틈새마다 꼼꼼히 역청을 발라

한 척의 든든한 방주를 지으리

 

낱말의 암수를 쌍쌍이 모셔와 살게 하리

알 속에서 부리 노란 새가 콕콕, 세상을 노크할 때

지켜보던 어미 새도 콕콕, 알을 깨뜨리는 줄탁동시

 

말言의 새끼들이 태어나

고물고물, 방주에서 세상으로 건너가게 하리

점점 세게, 점점 여리게...... 

 

 

—《시세계》2010년 가을호

 

 

 

선명하게 아픈 그러나 눈이 맑은 온기를 가진 시인

 

 

사람은 육체에 갇혀있습니다. 캄캄한 육체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문이 하나 있습니다. 눈입니다. 눈은 육체를 벗어나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하나뿐인 창입니다. 눈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눈물샘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창가에 눈물이 마련되어 있음은 세상은 슬픔과 아픔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지요. 신은 사람을 이 세상에 내려 보내면서 위로의 선물로 눈물을 주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요. 눈물은 신의 선물이었습니다. 스스로 위로하고 살라는 것이었지요. 그만큼 삶은 벅차고 고된 행로였습니다.

눈물 없는 인생이 잘 산 삶이라는 공식은 여기에서 무너집니다. 눈물은 예정되어있고 눈물을 경험하고 눈물의 깊이를 이해하는 것이 삶의 중요한 부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잘 산다는 말에서‘잘’은 어처구니없는 말입니다. 어처구니없다에서 어처구니는 맞불려 돌아가는 맷돌 중에서 윗맷돌의 손잡이를 말합니다. 어처구니가 없으면 맷돌을 돌릴 수 없으니 맷돌 돌리는 일을 못하는 것이지요. 사실 저도 그렇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것이‘잘’인지를 모르거든요. 그러니 잘이라는 말은 언어의 난맥상을 부채질 하는 말이지요. 정의되지 않은 말을 들여 인생길을 더욱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 종소리가 울리는 시간에도 목을 매는 사람이 있고, 노승의 독경이 산하를 덮는 시간에도 눈에 덮인 소나무 가지가 우직소리를 내며 꺾어지고 있습니다.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무기를 만들고, 승리의 순간에 나뒹구는 패자의 상처가 있습니다. 권혜창 시인의 시에서는 이런 극단의 세상을 아우르는 따뜻함이 보입니다. 먼저 시인의 발언을 들어보겠습니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느꼈던 단상이랍니다.

 

내 손이 닿을 수 없던 풍경을 생각했다. 파리 시내에서도 아름다운 공원을 걷기도 하고 카페에서 차도 마셨지만, 다만 그랬을 따름이었다. 꽃 한 송이 만지지 않았고, 바람 한 줄기 만져지지 않았다. 나와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 '나란히' 흘러가고 있음을 느꼈을 뿐이다.

 

권혜창 시인의 시세계를 이해하는데 단서가 됩니다.‘병행’이라는 말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다름의 병행, 너와 나의 독립적인 병행입니다. 세상은 독립과 관계망의 이중성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면에 기가 막히게 눈이 밝은 분이 권혜창 시인입니다. 왜 권혜창 시인은 이 시의 제목을 다이나믹 싸인이라고 했을까. 다이나믹 싸인이 우리말로 번역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닌데 굳이‘다이나믹 싸인(Dynamic signature)’이라며 영문까지 함께 적어놓았습니다.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지요. 무식이 용감하잖아요. 제가 그랬습니다. 다이나믹 사인은 다이나믹 시그니춰Dynamic signature에서 빌려온 단어였습니다. 다이나믹 시그니춰란 음악에서 사용하는 강약기호더군요. 우리말로 굳이 바꾸면 셈여림표입니다. 다이나믹Dynamics라는 말에는 소리의 강·약과 셈·여림과 대·소 등의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이나믹 사인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 해보지요. 그래야만 시를 이해하는데 한 걸음 접근하잖아요. forte는 밝게, piano는 어둡게, 따라서 crescendo는 어두운 음색에서 점점 밝게 연주하고, diminuendo는 밝은 음색에서 점점 어둡게 연주하라는 뜻입니다. crescendo는 점점 세게 또는 크게, decrescendo는 점점 여리게, 또는 작게입니다. 지휘자가 이러한 표시를 연주자에게 지시하는 것을 다이나믹 사인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결국 음량의 크기와 음색을 연주가에게 지휘자가 지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정도 이해되셨으리라 싶습니다.

