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雪)에 대한 사색 | ||
| 홍일표의 좋은 시 찾아 읽기(71) | ||
| 눈 이재훈 눈을 밟는다 눈이 시린 풍경을 꾹꾹 밟는다 그러나 눈은 온전히 밟혀지지 않고 자꾸만 발등 위로 심지어 무릎까지 올라온다 제 존재를 떠올리려 한다 덮어야 할. 밟혀야 할 운명을 내 발걸음에 의탁한 채 조용한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눈이 떠올라 내 발목을 쥐고 너도 나처럼 떠올라라 떠올라라 머리 위까지 눈이 날린다 # 시인은 결락의 공간을 걷습니다. 눈에 덮인 길, 겨울의 중심을 향해 나아갑니다. 꾹꾹 눈을 밟으며 걷는 길 위에서 시인은 상념에 젖습니다. 아마 시인은 천천히 길을 정독하며 걸었을 겁니다. 바쁘게, 수시로 시간을 확인하며 쫓기듯 달아나듯 걷는 그런 걸음이 아니지요. 한 걸음 한 걸음 시간의 풍경 위에 마음의 그림자를 길게 늘이며 천천히 걷는 걸음이겠지요. 시인은 걸을 때마다 튀어 오르는 눈송이들을 보고 ‘제 존재를 / 떠올리려 한다’고 말합니다. 한낱 눈뭉치에 지나지 않지만 시인의 눈에 눈뭉치는 예사 사물이 아닙니다. 어엿한 생물이지요. 한없이 하늘을 떠돌다 겨우 지상에 내려앉은 눈송이들이 자꾸 치받고 올라옵니다. 시인은 그것을 ‘조용한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눈송이들이 살아나 말을 합니다. 그 말을 시인은 귀담아 듣습니다. 시인의 영성과 예민한 촉수는 세상 만물의 속삭임과 미세한 몸짓 하나까지도 그냥 보아 넘기지 않습니다. 어쩌면 시인은 주술사요 어릿광대인지도 모릅니다. 이집트의 왕이나 로마의 황제들은 어릿광대에게 자문을 구하는 일이 있었지요.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의 황실에는 많은 어릿광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사제나 주술사만큼 존중을 받았습니다. 어릿광대는 왕이 습관적 사고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거리낌 없는 풍자와 농담을 던졌고, 이들의 조언은 신선한 사고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지요. 오늘날 시인도 독자들의 관습적 사고에 정서적 충격을 가합니다. 이재훈 시인 역시 평범한 일상의 풍경을 뒤집어 새로운 삶의 풍경을 보여줍니다. 걸을 때마다 튀어 오르는 눈송이들의 ‘조용한 혁명’을 보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눈송이들이 입을 열어 말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너도 나처럼 / 떠올라라 / 떠올라라’ 눈송이들은 현실의 바닥에서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로 비상하는 삶의 방식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첫 시집의 후기에서 “내 말이 간신히 시가 되는 이유는 눈물을 애써 감추기 위해 부족의 동화(童話)를 꿈꾸기 때문이다.”고 말합니다. 시인이 낯선 이방인으로 떠돌며 꿈꾸는 저곳은 어디일까요? 겨울의 초입에서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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