 

지진이 났을 때 마른 깃털을 생각하고

탱크가 전진할 때 새끼토끼를 생각하고

고목이 쓰러질 때 민들레 씨앗을 생각하고

 

권혜창 시인의 시는 거대함에서 작은 생명을, 강함 속에서 약함을 바라보는 시각에 천부적입니다. 생의 전반을 품어 안으려는 따뜻함의 발로이기도 합니다. 바다를 건너는 나비가 있습니다. 걷기연습을 하며 인생을 건너는 아이가 있습니다. 거대한 힘에 적응해가는 순하고 여린 존재의 의미에 대해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음이 문득 기적이란 생각을 합니다. 살아있음, 생명을 내 인생에 들이고 산다는 일은 분명 경이로운 일이거든요. 반면 65억이라는 이 지상에 생존한 사람 중에 한 명이라는 존재의 허망. 나비 한 마리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바닷물이 출렁거리지 않고, 일어서기를 연습하는 아이가 한 번 더 넘어졌다고 아이의 인생에 달라질 것 없습니다. 그러나 힘은 약자를 배려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오늘 길을 가면서 길에 떨어진 휴지를 주어 내가 살아있는 자리를 깨끗하게 했다고 지구의 자전속도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살아있음이 누군가에게 힘이 된다면 나는 살아있을 가치가 있습니다. 꽃 한 송이 피어 이 세상을 향기로 채울 수는 없지만 꽃이 핀 자리만큼 아름다워지고 향기는 퍼져갑니다. 세상을 사는 이유가 나 한 사람의 살아있음으로 그만큼 아름다워지는 것이 진정 중요한 게지요. 살아있음은 살아있는 존재와의 관계에 의해서 인정받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반대 입장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성이란 말이 있잖아요. 상대성에서는 존중과 배려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온기가 느껴집니다. 자유는 평등에 의해서 제한을 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호수를 향하여 돌을 던져보세요. 물이 원을 그리며 파문이 퍼져갑니다. 다시 돌을 던져보세요. 다른 파문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퍼져갑니다. 파문과 파문이 만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평등을 고려해야할 부분입니다. 존재는 무한 자유를 꿈꾸지만 자유와 자유가 만나는 부분이 평등을 생각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최초의 충돌은 갈등이지만 혼자 살아가기에 힘든 세상이라면 조정을 하며 살아야 하겠지요. 굳이 반대 입장에서 세상을 다시 보자는 말을 이렇게 장황하게 했습니다. 권혜창 시인의 시가 통이 커서 그랬습니다.

   

꽃 안에서 얼음을 꺼내고

나비 날개에서 폭풍을 꺼내고

창살 속에서 감옥을 꺼내고

 

존재 안에서 본질을 파악하고, 작은 것에서 거대한 흐름을 꺼내는 권혜창 시인의 능력을 확인하는 부분입니다. 물 속에는 얼음인자와 증기인자가 함께 들어있다고 합니다. 한데 끓는 물에서도 얼음인자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여성에게 남성 호르몬이 흐르고, 남성에게서 여성 호르몬이 존재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입니다. 너무 심하게 웃으면 눈물이 나지요. 너무 슬퍼도 눈물이 납니다. 본질은 둘이 아닌 하나에서 발원하고 있음을 보곤 합니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하나지요. 삶에서 죽음을 제거해 버리면 삶의 의미가 많이 달라집니다.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삶의 정체성이 달라지고 삶의 방법도 달라지더군요. 권혜창 시인의 「다이나믹 싸인」에는 극단의 만남을 주선하고 있습니다. 극단과 극단은 서로 다른 세계의 대치를 보이는 지점이지만 권혜창 시인의 시에서는 화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식인다운 면모와 깊은 눈매에서 이미 눈치를 챘어야 했습니다.

권혜창 시인은 1960년 서울 출생으로 성균관대학교,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을 나와 등단하였습니다. 시집 「눈 속의 에덴」과 한 어린 영혼의 우울증 회복 일기「로뎀나무 아래서」가 있습니다. 우울증을 앓았던 권혜창 시인의 편지글 형식의 글입니다. 슬픔을 배운 시인이지요. 우울, 슬프고 불행한 감정을 말합니다. 근심스럽거나 답답하여 활기가 없는 증상을 말합니다. 눈물의 강을 건너지 않고 어떻게 인생을 안다고 하겠습니까. 시는 시인을 닮는 정도가 아니라 시인의 한 부분입니다. 시인이 체화된 것이 시지요. 시인을 알아야만 시가 제대로 보입니다. 「로뎀나무 아래서」를 평한 신현자 시인의 글을 소개합니다. 권혜창 시인을 일러 이렇게 적었습니다.

 

사랑스런 어린양이 홀로서기를 하려고 잘 펴지지 않는 다리로 디디려다 주저앉고 일어서곤 하는 모습들 … 아픔 속에서 오히려 눈부시게 영혼의 샘물을 길어 올리는 저 맑은 눈! 누가 저 여인을 사랑하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여자 시인이 여자 시인을 평한 글입니다. 여자가 여자에게 반하는 것은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는 지극히 인간적인 눈이지요. 이성적인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순수한 한 사람의 면모에 반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깊은 성찰과 사색이 만들어낸 속 깊은 시인입니다. 우울을 건너서 만나는 햇살이 눈부시지요. 우리에게 유일한 창문인 눈은 감으면 닫힙니다. 우리의 몸이 어둠이라면 눈은 창인 게지요. 눈을 뜨는 순간 세상과 소통을 시작합니다. 우울증을 앓았던 시인이 긍정으로의 전환에 날개를 달았습니다. 나비가 허공을 저어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입니다. 맹물과 공기만으로 생을 일으켜 세우는 나무가 그렇듯이 나비가 날아가는 것은 놀라움입니다. 나비는 천국을 마음을 배워와 아름답습니다. 사람도 희망을 품으면 웃음이 고와지지요. 희망이 천상의 뜻을 배워온 마음이거든요. 누가 그러더냐고요, 그야 저지요. 저도 팔랑거리며 하늘을 접었다 펴는 나비의 날갯짓에서 배웠거든요. 날개가 아름다운 나비는 하늘마음을 알거든요. 시는 벌써 중반을 넘어갑니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희망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희망을 이루는 건 실천인 거 아시지요. 간절한 기도보다 땀방울이 더 아름답고 빛나는 거 아시지요. 그래서 기도하는 매끈한 두 손보다 노동하는 뭉툭한 손이 더 아름답습니다.  

 

나는 즐거이 생의 잣나무를 켜리

틈새마다 꼼꼼히 역청을 발라

한 척의 든든한 방주를 지으리

 

낱말의 암수를 쌍쌍이 모셔와 살게 하리

알 속에서 부리 노란 새가 콕콕, 세상을 노크할 때

지켜보던 어미 새도 콕콕, 알을 깨뜨리는 줄탁동시

 

행동하는 시인으로 권혜창 시인은 거듭나고 있습니다. 우울이 가르쳐준 건 우울을 벗어나야 삶에 온기가 돌고 향기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 안과 밖에서 함께 해야 일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원리와 조금은 비슷합니다. 병아리가 알 안에서 껍질을 쪼는 것을 줄啐이라 하고 어미닭이 밖에서 알을 쪼는 것을 탁啄이라 하는데 이것이 함께 이루어져야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 나올 수 있습니다. <알 속에서 부리 노란 새가 콕콕, 세상을 노크할 때 / 지켜보던 어미 새도 콕콕>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냐고요, <낱말의 암수를 쌍쌍이 모셔와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단원들의 다른 목소리와 다른 악기가 지휘자에 의하여 통일된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주고받음의 웅장한 자연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동참하는 일입니다. 권혜창 시인이 지휘자가 되어 세상의 정正과 반反을 합合하여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내고 있습니다. 아마 열매는 시인 듯합니다. 정혜창이란 사람은 시인이고 시인의 소원은 완성된 시를 만들어내는 게 꿈이지요.

 

말言의 새끼들이 태어나

고물고물, 방주에서 세상으로 건너가게 하리

점점 세게, 점점 여리게......

 

권혜창 시인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이 시라는 확증이 더 가는 대목입니다. <말言의 새끼들이 태어나>라는 부분이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떠도는 자음과 모음이 엉키면 소음이 됩니다. 조화롭게 양보하고 배려하면 음악이 되지요. 질서는 다른 것들이 모여 곱게 정리할 때 찾아오는 화합의 무대거든요. 하나의 시를 완성시키기 위하여 시인에게 고난은 오고 고통이 생을 어루만지고 갔다고 위안해 봅니다.

간절하지 않고 어찌 꽃을 피울 수 있을까요. 절박한 사람만이 생의 극단을 이해하게 됩니다. 시도 마찬가지로 슬픔을 건너지 않고서는 깊은 시를 만들어내기 어렵습니다. 환한 웃음도 거친 들길을 건너와서 웃는 웃음이 더 값져 보입니다. 눈물에 소금이 들어있지 않고 설탕이 들어있다면 어떨까요. 실없는 생각이라고요. 맞습니다. 저는 참 실없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람사는 마을에 살다보면 고난이 찾아옵니다. 낙망의 순간에 떨어지는 눈물이 아릿합니다. 떨어지는 것은 눈물뿐이 아니라 의욕이더군요.

사람은 묘하게도 관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관절과 관절의 연결로 이루어져 일어서려면 의지가 필요합니다. 모든 관절은 의지가 사라지면 꺾이거든요. 손가락도 팔도 모두 안으로 굽어있습니다. 꺾어지더라도 스스로를 끌어안으라는 계시인지도 모릅니다. 긍정을 배우라는 뜻입니다. 다만 한 부분만이 밖으로 꺾어지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무릎 관절이지요. 앞으로 걸어갈 때는 지금 가진 것을 버리고 가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두 손에 다 무엇인가를 움켜쥐고 있으면 하나를 버려야 다시 집을 수 있도록 한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두 손이 있는 것은 하나는 자신을 위해 쓰고 다른 한 손은 남을 배려하라는 손이라고 저는 우깁니다.

태초에 손금을 가지고 태어났음에도 육체의 욕망으로 제 길을 잃어버리고는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람사는 세상에는 길이 많아 길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몸이 가고자 하는 길을 가면 인생의 길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마음이 시키는 길을 가야하는 게지요. 우울증을 앓았던 권혜창 시인은 사람에 대한 지대한 관심 때문일 거라고 봅니다. 부족하게 만들어진 육체와 완성되지 않은 정신을 가지고 사는 것이 사람이라 실패는 자연스럽고 고난 또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다시 돌아와 사람에 대한 이해와 성찰이 깊어져 공감의 시를 만들었습니다.  

 

생강나무 가지 사이

반짝이며 빛을 내는 허공에서

가벼운 낱말 하나 주워오고

 

거미의 노동이 지어낸

팽팽한 순간의 비단실과

거기 걸린 날벌레들의 몸에서

떨리는 낱말 두 개 데려오고

 

구름, 바람, 햇빛, 그늘에서

아무 낱말도 가져오지 않아

 

조용히 빈 행간

내가 걷는 오솔길

심심하고 맑은 한 줄의 시

 

 

「권혜창의 ‘오솔길’ 전문」

 

시에서 맑은 종소리가 울립니다. 눈물도 맑습니다. 이슬도 맑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청명이 느껴지는 단어들입니다. 속을 훤히 보이는 내면을 가졌음에도 부끄럽지 않고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 투명을 가졌음에도 오히려 깊은 존재의식을 가지게 하는 것들입니다. 시인의 마음이 맑고 투명해서 맑은 시가 태어났습니다. 아픔을 고이 간직했던 우울의 시간이 마음 안에 맑은 샘 하나를 가지게 하는 계기다 되었나봅니다.

 

권혜창의 언어들은 익어있다. 그녀의 입김이 가 닿으면 서랍 속의 말들은 ‘서로서로 가는 손을 뻗치어잡고’ 꼬불꼬불 세상을 향해 걸어 나오는데 봄 마당의 병아리떼처럼 선명하게 아프다.

 

권헤창 시인의 시세계에 대한 이시영 시인의 평입니다.‘선명하게 아프다’라는 말에서 권혜창 시인의 시세계를 확인하게 됩니다. 극단과 극단의 끌어안음, 큰 것과 작은 것의 살가운 주고받음, 생명에 대한 안쓰러움과 소외된 것에 대한 배려 같은 것이 권혜창 시인의 영혼세계이면서 미덕입니다. 지상에 꽃 한 송이 피어나는 일이 가소로울지 모르지만 우주의 순환을 몸속에서 체화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꽃 한 송이 안에 들어있는 사계절과 비와 눈과 가뭄이 잘 녹아서 가을에 아름답게 피었습니다. 한 송이 꽃의 개화는 위대한 역사지요.‘쪽물의 농도에 따라 그리고 천을 말리는 기후에 따라 어쩌면 완전히 똑같은 쪽빛의 옷감은 절대로 탄생하지 않을지도 모르죠. 저를 쪽빛에 비유하면 좀 우스운 일이기는 하지만, 저도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쪽빛인지 몰라요. 하나님의 천연물감으로 태어난 오묘한 딸.’이라고 말하는 권혜창 시인의 맑고 투명한 시를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권혜창 시인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월간 한비문학'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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